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순환농업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환농업은 적절한 축산과 경종(경작을 통해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을 복합해서 농장, 마을, 지역 단위에서 영양물질의 공급과 유출을 줄여 생산비를 낮추는 농업이다. 순환농업도 유기농업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인데, 이 경우 단순히 ‘유기물질을 주로 쓰는 농업’으로 유기농업을 정의한다면 그 틀 밖에 순환농업이 존재하게 된다. 유기농업의 정의를 보다 확대할 필요가 생긴다. 유기란 단어를 일상에서는 ‘유기적(有機的)’이라는 말로 많이 쓴다. 어느 회사의 영업부서가 유기적이라고 이야기했다면 이것은 칭찬이다. 그 부서가 일을 잘한다는 뜻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는 뜻이다. 다섯 명이 일하지만 서로가 자신의 역할을 잘 맡아서 처리할 뿐만 아니라 상호 소통과 협력이 잘 돼서 마치 일곱, 여덟 명이 일하는 효과를 낼 때 쓰는 말이다. 이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체에서는 1+1=2가 아니라 1+1=2+알파가 된다. 개구리를 해부했다가 각 장기를 붙인다고 다시 개구리가 되지 않는다. 생명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알파가 있다. 그것이 생명체의 신비이기도 하다.--- 「1부 농업살림 ‘유기농업은 관계만들기다」
일반농산물에 비해 유기농산물이 더 좋거나 더 안전한 농산물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의 일반농산물과 외국의 유기농산물을 비교하면 어떤 농산물이 더 좋은 것일까? 선택하기 애매해진다. 사실 거리가 짧아지면 식량의 안전성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학교 급식으로 돼지고기볶음과 상추가 메뉴로 나왔다고 가정하자. 가장 안전한 상추는 무엇일까? 학생들이 학교텃밭에서 생산한 상추가 첫 번째다. 두 번째는 학부모가 키운 상추, 세 번째는 졸업생이 키운 상추가 될 것이다. 로컬푸드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식품의 안전성을 높인다. 경제적인 형편이 허락한다면 유기농업에 관한 규정이 까다롭고 확실한 호주산 혹은 유럽산의 유기농산물을 먹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 수입하는 농산물의 경우 먼 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에 석유가격의 상승에 따라 계속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아직 완전한 유기농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 있는 농민이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농민으로부터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안전한 식량을 확보하는 소비자가 몇 배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1부 농업살림 ‘일본에서는 길에 역을 만든다」
농장은 크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규모의 경제가 모든 시스템에 무조건 적용되지는 않는다. 규모의 경제가 잘 실현되지 않는 분야가 농업분야다. 농업은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규모가 늘어난다고 같은 품질의 농산물이 쉽게 생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남 보성에서 유기농으로 쌀을 생산하던 한 농부는 아침에 일어나 논에 나가면 벼들이 사랑스러워 논둑을 걸어 다니면서 박수를 치며 인사를 했다. ‘애들아 잘 잤니!’ 그런데 수확할 때 보니 논둑 근처의 벼들이 더 잘 자란 것을 확인하고는 그 다음 해부터는 논에 들어가 지그재그로 돌아다니며 같은 인사를 하는 미친 농부가 되었다. 태풍이 오면 빗발을 무릅쓰고 논에 나가 꽹과리를 치며 ‘애들아 힘내!’라고 외칠 정도로 단단히 미친 농부였다. 하지만 그가 생산한 쌀은 매년 쌀 품평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농사는 생명을 키우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농사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니 만큼 자신의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수준에서 규모를 결정해야 한다.--- 「2부 농장살림 ‘농장은 진화한다」
농촌의 집이 넓어야 할 이유는 없다. 건축비도 많이 들지만 유지관리비, 특히 겨울의 난방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귀농, 귀촌하는 분들에게 농장 설계를 해보라고 하면 주택의 면적을 상당히 넓게 잡는다. 첫 번째 이유는 주택면적을 도시의 아파트 평형에 맞추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평형은 주택의 실제 면적이 표현된 것이 아니고 복도, 계단, 주차장 등 단지에서 공동 소유한 토지의 면적까지 포함된 개념이다. 그래서 아파트 평형을 기준으로 면적을 산정하면 매우 큰 집이 지어진다. 두 번째는 도시에서 빡빡하게 살았으니 좀 넓게 살아보자는 생각이다. 농촌에서 실내 공간은 그다지 효용이 높지 않다. 신선한 공기와 피톤치트, 꽃내음을 맡을 수 있는 시골에 와서 실내에 틀어박혀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공간이 유용하다. 지붕은 있지만 외부와 완전하게 막혀 있지 않은 공간, 한옥이라면 대청마루, 툇마루 등이고 서양식 주택이라면 베란다, 데크 공간에 해당한다. 아주 추운 지방이 아니라면 이러한 공간을 1년의 2/3 이상 동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넓은 집을 원한다면 실내공간은 작게, 이러한 공간은 넓게 계획하면 된다. 세 번째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자주 찾아올 것을 예상해서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매일 있는 것은 아닌 이상 특별할 때를 대비해서 집을 크게 지어 관리할 필요가 없다. 지인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도 귀농귀촌의 실패요인 중 하나다. 대접 아닌 대접을 해야 하고 그 때문에 절기에 맞추어 꼭 해야 할 일을 못 하게 될 수 있다. 집이 넓으면 공연히 불필요한 지인까지 불러들일 수 있다. 집을 계획할 때는 ‘작고 소박한 집에 우주가 담긴다’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2부 농장살림 ‘집은 우주를 담아야 한다」
