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 그러니까 김동호는 학계에서는 기인으로 통했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민속학이라는 학문, 그중에서도 비주류인 설화만을 전문으로 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학부생 시절부터 광적인 면이 있었다. 하나에 몰두하면 끝을 보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않았는데 그의 그런 기질이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지나칠 정도로 과감한 주장을 한다거나, 자기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맹렬히 비난한다거나 해서 온갖 사람과 마찰을 빚었다. 심지어는 지도 교수님과 싸워 내가 중재했던 적도 있었다.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된 후에도 김동호의 이런 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져 문제적이라 부를 만한 논문을 속속 발표했고 그것에 대해 다른 학자들과 종종 설전을 벌였다. 5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 p.12
침대는 투명한 돔으로 덮여 있었고, 아무래도 그 안은 냉동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군데군데 살점이 붙은 해골이 누워 있었다. 나는 무서움을 꾹 참고 두 개의 해골을 꼼꼼히 살펴봤다. 해골, 그러니까 뼈 자체는 부러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해 보였다. 다만 그런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 p.37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대지에 모양, 색깔, 크기가 모두 다른 꽃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토록 넓고 평평한 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놀라고, 형형색색의 식물이 땅 전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걸 보며 다시 놀랐다. 제주의 바다만큼이나 파란 하늘은 지면과 닿을 듯 낮았고 그 하늘 어딘가에서 찬란한 빛이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땅은 전부 흙으로 덮였는데 그 색깔이 묘했다. 검다면 검고, 붉다면 붉은색이었다. 각도에 따라 색이 달리 보였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꽃과 나무 그 자체였다. 어느 하나 평범한 식물이 없었다. 언뜻 해바라기를 닮은 꽃은 샛노란 꽃잎에 검은색 반점이 나 있었다. 게다가 거의 나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키가 크고 잎도 넓었다. 파란색 꽃은 꽃술이 길게 뻗어 나와 바람에 나부끼며 그야말로 황홀한 춤을 선보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나무 중 일부는 정확하게 세로로 나뉘어 한쪽은 흰색, 다른 쪽은 검은색이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적갈색 나무와 그 나무를 타고 오른 넝쿨이었다. 고개를 아무리 젖혀도 나무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 p.54
그냥 그건 단지였다. 검은 유약을 발라 구워낸 거칠거칠한 단지. 어렸을 때 집에 한두 개씩은 있었고, 지금도 재래시장에 가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흔한 단지. 하지만 그 단지를 꽁꽁 싸맨 새끼줄이 풀린 순간, 하린과 주연은 아득한 어둠을 본 것 같았다. 마치 그 작은 단지가 우주를 담고 있어, 그 안에서 무한한 어둠이 쏟아져 나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 p.112
표선에서는 보일 리 없는 서귀포 앞바다가, 한라산과 마주할 만큼 높이 솟구쳐 하늘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용궁의 따님아기가, 하늘에 닿을 듯 뻗어 올라간 파도 너머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승과 저승을 뒤섞어, 이번에야말로 품어 안기 위해서.
--- p.138
“저기가 제주도 사람들이 한라산이나 영주산이라고 부르는 곳이오. 저 왼쪽으로 구름이 잔뜩 끼고 눈이 오는 게 보이시오?”
그쪽을 바라본 박시혁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유양이 그 옆을 가리켰다.
“산의 오른쪽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소. 그러니까 산을 가운데 두고 한쪽은 눈이 쏟아지고, 다른 한쪽은 화창하다 이 말이오.”
“괴이하군요.”
“그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이오. 방금 전까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다가도 갑자기 화창해지는 걸 보면 귀신의 장난이라고 생각될 거요. 거기다 섬이라서 그런지 괴담도 많고, 기이한 일도 벌어지고 말이오.”
--- p.158
박시혁은 이곳이 한양에서 수천 리 떨어지고 바다로 가로막힌 제주도라는 사실과 자신이 유배 온 죄인이라는 신분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집을 찾을 수조차 없는 어처구니없는 신세였다. 한숨을 쉰 박시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평상시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천한 여인의 말장난에 휘둘리는 상황에 가슴 속이 부글거렸지만 참아야 했다. 박시혁이 바라보자 은화는 까르르 웃으며 앞장섰다. 몇 걸음 걷던 박시혁은 고개를 돌려서 수산진을 바라봤다. 성벽에서 계속 바람 소리와 찌그러진 목소리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 수산진 성벽은 꼭 죽음을 가두는 비석처럼 보였다. 벽을 따라 뻗은 오래된 칡넝쿨은 마치 죽음을 옭아맨 그물 같았다. 온갖 불길한 상상에 식은땀을 흘린 박시혁은 멀어져가는 은화를 부리나케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 pp.175-176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이었다. 무슨 신을 모시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내부의 작은 제단이 정갈하고 단아한 풍경을 만들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바깥의 비바람과 뜨거운 햇빛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깔끔했다. 누군가가 매일 닦고 쓴 것처럼 한없이 아늑하고 따사로워 보였다.
