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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 미술 순례

나의 서양 미술 순례

서경식 | 창비 | 2002년 02월 2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7 리뷰 30건 | 판매지수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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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88g | 155*209*20mm
ISBN13 9788936470746
ISBN10 893647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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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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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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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박이엽
1936년 출생하여 <아차부인 재치부인> <오늘도 푸른 하늘> 등의 방송 드라마를 썼고, 저서로 『여명 2백년』24권과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늙은 수부의 노래』등 많은 번역서가 있다.

YES24 리뷰 YES24 리뷰 보이기/감추기

--- 박상준 laughter@yes24.com
『서양미술사』에 부친 곰브리치의 서문을 보면, 그가 가장 염두에 두는 이 책의 독자는 "자신들의 힘으로 미술 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이며, 이들은 "유식한 체하는 전문 용어의 나열이나 엉터리 감정들을 재빨리 알아내어 분개할 줄 아는 비평가들"이라 적혀 있다. 현학적인 용어의 남발이나 얄팍한 감정의 나열로 채워진 글은 현명한 독자(아마추어 비평가)들에 의해 바로 걸러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들을 분노케 하지 않고 감동과 외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런 글(책)에는 한동안 지속될 수 있는 생명력이 깃들이게 마련이다.

하나의 붐으로서 미술관 기행기나 그림 읽기에 대한 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눈밝은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되읽히는 책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이다. 지난 1992년 창비 교양문고판으로 출간되었을 때는 흑백도판이었으나, 이번에 칼라도판으로 교체되고, 겉표지는 양장으로 씌워져 새로 나왔다.

이 책은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서양미술 감상의 길라잡이'책이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유럽의 미술관 순례기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사실 미술관 관람기로서도 거의 원조격이지 않을까), 지난 10년간 이 책의 생명을 유지해주었던 것은 저자가 작품들과 대화하면서 생생히 드러내는 '깊은 슬픔'과 절제된 '분노'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슬픔과 분노는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그의 가족사에 기인한다.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났다는 것―이것이 왜 슬픔과 분노를 담보할 수밖에 없는지 알고 싶다면, 비디오 가게에 가서 라는 영화를 골라보시길, 그나마 가장 유쾌하게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로 인해 두 형(서승, 서준식씨)을 0.72평짜리 시멘트 독방에 놓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어깨 위에 지워진 부당한 운명의 무게"였다.

어깨 위에 얹혀진 운명의 십자가 때문인지 저자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간직한"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것은 고통과 상처이다. 그것은 육신에 가해지는 아픔으로 표현되거나 그림 속 인물들의 "강렬하면서도 고요한" 슬픔을 담은 눈길로 나타나곤 한다.

가령, 옥수수 껍질마냥 벗겨지는 다리 가죽의 아픔을 아는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는 (아직 살아 있음의 증거인) 눈동자의 수인을 그려낸 <캄비세스왕의 재판>이나, 제자들에게 옆구리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헤집어 보여주는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 같은 작품은 육신의 상처와 고통의 극단을 보여준다.

저자의 눈에 포착된 궁정의 난쟁이나 신분을 알 수 없는 여인네, 화가 쑤틴 등의 인물은 "아련한 두려움과 슬픔을 담고 있는" 눈길을 지니고 있다. 감옥에 갇혀 고문과 체형을 받고 있는 두 형과 그 형들을 외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누님, 어머니를 아우르는 자신의 시선이 그림 속에서 확인되는 것 같다.


좀더 구체적으로, 갇혀 있는 형들의 고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바라보는 사람으로서의' 저자는 고흐의 동생 테오에 자신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구도자·혁명가를 괴롭혀 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고독'은 고흐(형들)에게뿐 아니라 테오(나)에게도 있었다. 그것을 처절한 색채감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형의 역할이었고, 그것을 말없이 감수하는 일이 아우의 몫이었다."