이 마을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정부가 마을에 농촌관광을 활성화해보라고 보조금을 지원했다. 나는 그 보조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 컨설팅을 했다. 그래서 마을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렇게 번 돈은 마을에 남지 않고 인근 도시로 빠져나갔다. 내가 컨설팅한 것은 마을을 발전시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밑 빠진 독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이 마을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 농촌마을의 일반적인 상황이다. 얼마 뒤에 녹차를 생산하는 마을의 컨설팅을 하게 되었다. 녹차 다원을 하는 농가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질문을 했다. “술은 어디서 사먹나요” 그 마을과 가까운 읍내가 아니었다. 대답은 인근 도시. 그 도시에 큰 공단이 있어 좋은 술집이 많단다. “먹는 농산물은 어디서 구입하나요” 역시 그 마을에 가까운 시장이 아니고 인근 도시의 대형마트였다. “혹시 어디서 사시나요” 녹차 농가의 40%가 인근 도시의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면서 녹차를 만들고 있었다. 녹차체험마을을 만들기 위해 지원하는 이 사업으로 농가가 번 돈은 마을에 남지 않고 인근 도시로 빠져나가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면 인근 도시로 갔던 돈이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올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작은 도시의 돈은 큰 도시로, 큰 도시의 돈은 더 큰 도시로 흘러간다. 결국 그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다만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마을에서 번 돈은 마을에 남지 않는다는 것. 농촌에서 번 돈은 농촌에서 다시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 돈은 돌고 돌아서 ‘돈’이다. 지금 농촌에서는 돈이 돌고 있지 않다. 이게 문제였다. 이 같은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10년 뒤의 농촌 모습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소득이 높은 농민들은 인근 도시의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면서 농사를 짓고, 돈 있는 도시민들은 농촌에 전원주택과 별장을 짓고 산다. 그러면 지금의 농촌마을들은 독거노인이 사는 빈민촌이 될 것이다. 무엇을 위해 마을만들기를 했던 것인가. 누구를 위해 마을만들기를 했던 것인가.--- 「3부 농촌살림 ‘마을은 없다」
어떻게 마을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예전의 마을 공간에서 다시 마을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마을의 외적 조건들이 변했다. 도시마을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 사는 곳으로, 농촌마을은 살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어서 무슨 일을 시작하기 어려운 곳으로 변했다. 도시든 농촌이든 비슷한 생각과 같은 필요를 가진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는 마을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야 한다. 어떻든 공간은 주민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매개물이지 않은가. 즉 무슨 무슨 리, 무슨 무슨 동이라는 마을의 경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 경계에 집착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고, 그 일을 찾기도 어렵다.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 마을이기주의가 작동해서 무슨 일이든 마을 안에서 해야 하고 다른 마을과 경쟁하려고 든다. 그 경계에 집착하면 공동체 파시즘이 고개를 쳐든다. 마을주민들이 똘똘 뭉쳐야 하고 누군가 지도자의 완장을 차면 그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외부사람을 들이면 안 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배신자다. 그러나 이제는 마을의 경계를 넘어 공간적 범위를 외연적으로 넓히면서 사람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그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소득, 교육, 문화, 복지 등 다양한 사업분야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 커뮤니티비즈니스 등의 다양한 사업형태로, 크고 작은 규모의 활동과 사업이 만들어져 지역사회에 이중 삼중의 중층적 사회적 관계를 그물망처럼 만들어야 한다.--- 「3부 농촌살림 ‘마치(町)는 마을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방식의 지역개발로 한계에 봉착한 농촌지역은 대안적 발전방식을 모색하는 가운데 사회적경제를 만나게 되었다. 사회적경제를 통해 선순환적 인구증가와 순환적 지역경제가 이뤄진다면 농촌에도 새로운 희망이 피어날 것이다.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농사를 지어서 혹은 농촌에서 할 수 있는 일로 큰돈을 벌어보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개가 도시의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농촌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고 한다. 물론 도시보다 넓은 토지와 주택은 여유로운 공간을 허락해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생활의 여유는 도시와 달라지지 않는다. 돈을 벌어 내가 필요한 것을 시장에서 구했던 삶을 지속하는 한 정신적 여유를 만들 수 없다. 귀농귀촌할 요량이면 사회적경제에 내 삶을 접속시켜보자. 이제까지 나를 위해, 나의 가족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살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자. 나를 살려보자. 도시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서 이웃을 살리고 지역사회를 바꾸는 일에 도전해보자. 그러면 회색빛 도시에서, 빈틈이 없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느낄 수 없었던 것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보람과 만족, 이웃 간의 교류와 유대감, 공동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락함, 그리고 지역에 사는 즐거움과 행복한 미소를 말이다.
--- 「3부 농촌살림 ‘사회적으로 농사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