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데우스 호모(Deus Homo)’라는 라틴어 표현의 예수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출처가 있는 말이 아니라, 내가 만든 조어(造語)다.
물론 배경이 없을 수 없다. 히브리대학교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Homo Deus)의 등장 때문이다.
1장에서 좀 더 언급하겠지만, 하라리 교수에게 인류의 대답은 ‘호모 데우스’ 즉 인간이 신이 되는 것, 신과 같은 인간이 되는 길만이 모든 삶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호모 데우스라는 테두리(outline)의 속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호모 데우스의 이상을 성취하는 것이 인간이 가야 하는 길이다.
하라리의 이러한 세계관적 대답의 뿌리는 최초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있었던 것이며, 그 길은 이미 잘못된 것임을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호모 데우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에는 불가능하였지만, 미래는 가능하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러한 ‘호모 데우스’에 대한 나의 비판과 대안이 바로 ‘데우스 호모’다. 인간이 신과 같이 되고자 신의 존재와 명령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서 신의 자녀가 되어 사는 것만이 인류 구원과 행복의 유일한 답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데우스 호모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인류에게 약속한 구원의 백신(vaccine)이 바로, 거듭남의 복음, 거룩함의 복음, 치유함의 복음, 부활함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전통적으로 개신교의 한 교파인 성결교회가 오래전부터 ‘사중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간직하고 전파해 온 것이다.
--- pp.25-26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영혼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 과연 진화론적 과학기술의 실험 결과물들을 가지고 부정될 수 있을까? 하라리 교수는 이러한 사실들을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박또박 주장하고 있다.
『호모 데우스』는 에덴동산의 첫 인류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게 한 뱀의 메시지요, 그 메시지가 유발 하라리라는 현대판 나하쉬의 입을 통해서 다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p.44
하나님은 뱀이 유혹한 호모 데우스의 길, 즉 인간이 신과 같이 되는 길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길,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식의 열매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지식에 기울어져,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인류가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다.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호모 데우스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인간이 되는 데우스 호모의 길인 것이다.
--- p.49
호모 데우스를 향한 21세기 시대정신의 도전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 선 소년 목동 다윗 같아 보인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우리의 손에 들린 사중복음 물맷돌을 힘껏 선포하라고 하신다. 세계 교회는 교파주의 신학의 벽을 넘어 사중복음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다. 사중복음 데우스 호모 예수 이야기로 넘쳐나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라는 성령의 음성이 세계 교회를 향해 울려퍼지고 있다. 지금은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마지막 때다!
--- p.55
부모가 준비해 놓은 의식주(衣食住)를 누리는 세계를 중생의 세계라 한다면, 성결의 세계는 자녀에게 자유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부모 자신의 사랑으로 넘치는 세계다.
하나님의 무한히 깊은 인격의 세계, 완전한 사랑의 심연이다. 헤세드(chesed, lovingkindness)의 세계요,16 아가페(agape)의 세계다.
중생자의 경험이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것들을 놀라움으로 구경하는 차원이라면, 성결자의 경험은 하나님의 헤세드 혹은 아가페를 맛보고 참여하는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의 세계로 들어온 자는 성령으로 태어남으로써 육신의 허물을 벗고 날갯짓을 하여 좁은 둥지를 떠나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는 하였지만, 날개짓을 하지 않고 창공을 나는 활공(滑空)의 세계는 아직 모르는 존재다. 우리는 성결의 세계를 이처럼 ‘날개짓이 필요 없는 활공의 세계’로 비유해 볼 수 있다.
--- p.111
사중복음이 뿌리내리고 있는 원천은 ‘하나님의 복음’이요, 사중복음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성령은 성부의 말씀과 성자의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들이 중생·성결·신유·재림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이 사중복음이 그들에게 온전한 생명의 복음으로 경험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이와 같은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 위에서 교회는 흐트러짐 없이 사중복음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중복음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그리고 사중복음의 능력이신 성령의 관점에서 성경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구원·심판의 활동을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 위에서 사중복음 해석학의 성서·교의학적 초석을 신학적으로 정당히 수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 p.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