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란 것은 권태기가 오기 마련이다. 하루 종일 질리지 않고 즐길 수 있다 생각했더라도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 낸 작품에 성이 안 차게 되고 연이어 창작에 대한 의지가 스멀스멀 사그라든다. 그럴 때면 창작을 잠시 멈추고 다른 이들이 채워놓은 상상의 바다를 헤엄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흐려진 눈을 깨우는 번개같은 작품을 만난다. 작품의 완벽한 이모저모에 동화되어 잃어버렸던 창작에의 욕구와 열망을 다시금 맛보게 되면, 정체되어 있던 지점에서 한 발짝 나아가 한결 더 날카롭게 벼린 펜을 잡을 수 있다. 김백상 작가의 [에셔의 손]이 내게는 그런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읽기가 참 어려웠다. 문장이 수려해서 글로 나타내고자 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그에 반해 전체적인 플롯에 대한 설명은 불친절했다. 누군가의 행위를 자세히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는 추측만 무성할 수밖에 없는, 작품과 내가 소리가 뭉개지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소통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챕터가 이어지면서 작가의 탁월한 설계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가 알 수 없었던 부분을 각기 다른 사람과 사건의 시선으로 조금씩 파헤쳐 나가며 점점 흥미를 돋운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진실에 대한 갈증이 해결되기 시작하면 작가가 촘촘하게 짜 놓은 세계 속에 푹 빠져들어 숨도 고르지 않고 달리게 된다. 그렇게 닿게 되는 마지막은 깔끔하고 완벽해서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담은 세계는 단순히 문장이 끝난다고 해서 닫히는 곳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글의 형태를 변형해 전뇌를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 나게 전달한 것도 좋았다. 전뇌(전자두뇌)를 생체 뇌에 연결하여 여러 일을 한 번에 병렬로 처리한다는 것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해도 문제가 없지만, 실제로 한 페이지에 여러 문단을 병렬로 배치해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한 것은 과감하지만 멋있다. 덕분에 미래 과학의 실체 - 우리가 상상해온 것들은 대부분 실제가 되어가고 있으니 - 를 더욱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에게는 색다른 시도고 독자에게는 색다른 경험이리라. 읽는 이에 따라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 '기억 삭제'나 '밀리건의 문' 알고리즘 등을 중간중간 도표와 그림으로 표현한 점도 기억에 남는다. 각자의 배경지식에 따라 문장만으로는 온전히 상상해낼 수 없는 것들도 있는데, 그림을 덧붙여 사용하니 직관적이어서 좋았다(다행히 공학 논문의 악몽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에셔의 손]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전뇌를 사용하는 미래 세계와 신인류의 등장'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이야기는 그렇다 할 교훈을 내보이지는 않지만 신체에서부터 뇌까지 공학적으로 강화하는 미래의 사회관과 그 사이에서 새로이 등장한 별종들의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베일에 싸인 일련의 사건을 따라가며 주요 인물들을 관통하는 핵심 사건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건 한 편의 촘촘한 추리 영화 같다. 잘 짜인 가상의 세계는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문장이 생생한 장면을 그려내고, 장면을 통한 상상이 다시 문장 깊숙이 나를 이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엔 이 이야기가 나의 열망을 건드렸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또한 에셔의 손처럼,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고무하며 돌아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번에 장편소설 한 편을 다 읽었다. 흐름이 끊길까봐 별로 쉬지도 않고 다섯 시간 삼십분 동안 몰입했다는 말이다. 『에셔의 손』은 그 정도로 흡인력이 강한 SF소설이다!
『에셔의 손』은 인간의 뇌에 전자두뇌(이하 전뇌)를 이식하는 게 보편화된 사회에서 전뇌해킹을 통해 기억을 삭제하고, 삭제 당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기억을 잃은 사람은 ‘백지증후군’ 환자라 부른다. (이외의 스포는 최소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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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형식 측면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두어 가지 있었다.
