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담 좋은 두 전문가에게서 ‘별자리에 얽힌 관련 명화와 신화 강연’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들은 것 같다. 천문학자 남편과 미술사를 전공한 아내가 공동 저술한 이 책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이 책 부록엔 참고문헌이 없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출처를 밝힌 발췌문과 언급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분량이 많진 않다. (이 책처럼) 숨은 보석은 으레 참고문헌까지 찾아보고 기록해두었다가 그중 몇 권을 선정해 사 읽곤 하는 나로서는 참 아쉬운 부분이다.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옥에 티’라고 할까.
민음사의 『신통기(헤시오도스/김원익 역)』, 리베르 『그리스로마신화를 보다①,②(토머스 불핀치/노태복 역)』, 아울북 판형의 만화로 읽는 초등 인문학 『그리스로마신화』 11권을 본서와 함께 동시에 읽었는데, 그중 이 책이 가장 디테일하고 종합적인 듯하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독서를 할 수 있었다.
“-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은 뛰어난 기마술을 가진 호전적인 전사였다. 그들은 적의 피를 마시고 머리 가죽을 벗겨 냅킨으로 사용했다고 할 만큼 악명이 높았다.” (궁수자리, 216쪽)
고대 그리스인들이 켄타우로스를 반인반마로 형상화한 이유가 스키타이족에게서 느낀 충격과 공포의 결과였다니. 놀랍기도 하고 그럴 듯도 하고.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 문장을 발췌함으로써 그 근거를 제시한다.
켄타우로스 종족은 그리스 테살리아의 왕 익시온의 후예라고 한다. 케이론(궁수자리)도 사티로스, 판과 비슷한 반인반마(半人半馬)인 켄타우로스다. 그는 크로노스의 겁탈을 피해 암말로 변신한 필라라(바다의 님프)에게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고 아폴론에게 예언과 치유, 음악, 양궁 등을 배웠고, 아폴론의 쌍둥이 누나인 아르테미스도 그의 양어머니가 되어 교육을 담당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괴팍하고 난폭한 켄타우로스들과는 달리 그는 지혜롭고 기품이 있었던 데다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고 한다. 영웅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이아손, 테세우스, 아킬레우스는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궁수자리는 황도 12궁 중 하나로 전갈자리의 동쪽, 염소자리의 서쪽에 있는 별자리다. 케이론이 궁수자리가 된 사연은 헤라클레스와 말다툼 중이던 켄타우로스가 케이론의 거처로 도망갔는데 그때 그를 뒤쫓던 헤라클레스가 쏜 독화살(히드라의 독)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사의 존재였던 케이론은 제우스에게 자신을 죽게 해 달라며 고통을 호소했고, 평소 그를 아끼던 제우스는 이를 받아준 뒤, 그를 하늘로 올려 궁수자리로 만들어 준다.
“동양에서는 무덤이라는 뜻의 귀수 혹은 상여라는 의미의 여귀라고 일컬었으며, 서양에서는 ‘켄서Cancer’라고 부른다. ‘암Cancer’은 암세포가 게다리같이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 고대 바빌로니아 점성술에서 게자리는 지하 세계의 입구를 상징함으로써 불행과 어둠의 동의어로 불리기도 했다.” (게자리, 183쪽)
위의 문장을 읽는데 문득 영화 ‘여곡성’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귀라는 용어도 공포 영화에서 많이 등장한다. 보통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이유로든 죽어서도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이승을 떠도는 귀신으로 통하는데... 그리고 ‘암’에 이런 뜻이 담긴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게자리(거해궁)는 황도 12궁의 네 번째 별자리로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처단하려는 히드라를 돕기 위해 거대한 게(카르키노스)를 보낸 데서 비롯되었는데, 카르키노스는 헤라클레스의 아킬레스건을 물어뜯는 바람에 헤라클레스에게 밟혀 죽었다고 한다. 이를 가엾게 여긴 헤라가 게자리로 만들어주었다고. 그런데 흥미로운 건 어두운 별들로만 구성된 탓에 동서양 문화권에서는 게자리를 불길한 별자리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목축의 신 판은 티폰의 공격을 피해 물속으로 뛰어들며 급히 주문을 외우는 바람에 반은 염소, 반은 물고기가 됐다. 그 와중에도 팬파이프를 불어 제우스를 구해주었고. 이를 기특하게 여긴 제우스가 판을 반양반어의 모습 그대로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다. (염소자리, 226쪽)
티폰은 무서운 괴물들 중 탑Top이다. 그런 만큼 그에게 죽임을 당한 신화 속 인물들도 꽤 된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물속으로 뛰어들었을까마는. 어쨌든 그로 인해 반인반어가 되었다니 그도 참 안됐다. 신화엔 버림받는 자식들이 왜 이리도 많은 건지. 그들 중 다수는 끔찍한 외모로 인해 그런 운명이 된다. 판도 그랬다. 판은 흔히 술의 신 디오니소스와 어울려 다니며 방탕하고 성적 쾌락을 쫓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웬 팬데믹Pandemic? ‘~를 다 포함하는’, ‘전체의’라는 뜻을 가진 판의 이름 때문인데, 팬데믹의 접두사 ‘팬’이 바로 그 '판Pan'과 같은 의미라서다. 티폰은 태풍을 뜻하는 '타이푼Typhoon‘의 어원이며, '패닉Panic’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단다. 그러고 보니 언급한 단어의 이미지가 모두 어둡고 부정적이긴 하다.
