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양에게 푹 빠진 거지?" 앨리스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렸고 앨리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나는 앨리스가 아니라 어둠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키티 버틀러를 보면, 마치……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마치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몸에 뭔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와인이 들어 있는 와인 잔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키티 버틀러 앞의 공연들도 보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먼지와도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키티 버틀러가 무대로 걸어오면……. 그 여자는 너무 예뻐. 옷도 무척 멋지고, 목소리는 아주 달콤해. 키티 버틀러를 보고 있으면 울고 웃고 싶어져. 동시에 말이야. 그리고 날 아프게 해. 여기를." 나는 가슴에, 흉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전까지 키티 버틀러 같은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키티 버틀러 같은 여자가 있다는 걸 몰랐어……." 내 목소리는 떨리는 속삭임으로 바뀌어 있었고, 곧 나는 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p.31
나는 키티의 장식이자 메아리였다. 나는 키티가 밝게 빛나며 무대를 가로질러 던지는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림자로서 나는 키티에게 그전까지 없었던 깊고 선명한 가장자리가 되어 주었다. 그건 전혀 하찮은 일이 아니었고, 나는 만족했다. 오직 사랑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공연이 잘되면 잘될수록 사랑도 더 완벽하게 자란다고 생각했다. 결국 둘은, 공연과 우리 사랑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둘은 함께 태어났다. 아니 내가 생각하기 좋아하는 대로라면 하나는 다른 하나로부터 태어났으며 단지 둘 중 하나만이 남들 앞에 보이는 형태를 취했을 뿐이었다.
--- p.170
나는 불쌍하고 혼자이며 아무도 돌봐 줄 이가 없었다. 나는 연인들과 신사들을 좋아하는 도시에 사는 외톨이 여자였다. 여자 혼자 걸으면 눈총만 받을 뿐인 도시에 사는 여자였다. 그날 아침에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키티 옆에서 불렀던 그 모든 노래들을 통해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한때는 런던의 여러 공연장을 오가며 신사복을 입고 수없이 뻐기며 걷던 내가 이제는 계집애의 수줍음 때문에 거리를 걸으며 두려워해야 하다니! 정말 잔인한 농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남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 p.249~250
나는 다시 트렁크로 고개를 돌려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병과 스카프, 끈, 꾸러미, 노란 장정의 책 따위 잡동사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물건들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것들이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잡동사니 위에는 사각형 벨벳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그 무엇보다 기이하고 외설스러운 물건이었다.
--- p.311~312
퀼터 스트리트로 돌아와 1페니에 이발을 해준다는 여자네 집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잘라 줘요, 잘라 줘요. 빨리요. 맘이 바뀌기 전에요!" 그 여자는 말아 올린 내 머리를 잘라 냈다. 톰은 대개 이발에 대해 쉽사리 감상적이 되는 경향이 있으나 나는 이 당시 내가 흥분했던 것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머리털을 잘라 내는 게 아니라 어깨뼈를 덮은 살갗을 잘라 내고 그 아래에 숨은 날개를 꺼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p.520~521
나는 다시 플로렌스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 사람들, 프랑스인이라도 되나요?"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못 알아듣겠군요." 그리고 진짜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거리에서 삶을 꾸려 가는 동안 그런 용어를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했다. "〈벨벳을 애무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뭔가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들리는데……." 플로렌스가 얼굴을 붉혔다. "극장에서 해볼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랬다가는 사회자에게 당장 쫓겨날걸요……." 내가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플로렌스는 입술을 벌려 혀끝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아주 재빨리, 내 무릎을 힐긋 보았다.
--- p.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