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농민전쟁은 조선 후기부터 쌓인 봉건사회의 모순이 폭발해 일어난 대규모 농민항쟁으로서 반봉건 계급투쟁의 성격을 지닌 일종의 내전이었다. 농민군은 봉건지배세력인 민씨 정권, 친일 개화파 관료와 지방의 보수적인 양반 지배층에 맞서 투쟁했다. 1차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관군을 물리친 데서 드러나듯이, 외세인 일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있었던 싸움이었다. 그러나 봉건지배세력은 청군이나 일본군을 끌어들여 농민군을 굴복시켰다. 그래서 농민전쟁은 반외세?반침략의 성격도 동시에 지녔다. 농민군의 패배로 봉건적 신분제의 폐지, 토지제도 개혁, 외세의 경제 침탈 저지는 좌절되었다.
--- p.54~55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우선 항일 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공화주의운동을 뿌리내렸다. 3.1운동의 결과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주의를 내세우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또 3.1운동의 주체로 참여한 농민 노동자의 의식이 높아지며 이들 민중이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주력으로 등장했다.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느낀 농민 학생 노동자 등이 시위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폭력으로 나아갔지만, 조직화 무장화하지 못함으로써 큰 희생을 치렀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한 시위 참가자들은 독립군 단체에 참가해 무장항쟁에 나섰다. 끝으로, 일제는 조선 민족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p.68~69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이런 위기는 외부, 즉 소련의 침공 위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동유럽 여러 나라가 공산화했을 뿐 아니라 서유럽의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도 위태로웠다. 프랑스의 경우 독점자본가들이 친나치로 부역한 반면 프랑스공산당은 독일 나치 점령하에서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를 벌였다. 당연히 전후에 프랑스공산당이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파시즘에 맞서 가장 철저하게 저항했던 좌파세력이 전후 서유럽에서도 득세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냉전’을 선언한 진짜 이유는 바로 전후 서유럽 등 선진국들에서 계급 간 세력관계가 이렇게 노동계급에 유리하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 p.93
원조경제의 위기는 정치적 위기로 발전했다. 원조의 배분을 둘러싼 정경유착은 필연적으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로 연결되었다. 경제위기로 나타난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과 분노는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1960년 4.19혁명에 의해 민중의 힘으로 타도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4.19혁명을 주도했지만, 희생자 186명 가운데 94명이 하층 노동자 또는 무직자인 데서 드러나듯이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하층 노동자들이 시위에 앞장서 참여했다. 미국이 이승만을 포기하고 미국의 통제를 받던 군부가 시위를 방관한 것도 4.19혁명의 승리에 크게 작용했다. 이 점은 바로 1년 후에 4.19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정권이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쉽게 전복된 데서 확인되었다.
--- p.115
1960년대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은 친미독재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해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적 공업화를 안정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군사쿠데타와 군사 독재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전력에도 불구하고 군부세력이 참신한 세력으로서 부패를 일소하고 경제 개발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사후적으로 승인했다. 박정희 정권은 고도경제성장을 통해서만 내외적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해 반공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제시하고 좌파 세력의 척결부터 시작해 정치적으로 노동자, 민중억압체제, 즉 독재정치를 실행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과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세력관계를 재구축하고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독재를 필요로 했다. 그 주요수단은 중앙정보부를 통한 ‘정보정치’였다.
--- p.134
주목해야 할 점은 1970년대의 학생운동이 전태일의 분신 투쟁을 계기로 노동자 민중운동을 새롭게 평가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수준을 넘어서는 계급투쟁의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등장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섬유노조 산하의 원풍모방지부, 동일방직 인천지부, 반도상사 지부, YH무역지부, 금속노조 산하 콘트롤데이타지부, 연합노조 산하의 청계피복지부 등 ‘민주노조’가 탄생했다. 이 민주노조들은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히고 심화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다른 민중운동의 선구가 됨으로써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라는 자유주의적 정치운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민주화운동의 폭을 넓혔다.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문제라는 사회적 문제를 민주화운동의 과제에 포함시켰다. 무엇보다도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과 중간계층의 반(反)유신 민주화투쟁을 계급투쟁의 ‘경제적 형태’와 ‘정치적 형태’로 통일시키는 계기가 됨으로써 중간계층의 반유신 민주화투쟁을 정치적 계급투쟁으로 발전시켰다.
--- p.165
1980년대 이래 ‘지구적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 경제의 특징은 사회 양극화와 저성장, 그로 인한 경제의 금융화와 부채경제화, 그리고 제한된 세계시장을 둘러싼 경쟁의 격화 등으로 나타났다. 현재 진행 중인 자본주의 제4차 구조위기인 21세기 세계장기 불황은 2008년 세계금융공황으로 갑작스럽게 발발한 것이 아니었다. 위기 조짐은 10여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에 수립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즉 ‘지구적 자본주의’는 안정적인 축적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하에서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인 노동계급의 빈곤화, 과잉생산 경향 등이 더욱 극단화된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찍이 1990년대 말부터 과잉생산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후 10년 동안 IT거품 성장과 붕괴, 주택거품 성장과 붕괴를 거쳐 2008년 세계금융공황에 이르게 되었다.
--- p.237
신자유주의적 재벌체제 20년이 지난 한국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생산력 차원에서 보면 ‘선진국’이지만, 생산관계 차원에서 보면 말 그대로 ‘헬조선’이다. 재벌을 제외한 모든 경제 주체들은 재벌의 초과이윤을 위한 제물이 되고 있다. 파쇼적 재벌체제에서 형성된 재벌체제의 본질인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와 노동계급의 무권리 상태는 신자유주의적 재벌체제에서도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약간의 변화는 한국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에 따라 부분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진지가 구축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정부부문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80%의 절대다수 노동자, 민중은 파쇼적 재벌체제 때와 똑같은 저임금-장시간노동과 무권리 상태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계급 간 세력관계도 박근혜 정권 때에 이르러 수구세력이 ‘신공안통치’를 시도하고 파쇼적 행태를 거리낌 없이 강행할 정도로 거의 파쇼적 재벌체제 시기로 되돌아갔다.
--- p.366~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