염소자리는 남쪽 하늘의 별자리로 게자리 다음으로 어둡단다. 무려 3천 년 전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에 기록이 남아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고고학자들의 ‘신밧다!’가 들리는 듯. 그런데 그 이유가 더 신선하다. 고대 점성술에서는 동지점을 태양이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데, 이 동지점이 바로 염소자리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현재 ‘염소자리의 동지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모든 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가니메데스에게 반한 제우스는 그 아비에게 황금 포도나무와 불사의 암말 두 마리를 주고 올림포스로 데려와 술 시중을 들게 한다. 불병자리의 가니메데스 손에 들린 것이 사실은 술병이었던 셈이다.” (물병자리, 247쪽)
생소한 인물 ‘가니메데스’ 파트만 찾아서 먼저 읽곤 했는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선 미소년과의 밀애나 동성애가 암암리에 성행했고, 이를 묵인했다. 가니메데스는 트로이의 왕자로 그를 한 번이라도 보게 된 이들은 모두 그에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외모지상주의에 사는 이들 중 혹자는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일단 예쁘거나 잘생기고 봐야 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가니메데스. 조각가로 알려진 미켈란젤로 역시 무려 40세나 젊은 제자에게 동성애를 느껴 그를 떠올리며 시를 남겼단다. 내용은 거의 러브 레터 수준이다.
사랑이 나를 사로잡는다
아름다움은 내 영혼을 묶어버린다
상냥한 눈에 깃든 연민과 자비
나의 심장에 속일 수 없는 희망을 깨운다
물병자리는 과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별자리다. 이는 나사의 우주 망원경이 그곳에서 지하 바다를 발견했기 때문인데, 바로 이 가니메데에 어떤 생명체가 거주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과 직결되어서란다. 헉! 그럼 진짜 외계인이 존재하는 건가? 조금은 황당무계하다 싶지만, ‘그래도 혹시?'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신들조차 두려워했던 강력한 괴물 티폰의 공격으로 연회를 즐기고 있던 신들은 혼비백산해 모두 달아난다. 이때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끈으로 서로를 묶고 물고기로 변해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이 모습이 그대로 별자리가 되었다.” (263쪽)
신화를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극도의 공포에 처했을 때 (강)물(혹은 바다) 속으로 피신하는 게 말이 되나?
흔히들 에로스를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알고 있지만, 몇몇 다른 기록에 의하면 태초에 카오스, 가이아, 타르타로스 등과 함께 에로스도 스스로 태어났다고 한다. 일독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두 신들조차 공포에 떨게 했던 존재 티폰에 대해 좀 더 말하자면 그는 가이아와 지하 세계를 뜻하는 타르타로스 사이에서 에키드나(티론의 아내이기도 함, 이들의 출생도 문헌마다 다름)와 함께 태어났다. 상반신은 인간, 대퇴부부터는 뱀, 용의 형상을 한 100개의 머리에는 강력한 불까지 뿜어대는 눈이 달렸다. 그는 유일한 적수였던 제우스에게 제압당해 에트나 산에 영원히 가둬졌다는데, 그 뒤 그곳이 유명한 화산이 되었다는 내용과 참고 사진을 다른 책에서도 봤다. 남매이자 아내이기도 한 에키드나 역시 무시무시한데, 케르베로스, 히드라, 네메아의 사자, 키마이라가 티폰과 그녀의 자식들이다.
