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지금까지 진심으로 그를 대하는 사람은 오직 소경예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그는 기린지재를 가진 소철이었지만, 소경예의 눈에는 언제까지나 그냥 매장소였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풍운을 일으켜도, 그 젊은이는 그와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의 마음을 추호도 잃지 않았다.
소경예는 항상 평화로우면서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은 눈으로 정쟁을 지켜봐왔다. 그는 아버지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소 형의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이 같이 서 있을 수 없는 현실에 슬퍼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자신과 매장소 사이의 우정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솔직하고 의심 없는 태도를 견지하며, 매장소의 물음에 사실대로 답했다. ‘소형이 무슨 목적으로이런 걸 묻지?’ 하고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 생일잔치에 초대한 것도 그랬다. 매장소는 이 젊은이의 밝은 마음을 너무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소경예는 아버지에게 반항할 생각도, 매장소를 바꿔놓을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친구를 사귀려 할 뿐이었다. 마치 시원한 바람 부는 하늘에 뜬 환한 달처럼. 그런 사람이 녕국후부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며 생각을 털어냈다. 덜거덕거리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벌써 가까이 와 있었고, 이제 와서 아무리 생각해봐야 소용없었다. 지난 과거에 뿌린 씨앗을 다시 거둬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p.143~144
“왜? 왜 꼭 혼자 짊어지려는 건가? 정왕이 모든 진상을 알게 되면 분명히 더욱 더…….”
“도리어 일을 그르칠 뿐입니다.”
매장소가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경염은 지금 황위에 앉겠다는 결심이 강합니다. 제가 의견을 내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듣기는 하지요. 제가 세운 계획, 제가 시키는 일, 모두 따릅니다. 한 번도 반항하지 않고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야…….”
몽지는 한참동안 우물우물하면서도 끝내 한마디도 못했다.
“지금은 잡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황위를 얻는 것은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그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저 그 일이 황위를 얻는 데 유리한가 아닌가만 판단하면 됩니다. 최소한, 그 일들이 매장소라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매장소의 말투는 차가웠다. 하지만 눈동자에는 절로 슬픈 웃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제가 임수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선순위가 바뀔 겁니다. 저를 보호하려 하고, 제게 도망칠 길을 마련해주려 하겠지요. 그렇게 하면 제약이 많아져서 오히려 서로 힘들어집니다.”
몽지도 정왕의 인품과 성격을 잘 알기에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반박할 수는 없지만 괴롭고 마음이 아팠다.
“그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저도 편해요.”
매장소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p.210~211
"금종 스물일곱 번이면 대상(大喪)이군요. 황궁에 태후가 안 계시니 저것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장소가 새하얘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참아보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는지 그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왈칵 쏟아져 옷자락을 적셨다.
“종주!”
“형!”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안 의원을 부르러 달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려강은 서둘러 그를 방 안으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곧 안 의원이 나타났다. 맥을 짚어보고 침을 놓으려는데 매장소가 일어나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잠긴 소리로 말했다.
“걱정 할 것 없네. 혼자 있고 싶으니 모두 나가게.”
“종주…….”
려강이 입을 열었지만 안 의원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는 먼저 나가면서 사람들에게도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했다. 유독 비류만 꼼짝도 않고 있었기에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방안이 다시금 조용해지자 매장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변한 눈시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비류야.”
그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증조할머니께서 결국 나를 기다려주지 못하셨구나.” --- p.402~403
"경염, 너는 병사를 부리는 데 능숙하겠지. 짐이 순방영의 지휘를 네게 맡기고자 하는데, 어떠냐?”
“부황의 은혜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다만…….”
“너무 깊이 생각할 것 없다.”
황제는 정왕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당당한 황자이고 누차 전공을 세웠다. 별것도 아닌 순방영을 지휘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부황이 지지해주는데 감히 누가 따지고 들겠느냐? 앞으로 억울한 일이 있으면 말하거라. 내 책임지고 해결해주마.”
황제는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짐이 여기서 쉬면 경염은 물러가야 하지 않느냐. 오랜만에 만났을텐데 짐이 방해하는 게 아니냐?”
“폐하를 모시는 것은 신첩의 첫 번째 본분입니다.”
정비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경염이 당황스러울 겁니다.”
황제는 하하 웃으며 이미 문가로 물러난 정왕에게 말했다.
“경염, 짐이 오늘 너희 모자를 방해했으니 보상을 해줘야지. 앞으로는 언제든 지라궁에 와서 어머니께 문후를 여쭤라. 따로 허락을 청할 필요 없다.”
평소와 달리 관대하게도 잇달아 은총을 내린 황제는, 마지막에 와서야 바라던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정비는 입을 가리고 미소 지었지만 눈에는 눈물이 비쳤고, 정왕은 더욱 더 기쁜 표정으로 옷자락을 걷고 엎드려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
“소자…… 부황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p.434~437
“하늘의 뜻을 받아 황제가 명하노라. 7황자 소경염은 후덕하고 인의롭고 효성이 지극하며, 덕과 예의를 겸비하였노라. 또한 신중하고 충성스러우며, 누차 공을 세웠으니 특별히 정친왕으로 봉하고 왕주 다섯 개의 관을 내리노라. 성은에 감사할지어다!”
소경염이 친왕으로 봉해지기 전까지는, 후궁이나 조정은 물론 황제 본인조차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제한적인 선택권만 갖고 있었다. 태자가 아니면 예왕, 예왕이 아니면 태자였다. 현 상황에서는 누구를 지지할지 확실히 표명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황위에 오를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실의 이품 계급에 머무르던 정왕이 오단 용복을 입고 왕주 다섯 개가 달린 왕관을 쓰고 늠름하게 기세를 뽐내며 예왕 옆에 섰을 때, 그 충격은 처음 그가 친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컸다. 아무리 정치 감각이 무딘 사람들도 그 순간만큼은 조정에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때의 정왕을 예왕과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의 왕관은 아직 예왕보다 왕주 두 개가 적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는 똑같은 일품의 친왕이었다. 왕주 두 개의 차이는 친왕과 군왕의 차이에 비하면 뛰어넘기가 수월해 보였다. 사람에게는 맹점이 있게 마련이다. 오랫동안 쳐다보지도 않고 눈앞에 갖다놓아도 알아보지 못하던 물건도 눈을 가렸던 얇은 창호지를 찢어내고 나면 새롭게 보이는 것처럼, 그 순간 조정의 모든 사람은 정왕도 예왕 못지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522~523
"‘기린지재를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 던 랑야각의 말은 역시 전혀 틀리지 않았군요!”
그 한마디가 칼날처럼 예왕의 심장을 푹 찔렀다.
“무슨 소리냐?”
진반약의 별처럼 초롱초롱한 눈은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작년 가을 강좌매랑이 막 경성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전하께서는 어떤 상황이었고, 정왕은 또 어떤 상황이었나요? 1년 하고도 몇 달이 지난 지금, 전하께서는 어떻고, 정왕은 또 어떤가요? 이 둘을 비교해보면 기린지재를 얻은 사람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지 않으신가요?”
예왕은 비틀비틀 물러나 의자에 털썩 앉았다. 9월경 소경염이 친왕으로 봉해졌을 때부터 의심은 했지만, 내내 주저하며 단언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진반약이 명확하게 짚어주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눈앞의 모든 것을 짓이기고 박살내고 싶었다.
--- p.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