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어렵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재해석해 내놓은 결과물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나름 공들여 작품을 응시하고 음미해보려 노력하지만 바닥에 가까운 나의 내공으로는 돌아서면 잊는 일이 잦다. 아예 무얼 말하고 싶은지 도무지 일어내질 못해 고개만 갸웃거리는 경우도 꽤 된다. 어느 한 분야의 우물을 팔 수 없고, 난해함에 놀라 뒷걸음질치기 바쁜 이들에게 ‘365일 모든 순간의 미술’은 제격이다. 제목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건 ‘365’라는 숫자다. 매일 그림 하나씩을 감상하는 일이 이 책과 함께라면 가능해진다. 독특하게도 저자는 요일별로 주제를 정했다. 월요일은 에너지, 화요일은 아름다움, 수요일은 자신감 등. 주말을 갓 마무리 짓고는 다시금 일터 등으로 복귀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에너지를 월요일에 배치했고, 가장 지칠 법한 목요일에는 휴식을 부여했다. ‘불금’이라는 단어와 함께 모두를 들뜨게 만드는 금요일이 배정 받은 단어는 ‘설렘’이다. 단어만 바라보았음에도 인간의 라이프 사이클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오늘은 어제와 다른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처럼, 각기 다른 키워드와 함께 그림을 접한다면 나의 하루가 어떨지. 밋밋하기 짝이 없는 나날의 연속이라며 지루함을 호소하는 이들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이 가능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분류법은 제각각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요, 저자가 택한 방식 또한 마냥 최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제별로 그림을 고르다 보니 시대가, 정확히는 흐름이 안 보인다. 인간이 예술에 눈을 뜬 고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차츰 고도화 되는 작품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도 은근 쏠쏠하나, 본 책에서 그와 같은 재미를 기대한다면 곤란하다. 시대가 뒤섞인 만큼 한 시절을 풍미한 화풍 등에 대해서도 이 책만을 통해서는 알기 힘들다. 물론 그림마다 이를 그린 인물의 이름과 시기,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긴 하다.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에 따라 이 책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아닐 수도 있다.
나의 눈에 가장 극명히 드러난 차이점은 소재였다. 누군가는 인간을 주로 그렸다면, 풍경이나 사물 등을 향해 눈길을 드리운 이들도 있었다. 인간이 화폭에 담긴 경우엔 긍정적/부정적으로 관점이 나뉘었다.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을 한껏 예찬한 작품이 있는 반면, 후대에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게 분명해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는 있었으나 신이었던 경우도 있었는데, 어느 정도 고정관념이 작용한 탓인지 조금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르네상스 이후, 즉 신의 영향력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로부터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소재로 삼지 않은 까닭이 조금은 궁금하기도 하였다. 차마 인간을 긍정할 수 없었기에 행한 일종의 외면은 아니었을지. 풍경의 경우 아무래도 자연을 묘사한 작품들이 돋보였다. 모사 아닌 묘사라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어느 정도 화가의 재능 또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진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정교함을 뽐낸 작품도 일부 보이긴 하였으나, 빈틈이 없으면 오히려 숨이 막히듯 딱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일일이 점을 찍어 화폭을 채운 인상주의 화법 또한 같은 의미에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분명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고 태양이 뿜어낸 빛으로 세상이 은은하게 물드는 중이었다. 그러나 부분에 집중하려 들면 이제까지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오로지 점만이 남았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게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빛의 속성과 유사하기도 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그 순간에 별반 중요치 않았다.
기억에 남은 몇몇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침대’ 속 두 인물은 서로를 마주본 채 잠들어 있다. 실제로는 깊은 숨소리만이 들릴 듯 말 듯 할 터이나 표정에서 느껴지는 고단함에서 씁쓸하게도 나는 친근감을 느꼈다. 부디 이 잠으로부터 깨어나지 않기를. 어쩌면 그들 또한 이 밤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잠든 내내 기도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덴마크 화가인 칼 빌헬름 홀소에의 ‘반사’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다루고 있다. 인물보다는 창가에 걸린 커튼, 창밖 푸른빛 감도는 풍경이 주를 이루는 거 같은데, 이에 흠뻑 취해 있는 것만 같은 여인의 뒷모습은 마치 시간이 멎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창문의 모양을 고스란히 닮은 그림자가 길이를 뽐내는 게 하루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대임을 말해주는 것만 같아 보인다. 내게선 좀체 찾을 수 없는 여유. 저자는 이 그림을 일요일에 배치함으로써 ‘위안’이라는 키워드를 꺼내들었다. 프레더릭 레밍턴의 ‘정찰병-적 또는 아군’이라는 작품은 금요일과는 다소 아니 어울리는 듯도 하였다. 그림 속에는 사람 한 명 그리고 말 한 마리만이 존재한다. 배경이 온통 하얗고 말에 내쉰 숨은 이내 얼어붙어 하얀 연기가 되고야 만다. 비현실적이지 싶을 정도로 인간은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아무 일 아니 일어날 수도 있다.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았기에 긴장의 연속이다. 평온한 상태에서의 둘러봄을 위한 움직임이라면 살짝 신이 날 수도 있다. 부디 기분 좋은 긴장이기를. 마지막이다. ‘곤돌라를 타고’를 그린 요한 율리우스 엑스네르는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림에 채택했다. 그 덕에 지금껏 눈여겨 본 바 없는 뱃사공의 뒷모습을 비로소 알게 됐다. 곤돌라에 의해 가려진 부분은 한옥 안에 앉아 밖을 바라볼 때를 연상시켰다. 프레임이 있어 더욱 완벽해진, 이유 모를 뿌듯함이 몰려오는 것만 같다.
일단 도판이 커서 각 작품의 세부적인 특징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의 느낌이나 감정이 조그만 도판에서는 읽어낼 수가 없기 때문에
미술작품에 대한 저서는 되도록 큰 도판을 가진 저서를 찾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각 단락을 크게 요일별로 나눠 하나의 소테마를 가져간 점이 감성적으로 따라가기
편하도록 만들었다.
가령 월요일은 에너지라 붙여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 빛의 그림으로
화요일은 아름다움이라 불러 눈부신 기쁨을 주는 명화로
수요일은 자신감과 연결지어 나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색채들을 중심으로
목요일은 휴식과 더불어 불안과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시간으로
금요일은 설렘 가득한 이색적인 풍경과 그림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토요일은 영감과 함께 최상의 황홀하면서도 크리에이티브가 터지는 순간을
일요일은 위안의 시간으로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그림을 다루었다.
더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작품들보다 처음
접하는 작가들을 많이 소개해준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각 요일이
제시해 주는 감정의 선을 따라 365개의 작품을 잘 여행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