미술사는 물론 작품과 화가에 대한 저자의 사전 지식이 얼마나 해박한지 그 어느 때보다 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교양서적뿐 아니라 미술/신화 관련 공부를 원하는 독자들이 참고도서로 이용하는데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소장하고 두고두고 재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여름밤 평상 위에서 올려다 본 밤하늘에는 무수히 쏟아지던 별들이 있었다
'저 많은 별들 중에서 내 별은 어디 있지?' '저기! 저기!'
순수함이 묻어나던 어린 시절.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보며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별자리 이야기들.
그런 별자리 이야기들을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 그림 속 별자리 신화 ≫ 단순히 별자리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별자리와 관련된 그리스 신화들을 작가들은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을 했는지, 어떤 해석들이 있는지를 저자의 시각에서 해석을 하고 있다.
어릴 적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면 신들의 전쟁이나 이루어지 못한 사랑 이야기들에 열광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성인이 된 후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마냥 흥미롭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내용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제우스, 질투에 사로잡혀 오히려 피해자인 대상들에게 보복을 가하는 헤라, 납치와 감금, 강간이 난무하는 막장 드라마의 결정체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읽는 시기에 따라 흥미로운 부분들도 많았지만 인간의 선과 악, 욕망, 갈등, 전쟁 등 유익하지 않은 이야기 들도 많은 애증의 이야기였다. 이런 애증의 이야기들까지 그림으로 해석되고 현재를 바라보는 시점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 그림 속 별자리 신화 ≫ 16개의 별자리를 길잡이로 신화와 미술 작품으로 해석한다. 각자 별자리에 등장하는 신화의 내용과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고, 해당 별자리 이야기들을 주제로 화가들이 표현한 그림과 조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서 설명해 준다. 신화를 읽는 즐거움과 작품을 함께 해석하며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책이다.
신화의 이야기에서 선과 악, 욕망과 이성, 시기와 질투, 편견과 허영 등 인간의 본성과 감정들을 신들에게 연결시켜 별자리를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16개의 별자리 중 나의 별자리에 대해 정리해본다.
물고기자리 PISCES
인간은 왜 끊임없이 괴물을 상상할까?
물고기자리
물고기자리는 물병자리와 양자리 사이에 위치하며, 황도 12궁 중 하나다. 안드로메다자리, 페가수스자리와 가까이 있으며 물고기 두 마리가 하나의 끈에 묶여 있는 모습이다. 춘분점의 별자리로도 유명하다. …… 물고기자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에로스와 관련이 있다. 강가에서 신들이 연회를 열고 있을 때 신들조차 두려워했던 강력한 괴물 티폰의 공격했다. 연회를 즐기고 있던 신들은 혼비백산해 제각기 동물로 변신하여 도망을 쳤다. 아폴론은 매, 아르케미스는 고양이,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는 물고기로 변신해 도망쳤다. 아프로디테는 아들을 놓칠까 봐 끈으로 서로를 묶고 물고기로 변해 강물로 뛰어들었는데 이 모습이 그대로 별자리가 되었다.
P.264
보통의 신화나 별자리 이야기라면 여기서 끝이지만 그림 속 별자리 신화 ≫에서는 물고기자리가 탄생하는 데 영향을 준 티폰과 신화 속 괴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괴물들의 탄생과 소멸, 괴물들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고민 주제를 제시했다.
신들조차 두려워한 반인반수 괴물 티폰
티폰은 상반신을 인간의 몸통, 대퇴부에서부터는 똬리를 튼 뱀의 형상을 한 가공한 외모와 힘을 가진 반인반수의 거인 괴물이다. 머리 뒤쪽에는 눈에서 불을 내뿜는 100개의 용 머리가 돋아 있고,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를 지녀 모든 신과 인간을 공포에 떨게 했다. 온몸을 덮은 깃털과 날개는 늘 스스로 일으키는 격렬한 폭풍에 휘날렸다. 하늘에 어깨가 닿고 머리카락이 별들을 빗질할 정도로 거대하고, 두 팡을 벌리면 세계의 동쪽, 서쪽의 끝에 이르고, 날개를 활짝 펼치면 태양을 가려 어둠이 내렸다. 힘 또한 얼마나 센지 하늘과 땅을 찢을 정도이고 그가 지나간 곳에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타버리니 올림포스 신들이라 할지라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오직 제우스만이 그를 대적했고 천신만고 끝에 티폰의 머리를 번갯불로 내리쳐 불태우고 에트나 산에 던져 영원히 가둬버렸다. 활화산이 에트나 화산이 가끔 분출하는 것은 티폰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티폰은 지구의 파괴적인 화산 활동을 의인화한 것이다.
