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이 올라가면 비로소 시작되는
보다 보면 살고 싶고, 살다 보면 보고 싶어지는 이야기
저자는 지정된 문화/여가 카테고리의 예산이 초과할지라도 넷플릭스 구독은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브루클린 나인-나인〉 시리즈가 언제 또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대했던 드라마의 한 시즌을 부푼 마음으로 정주행하고, 다음 시즌을 기다리며 한 시절의 위로를 받는 우리에게, 이 책에 깊이 스민 작품에 대한 작가의 지독한 애정과 관심은 그래서 더욱 친밀하게 다가온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의 가장 큰 재미는 호쾌한 시선으로 시원하게 파헤쳐진 작품의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 ‘홈즈’가 등장하는 〈에놀라 홈즈〉 편에서 저자는 단지 ‘여성 서사’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소년과 소녀의 모험에 의미를 두고, 소년에게 모험은 집으로의 멋진 귀환으로 끝나지만, 소녀에게 모험은 집이 얼마나 좁고 억압된 곳이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일이라는 사실에 집중한다. 〈보건교사 안은영〉 편에서는 이 사회가 “어차피 지게 되어 있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그 속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떠올리게 하고, 〈킹덤: 아신전〉 편에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차별과 혐오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든다.
스스로를 “맹렬하다”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사유 끝에는 언제나 ‘사람’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물론 그곳엔 밀레니얼 세대의 사랑, 프리랜서 작가의 삶, 페미니스트로서의 주제의식, 마흔 살이 되어 바라보는 삶과 죽음 등 윤이나 작가 개인의 이야기도 함께 놓여 있다. 그렇게 1부의 제목처럼 ‘세계를 구하진 못하더라도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따뜻한 진심을 읽다 보면 어쩐지 그 작품을 보고 싶고, 작품을 보다 보면 그곳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조금 더 아끼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조용한 희망〉에는 각기 다른 인종, 계급, 사회적 위치, 나이의 여성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알렉스는 청소를 하면서 집 밖에서 만났더라면 알 수 없었을 여자들의 복잡한 사연과 마주친다. 인간은 살아 숨쉬기만 해도 먼지를 만들어내고, 몸과 마음이 닿는 모든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증거를 집 안에 진열해놓고 살아가는 생명체다. _본문에서(〈조용한 희망〉)
오늘도 정주행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전하는
해피 엔딩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
이 책에 나오는 24개의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에는 모두 끝이 있다. 이곳에 나오는 여러 가지 엔딩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삶’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콩트가 시작된다〉 편에서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시작한 일의 끝을 보는 것에도 지지부진한 20대 끝물의 청춘 이야기를 마주하고, 〈위 아 40〉 편에서는 마흔이 되어서 던져보는 인종, 나이, 친구, 애인, 동료 관계에 관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스페셜〉 편을 통해서 ‘평범한 삶’이 사실 그 어떤 삶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음을 깨닫고,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편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죽음’을 연습해볼 수도 있다. 더욱이 지리멸렬한 자신의 20대를 드라마 속 인물을 통해 위로받고, 전업 작가로 서울이라는 도시에 사는 일의 고충을 토로하고, ADHD 확진 판정을 받게 된 날부터 중독된 삶에 대해 고심하게 되는, 모든 작품 안에 진실로 녹아 들어간 저자의 삶은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라는 목소리에 짙은 울림을 더한다.
돌이켜보면 20대 때 일주일을 기다리며 본 드라마 속 인물들 역시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것도 없이 텅 빈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만으로 쉽게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해했다. 때로 지리멸렬하고 이상할 정도로 내게만 가혹한 것 같은 삶을, 그래도 같이 견디기로 택해준 인물들이 있어서 지나 보낼 수 있었다. _본문에서(〈콩트가 시작된다〉)
《해피 엔딩 이후에도 우리는 산다》는 그 끝의 다음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 모든 것이 엔딩 이후에 우리로부터 다시 시작될 이야기이자, 꼭 한 번 살펴봐야 할 인생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매일이라는 엔딩이 모여야만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엔딩을 볼 수 있다”라는 그의 말과 글을 아울러 보고 있노라면, 지친 하루 끝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리며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는 사실에 사뭇 즐거운 마음이 들 것이다. 오늘의 하루를 위로받고, ‘마무리’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시간을 선물 받았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