“계세요?”
나는 더러운 몸을 신중하게 털어내고 조심스레 문턱을 넘어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제단 위에는 투명하고 깨끗한 정안수와 함께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릇 안에서는 작고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누군가 방금 지은 밥을 제사상에 올려놓은 것처럼 따끈한 흰 쌀밥 한 공기가.
--- p.209
안타까운 사연을 들으며 주제넘게도 충고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내가 항상 들어온 말 때문이었다.
“복순 씨.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이 살아온 삶을 다 말할 필요는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몸 파는 일을 제 발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동정받을 수 없어요. 주위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험하게 대했다는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솔직하게 말할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더욱 불편해할 거예요. 이야기를 듣는 사람까지 당신의 불행을 완성시킨 가해자로 몰린 기분이 들 테니까요. 그러니 앞으론 이렇게 말하세요. 그동안 고생하면서 살았지만 앞으로는 착실히 아이 키우면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겠다고….”
--- p.222
나는 교수와 함께 동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 운명을 직감했다. 탐사대가 건넨 탐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교수가 잘 챙기라던 가방을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상당히 두터운 탐사복은 일종의 방호복 같았는데 스태프들에게 왜 이런 걸 입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안쪽에 유해물질이 섞인 가스가 검출돼서 중독을 막기 위해 지급되는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탐사복뿐만 아니라 유리로 된 헬멧까지 쓰니 동굴 탐사대가 아닌 외계의 우주인 같은 모습이었다.
탐사대 스태프들은 동굴 안에 들어가기 위해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몸에 카메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장치를 부착했다. 이런 장비들을 처음 써본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답사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애써 긴장을 감추고 안 교수와 다른 탐사대원들과 함께 랜턴 빛에 의지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 들어가니 처음 느꼈던 것처럼 내부 역시 만장굴과 비슷했다. 전형적인 용암동굴의 형태였는데 놀라운 점은 세계적으로 규모가 크다 알려진 만장굴보다 훨씬 천장이 높고 폭이 넓다는 것이다. 만장굴 역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보다 더 규모가 큰 이런 동굴이 아직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 p.254
나는 피처럼 붉은 수액이 흐르는 나무뿌리를 보며 미지의 존재와 마주했을 때 느끼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뱀의 숨소리 같은 바람 소리와 기묘한 냄새에 악마의 몸속에 들어온 듯한 혈관처럼 이리저리 뻗은 불길한 광경은 내 몸을 굳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 내 심정을 교수가 알아챈 듯 나를 향해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그에 대한 복종심이 미지의 풍경에 대한 공포심보다 컸기에 나는 배낭을 짊어지고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 p.258
사과를 하니까 화도 낼 수 없어진 세미는 기분이 상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동네 사람들이 다들 몰려나와 세미를 찾으러 동네를 뒤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편의점 잠깐 다녀온 것 갖고 왜들 호들갑이야? 현지 언니가 나 잡아먹는 줄 알았어.”
“많이 놀랐구나. 우리 마을은 다른 곳이랑 많이 다르다고 했었잖아. 밤이 되면 그림자 없는 개가 나타나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인어한테 홀려서 물에 빠져 죽기도 해. 혼자 다니기엔 위험한 곳이다 보니 다들 걱정돼서 그런 거야. 다음부턴 어딜 가든 현지 누나한테 꼭 이야기하고 가는 게 좋겠어. 그래야 다신 이런 난리가 안 나지.”
--- p.310
“이건 뭐야?”
세미가 세면대 위에 놓인 것을 자세히 보며 물었다. 팥알만큼 아주 작은 잿빛의 둥그런 금속이었다. 오래 입에 물고 있었는지 여기저기 닳았다. 지수는 입안의 치약 거품을 세면대에 뱉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납이요.”
“납? 그걸 왜 입에 넣고 다녀?”
지수는 그런 걸 왜 묻냐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파야 하니까요.”
--- p.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