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그림이다. 휘갈긴 듯한 독특한 터치. 부인의 눈동자 같은 데는 물감덩어리를 이겨 발랐을 뿐 아닌가. 그런데도 그 눈길은 아련한 두려움과 슬픔을 담고 있어 무언가 긴 이야기를 걸어 온다. 어째서 이렇든 강렬한데도 이렇듯 고요한 것인가?...... 지금까지 나는 쑤띤 특유의 일그러진 포름을 그의 미칠 듯이 날뛰는 격정에서 온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그의 눈에 하나 가득 고여 있는 눈물 탓인지도 모른다.(중략)
모딜리아니가 죽은 뒤 쑤띤은 미국인 수집가에게 인정을 받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대전중에는 독일에서 망명힌 유태인 애인 겔다 구로드와 함께 나찌의 손을 피해 중부 프랑스를 전전했다. 1940년 여인은 비시 정권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그 자신은 종전 전야인 1943년, 장질환 치료에 때를 놓치는 바람에 빠리에서 죽었다. 모딜리아니의 때이른 궁사(窮死)와는 다르지만 '고향을 등진 자, 조국을 잃은 자'의 절통한 객사임에는 다름이 없다.
---pp. 48~49
세월이란 이렇듯 흘러가는 것인가. 이 기간 세계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당시 옥중에 갇혀 있던 두 형은 살아 석방되었고, 문민정권이 탄생한 이후, 최근에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도 실현되었다. 이는 분명 좋은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한 하늘이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듯이, 하나의 희망 뒤엔 금세 새로운 불안이 밀려든다. 역사는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 세계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좋은 변화가 많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가까운 미래가 희망에 차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사는 일본에서는 우경화가 해마다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런던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강대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향해 폭우와 같이 폭탄을 쏟아붓는 모습과, 이스라엘군의 전투기와 탱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리에 공격을 가하는 모습, 혹은 일본의 해상보안대가 이른바 ‘괴선박’을 공해에서 격침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니, 전쟁과 대량학살, 난민의 시대는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온몸을 짓누른다.
런던에서의 어느날,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본서 139면 참조)와 재회하기 위해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리스도상은 이전과 같은 전시실에, 그러나 이전보다는 높은 위치에 걸려 있었다. 15년 만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 아래 가만히 서서 상흔의 깊고 어두운 구멍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시의 나를 위협해 마지않던 불안과 초조가 새삼 가슴속에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세월이란 이렇듯 흘러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몇번이고 거듭된다. 불안과 초조의 절벽에 내몰려 몸부림치듯 하루하루를 살다가 마침내 평안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역사 앞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할 뿐.” 30대의 내가 이 책에 새겨넣었던 말을 이제 다시 한번 50대를 맞은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누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오빠 마음에 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둑한 속에서 언젠가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하애 한다. 설사 불행을 엮어내게 된다 하더라도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보려고 버둥거려볼 수밖에 없다.
--- p.126
내 형들 중의 하나는 베토벤을 숭앙하고 루오(George Rouault)를 사랑해서, 필시 차입해준 책의 삽화 같은데서 보았을 이 '노예'를 예찬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예찬 어쩌고 할 관조적인 얘기가 아니다. 그는 또 한 형과 함께 투옥되어 이 시점까지 12년을 살았건만 석방될 희망이 없었다. 도대체 예술감상 같은 것과는 멀찍이 격리되어 있었다. 반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빈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을 떠날 때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미껠란젤로의 '노예'를 보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치부해두고 있었다. 형을 대신해서 이 눈으로 그것을 확실히 보아둘 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명분없는 여행을 떠나기 위한, 내 스스로에 대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노예'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형에게 보낼 그림 엽서에 적을 소감을 정리해 보려고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광풍이 소용돌이쳐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른다.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라느니, "육체의 어두운 외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혼"이라느니, 그럴싸한 수사학이야 왜 없으랴. 하지만 그런 것을 쓰고 있겠는가. '노예'는 나의 형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pp. 5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