티폰의 괴물 아내 에키드나
티폰의 아내 에키드나도 괴물이다. 그리스어로 살모사를 뜻한다. 상체는 긴 속눈썹을 깜박이는 아리따운 여인이며 하체는 똬리를 튼 거대한 뱀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태초의 신 타르타로스의 딸이자 하데스의 수문장 개 케르베로스, 독사 히드라, 네메아의 사자와 키마이라의 어머니다. 신화의 영웅들에게 자식들을 모두 잃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음산하고 외딴 동굴에서 살면서 밤이 되면 가축이나 나그네를 사냥해 잡아먹는다.
그리스 신화뿐 아니라 세계의 신화, 민담, 설화에 뱀이 많이 등장한다. 뱀은 원죄의 상징이기도 하여 사악한 존재로 분류되기도 하고, 뱀을 신성하고 신비로운 존재로도 나타내기도 한다. 허물을 벗고 부활하는 동물로 뱀에게서 영원한 젊음과 생명력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 속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데 여기서도 뱀은 탈피, 재생, 치유, 부활을 상징한다. 오늘날 각국의 의사협회와 세계보건기구의 휘장에 지팡이와 뱀의 엠블럼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뱀은 이집트나 중앙아시아, 아메리타의 문명에서 신성하게 여겨졌고, 고대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부활과 재생의 상징으로 나온다. 한국에서는 뱀을 영물로 여겼고, 중국 신화에서는 인류의 시조로 복희와 여와가 뱀의 형상이다. 또 뱀은 대지를 기어 다녀 땅과 관련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산과 풍요,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을 지닌 데다가 두 갈래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 때문에 사악함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모든 문명권에서 뱀은 이로움과 해로움, 성스러움과 사악함을 둘 갖춘 복잡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에키드나의 이야기는 인간의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뱀을 사악한 존재로 분류하기도 하고 재생, 부활 등을 상징해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 또한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판단하지는 않을까
하이브리드 괴수 키마이라
키마이라는 머리는 사자, 몸통을 염소, 꼬리는 뱀 혹은 용 모양인 하이브리드 야수로,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괴물 중 하나이다. 하나의 생명체 안에 서로 다른 종의 유전 형질이 함께 존재하는 현상인 키메라라는 학술 용어도 이 괴물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청동상인 <아레초의 키마이라>를 보면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고대 소아시아의 리키아에서 살았는데, 입에서 불을 뿜어 사람과 가축을 해치고 숲과 농작물을 태워 황폐하게 만들었다. 키마이라는 결국 많은 괴물을 죽인 위대한 용사 벨레로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스인들은 화산 분출 현상을 키마이라가 불을 내뿜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티폰과 마찬가지로 화산 활동에 대한 은유의 신화라 보면 되겠다.
프랑스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 오딜롱 르동의 <키아이라, 환상적 괴물>에서 얼굴과 꼬리로 이루어진 도무지 알 수 없는 생명체가 공중에 떠 있다. 화가는 이 기이한 생물을 키마이라라고 했지만, 신화 속 무시무시한 하이브리드 괴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공허하고 슬픈 눈빛을 가진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르동은 <키클롭스>라는 작품에서도 외눈박이 거인을 짝사랑에 상처를 받은 부드럽고 순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등 괴물조차 따뜻한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묘사했다.
키마이라의 모습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무시무시한 괴물로 보느냐 거인을 사랑한 따뜻한 괴물로 보느냐. 모든 이야기의 근원은 초점과 해석이라는 측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
케르베로스는 티폰과 에키드나의 자식이자 히드라와는 남매, 네메아의 사자와는 형제지간이다. 머리가 세 개로, 하나는 하데스의 지하세계 입구에서 죽은 자와 혼을 맞이하고, 다른 하나는 산 자의 침입을 막으며, 또 다른 하나는 무한 지옥 타르타로스를 빠져나가려는 혼백들을 감시한다. 주둥이에서는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등에는 수많은 뱀이 붙어 꿈틀거리며 꼬리 역시 여러 마리의 뱀으로 되어 있다. 한번 들으면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힌다는 그 날카로운 쇳소리로 짖어대며 턱밑으로는 늘 더럽고 끈적한 침이 흘러내린다. 헤라클레스는 이 사나운 괴물 개를 사슬로 묶어 사자 가죽으로 싸서 둘러맨 채 저승을 빠져나왔다.
