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진 곳
‘나’와 동생은 보증금을 사기당해 하루아침에 공용 화장실과 공용 세탁실을 사용해야 하는 비좁은 방으로 이사한다. ‘나’는 한가운데 마당이 있는 ‘네모집‘이라고 불리는 이곳을 언제쯤 떠날 수 있을까, 화장실과 세탁기가 방 안에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상상하지만 동생의 아르바이트는 잘 구해지지 않고 임용시험을 치는 ‘나’의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다. 견디다 못한 동생은 일본으로 가 프리터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겨울이 지나면 혼자 남게 될 ‘나’는 그날 밤 마당에 서서 네모집 세입자들의 방에 하나둘 불이 켜지길 기다린다.
▶울어 본다
깊은 새벽, 사방이 고요해지면 냉장고가 운다. 냉장고 소음에 섞여 여자도 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여자는 냉장고에 등을 기댄 채 시간을 보낸다. 기억을 거슬러 가다 보면 냉장고가 없던 유년 시절로 돌아가 있다. 원 없이 얼음을 얼려 먹고 싶었던 때. 냉장고를 사고 싶어 일부러 음식을 쉬게 하고 배탈이 난 척했던 때. 이제 여자의 냉장고에는 냉장 냉동 칸 모두 음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어쩌다 냉장고에 이렇게 의지하게 되었을까……. 여자는 새 냉장고를 사고 열심히 음식을 하던 엄마를 생각한다.
▶이불
늙은 어머니가 무릎 수술 때문에 고향에서 올라와 모처럼 아들의 집에 머물고 있지만, 아들은 조금 곤란하다. 아직 어머니에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수술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영락없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돈을 아껴야 하므로 통신사 포인트를 긁어 영화를 보고, 첫눈이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남자는 자신이 계획했던 것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 결혼을, 프러포즈를 꿈꿨던 날이지만 직장도 애인도 남자에게 멀어져 버렸다.
▶수리수리 마수리
중고 가전을 수거하여 먹고사는 여자는 이 동네 소문의 진원지다. 사람들은 여자를 두고 입방아 찧기를 즐긴다. 눈짓 손짓만 해도 남자를 유혹하는 거라고 수근 댔고 그런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자 레즈비언일 거라고 마음대로 추측한다. 고장 난 가전제품을 고쳐 주는 수리상인 남자에게도 그런 시선이 따라 붙는다. 볼품없고 말수가 적고 소극적이어서 결혼 한 번 못 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진정 교류하는 이 없는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은 야광 우산을 든 채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달리는 어린 소녀, ‘야광이’뿐이다.
▶망상의 아파트
203호 남자가 사는 아파트에 한 여자가 이사를 온다. 평범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감시 아래에 있는, 저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흘러들어 오는 이곳의 비밀을 모르는 신참에게 남자는 단단히 주의를 주려는 참이다. 이 아파트를 지키는 감시인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지, 여기에서는 서로서로 믿지 않으니 어떤 태도로 타인을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마침내 여자에게도 묻는다. 이곳에는 감옥이에요. 전부 죄를 지은 사람들만 살아요. 당신은 무슨 죄를 지으셨어요? 그 말에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안나의 일기
안나는 마을 성당의 종지기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안나가 마을 벽 이곳저곳에 적는 일기 때문이다. 안나의 일기는 게릴라처럼 언제 어느 곳에 나타날지 알 수 없으며, 마을의 어떤 비밀을 까발릴지 알 수 없다. 작은 몸에 총명한 눈과 귀로 마을을 누비는 안나는 마을 사람들의 치명적이거나 치졸한 비밀을 숨김없이 일기에 적는다. 물론 그 솔직함의 대상에는 안나 자신도 포함된다. 사람들은 어느새 일기의 독자가 되고, 안나의 글에 따라 서로를 이해하거나 등 돌리고 싸우거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층집
집은 이층이지만, 가족 중 그 공간을 제대로 누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층은 젊은 부부에게 세를 줬기 때문이다. 김 과장과 박 여사, 삼남매와 치매 걸린 시어머니까지 여섯 가족은 한데 복닥거리며 산다. 자매인 수영과 유진은 매번 옷과 화장품을 가지고 다퉜으며, 박 여사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곤두서 있다. 김 과장은 그 모든 일을 방관한 채 딸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에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년 만에 세를 들었던 부부가 이사를 나가고, 비어 있는 이층으로 ‘자기만의 방’을 못내 바라던 두 자매가 올라가게 되는데…….
▶점거
어느 날 집에 커다란 검은 트렁크 같은 물체가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그것을 관찰하던 도중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그 물체가 왼쪽 어깨를 들썩이는 버릇을 가졌다는 것. 그것은 아버지의 버릇이다. 아버지가 여기에 왜? 놀란 감정은 분노가 되고 괘씸함이 되어 여자는 검은 트렁크를 걷어찬다. 푹, 푹, 푹, 푹. 여자의 발길질에도 아버지는 꿈쩍 않고 오히려 더 뻔뻔하게 눌러앉는다. 가장 안락한 자신의 공간을 여자는 편히 누릴 수가 없다. 나가라고 악을 쓰다가 도리어 아버지를 피해 여자가 나와 버린다. 순식간에 아버지에게 집을 점거당했다. 여자는 어디로 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