첫 번째 특징은 각 장 별로 서술시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각 장의 중심 인물들이 백지증후군을 둘러싸고 다각도로 조명해서 독자가 그 너머의 상황을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1장은 기억을 ‘지우는 손’ ‘김진’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원칙>에 따라 <대상>의 기억을 삭제하려 고군분투한다. 진은 때때로 뜻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육사의 시 「광야」를 읊조리며 일한다.
2장은 전직 격투기 선수 ‘최수연’의 회상이고, 수연의 테마는 ‘살인하는 손’이다.
3장에서는 백지증후군의 내막을 따라 ‘추적하는 손’을 가진 ‘강현우’가 등장한다.
4장은 ‘제3의 손’이라는 제목 하에, ‘정미연’과 ‘섭리(전뇌)’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5장에서는 ‘손과 손’, 진과 현우가 기억을 잃으며 갈등이 고조되고,
마지막 6장에서 ‘손들의 형태’가 드러나며 ‘경’이 열린 결말로 인도한다.
나는 특별히 진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문장들이 마음에 들었다. 작중 공감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고, 감각적인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회로의 분기점에 다다른 전자처럼 나는 고심했다.” “곧게 선 뒷모습이 행성의 이면처럼 검었다.” “빛과 어둠의 인수인계가 마무리되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피어나는 식물의 떡잎처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등이 1장에서 진의 시점에서 서술된 문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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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눈에 띈 것은, 다중작업 처리가 가능한 ‘전뇌’ 설정에 맞게 텍스트가 배치된 점이었다. 15~16쪽에서 진이 <대상>의 정보를 검색하는 장면이라든가, 175~176쪽에서 현우가 잠복해있는 동안 관찰하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2~3개의 텍스트가 세로로 단이 나뉘어 있는 게 ‘전뇌’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였다.
‘섭리’의 전뇌에 담긴 기억이 말하는 부분에서는 “하... 하.. 할. 할머니의 손은 나무껍질처럼 건조했다.” “누... 누.. 눈. 눈을 뜬다.”처럼 페이드인(?) 효과가 보여서 서술자에 따라 달라지는 텍스트를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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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 특징은 아니지만 이육사의 「광야」가 작중 곳곳에서 재현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세련된 ‘한국적’ SF라니! 「광야」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로도 『에셔의 손』이 힙하고 다채로운 문학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섭리’는 <밀리건의 문> 코드를 작성하며 파일 첫 머리에 「광야」를 삽입했는데 그 이유를 듣다보면 ‘섭리’가 상당히 감성적인 공돌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286쪽)
<밀리건의 문>은 한 편의 시와 같다. 한 줄 한 줄 행갈이 된 코딩문이 시의 행을 떠올리게 한다. 행과 행이 얽혀 시의 이미지를 창출하듯 각각의 코딩문들이 맞물려 프로그램에 생명을 부여한다.
(288쪽)
「광야」의 시적 화자는 눈 내리는 세상에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린다. <개벽>을 바라는 나의 심정과 같다. 「광야」야말로 <밀리건의 문>에 걸맞은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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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손』에서 한국적인 요소는 사실 많은 페이지에 스며들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2장에서 수연이 전뇌불능자가 된 대목이 현실적인 한국의 모습으로 생각되었다.
(138쪽)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를 제출하자 ‘전뇌불능자 및 기타생활보호대상자 보호법’에 의해 나는 전뇌부적응자로 분류되었다. 내 몸 어딘가에 ‘불량품’이라는 딱지가 붙은 듯 께름한 기분이었다. 그 딱지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전뇌 이식이 대중화된 시대에는, 원래의 신체와 전뇌가 부적응 반응을 보이면 전뇌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우리 시대의 장애인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여담이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 수연이 기억을 삭제당한 뒤,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는 것을 보고 묘한 기시감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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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임새가 탄탄하지 못한 리뷰였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재미를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첫줄에서도 말했듯이 『에셔의 손』은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고 박진감 넘치기 때문에 누구나 즐기며 후루룩- 읽을 수 있다. 독서가 어렵지만 소설 읽는 습관을 들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