루벤스의 그림 <헤라클레스와 케르베로스>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역동적인 구도 속에서 케르베로스와 격렬하고 싸우고 있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로 보이는 두 인물이 곁에서 이 공포스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루벤스는 헤라클레스의 과업을 묘사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서술에 의거해 이 그림을 그렸다. 헤라클레스를 돋보이게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영웅담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케르베로스>도 인상적이다. 블레이크는 죽기 전에 단테 『신곡』의 삽화들을 그렸는데 제3지옥 장면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이다. 끔찍한 몰골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는 주홍색으로 활활 타고 있는 불길이 지옥 입구에 앉아, 세 개의 머리로 각각 다른 방향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들을 감시하고 있다.
수문장 케르베로스가 무섭다기보다 늙은 개 같은 느낌도 있고 웃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무섭게만은 표현하지는 않은 듯하다.
화가 나고 무서운 신이라 생각했는데 블레이크의 그림을 보니 케르베로스도 희화화된 개 같은 느낌이다. 무서움을 떨치고자 했던 마음이 일부 반영된 것이라 생각해 본다.
레르네 늪의 독사 히드라
그리스의 아르고스 근처 늪지대인 헤르네에 살고 있는 히드라는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독뱀이었다. 머리를 하나 자르면 금방 그 자리에서 두 개가 새로 생겨 아무도 죽일 수 없었다. 게다가 매우 강력한 독을 갖고 있어 히드라의 독이 닿거나 그녀가 내뿜는 숨을 살짝 들이마시기만 해도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천하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대가리를 자를 때마다 불로 지져서 새로운 머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꾀를 써서 완전히 제거해버린다. 아무리 잘라도 계속 돋는 머리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순간 다른 육구가 생김을 의미한다. 히드라는 만족을 모르고 집요한 욕망과 애착의 화신이다.
귀스타브 모로의 1879년작 <헬 클레스와 레르네의 히드라>에서는 어둡고 음산한 배경 속에서 거대한 히드라가 잔뜩 위로 몸을 쳐들어 헤라클레스를 제압하려 하고, 헤라클레스 역시 결기에 찬 눈빛으로 상대방을 쏘아보고 있다. 히드라 밑에는 희생자들이 처참하게 죽어 쓰러져 있다. 모로는 헤라클레스를 강인한 근육질의 영웅적 풍모보다 호리호리하고 우아한 신체를 가진 귀공자로 묘사한다.
인간과 동물의 혼합종, 반인반수
그리스 신화에는 반인반수들이 많이 등장한다. 켄타우로스, 스핑크스, 미노타우로스, 고르곤 자매, 메두사 등 중국 고대 신화의 삼황오제 중 복희와 여와 역시 사람의 머리에 뱀의 몸통을 가졌고, 신농은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지녔다.
왜 인류는 이런 괴이한 반인반수를 상상했을까? 사람들은 자연재해나 자연현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 등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과 괴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리스인들이 화산 폭발로 수천 명이 죽을 때 땅 밑에 숨어 있는 티폰이 움직인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기도나 괴물을 통해 자연재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티폰의 무시무시한 외모는 자연의 위력과 파괴력에 대한 공포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렇듯 괴물과 괴수, 하이브리드 생물체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다.
다른 관점에서도 생각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항상 동물들이 가진 힘과 특성들을 부러워했다. 만물의 영장으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갖추고 있지만 육체적인 측면에서는 한없이 나약하다. 만약 인간의 정신과 동물의 육체적 장점을 결합한다면 더욱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을 것이다.
신화와 별자리는 자주 접하는 내용이지만, 그림들과 함께한 신화와 별자리 설명 방식은 신선하고, 읽는 재미를 즐길 수 있게 했다.
그리스 신화와 별자리, 그리고 그림을 한눈에 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구 하고픈 분들에게 추천을 한다.
저자 김선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역사를, 동대학원에서 미술사와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며 글을 써오던 중 한국천문연구원 웹진에 게재한 짧은 글 「명화 속 별자리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천문학자 남편 김현구 박사와 함께 『그림 속 천문학』을 출간했다. 별과 우주를 사랑한 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살펴보고 그 속에 담긴 천문학적 요소를 찾아 흥미롭게 엮어낸 책이다.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로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이 연재를 묶고 보완해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를 출간했다. 2020년부터 《한국일보》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