결국, 이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자신이 품은 '슬픔과 고독'의 표현물이자 고통받고 있는 자와 그것을 고통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 사이의 단절을 인정할 수 없었던 저자의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물일 것이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상한 그림이다. 휘갈긴 듯한 독특한 터치. 부인의 눈동자 같은 데는 물감덩어리를 이겨 발랐을 뿐 아닌가. 그런데도 그 눈길은 아련한 두려움과 슬픔을 담고 있어 무언가 긴 이야기를 걸어 온다. 어째서 이렇든 강렬한데도 이렇듯 고요한 것인가?...... 지금까지 나는 쑤띤 특유의 일그러진 포름을 그의 미칠 듯이 날뛰는 격정에서 온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그의 눈에 하나 가득 고여 있는 눈물 탓인지도 모른다.(중략)

모딜리아니가 죽은 뒤 쑤띤은 미국인 수집가에게 인정을 받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대전중에는 독일에서 망명힌 유태인 애인 겔다 구로드와 함께 나찌의 손을 피해 중부 프랑스를 전전했다. 1940년 여인은 비시 정권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그 자신은 종전 전야인 1943년, 장질환 치료에 때를 놓치는 바람에 빠리에서 죽었다. 모딜리아니의 때이른 궁사(窮死)와는 다르지만 '고향을 등진 자, 조국을 잃은 자'의 절통한 객사임에는 다름이 없다.
---pp. 48~49
세월이란 이렇듯 흘러가는 것인가. 이 기간 세계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옥중에 갇혀 있던 두 형은 살아 석방되었고, 문민정권이 탄생한 이후, 최근에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도 실현되었다. 이는 분명 좋은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한 하늘이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듯이, 하나의 희망 뒤엔 금세 새로운 불안이 밀려든다. 역사는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 세계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좋은 변화가 많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가까운 미래가 희망에 차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사는 일본에서는 우경화가 해마다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런던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강대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향해 폭우와 같이 폭탄을 쏟아붓는 모습과,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탱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리에 공격을 가하는 모습, 혹은 일본의 해상보안대가 이른바 ‘괴선박’을 공해에서 격침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니, 전쟁과 대량학살, 난민의 시대는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온몸을 짓누른다.
런던에서의 어느날,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본서 139면 참조)와 재회하기 위해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리스도상은 이전과 같은 전시실에, 그러나 이전보다는 높은 위치에 걸려 있었다. 15년 만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 아래 가만히 서서 상흔의 깊고 어두운 구멍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시의 나를 위협해 마지않던 불안과 초조가 새삼 가슴속에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세월이란 이렇듯 흘러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몇번이고 거듭된다. 불안과 초조의 절벽에 내몰려 몸부림치듯 하루하루를 살다가 마침내 평안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역사 앞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할 뿐.” 30대의 내가 이 책에 새겨넣었던 말을 이제 다시 한번 50대를 맞은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누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오빠 마음에 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둑한 속에서 언젠가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하애 한다. 설사 불행을 엮어내게 된다 하더라도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보려고 버둥거려볼 수밖에 없다.
--- p.126
내 형들 중의 하나는 베토벤을 숭앙하고 루오(George Rouault)를 사랑해서, 필시 차입해준 책의 삽화 같은데서 보았을 이 '노예'를 예찬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예찬 어쩌고 할 관조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는 또 한 형과 함께 투옥되어 이 시점까지 12년을 살았건만 석방될 희망이 없었다. 도대체 예술감상 같은 것과는 멀찍이 격리되어 있었다. 반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빈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을 떠날 때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미껠란젤로의 '노예'를 보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치부해두고 있었다. 형을 대신해서 이 눈으로 그것을 확실히 보아둘 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명분없는 여행을 떠나기 위한, 내 스스로에 대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노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형에게 보낼 그림 엽서에 적을 소감을 정리해 보려고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라느니, "육체의 어두운 외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혼"이라느니, 그럴싸한 수사학이야 왜 없으랴. 하지만 그런 것을 쓰고 있겠는가.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pp. 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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