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유전 정보를 DNA에 담고 있다. 즉 DNA는 유전 정보를 담은 일종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는 DNA를 바탕으로 유전자를 발현시킨다. 유전자를 발현시킨다는 말은 단백질을 만든다는 의미다. 단백질이 실제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일꾼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기본 단위인 세포는 생존하기 위해 주변 세포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에너지를 만드는 등 이런저런 할 일이 많다. 이런 일에 필요한 일꾼이 단백질이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면 생명 현상을 유지하기 힘들다. 단백질은 DNA에서 바로 만들어지지 않고 중간 단계인 RNA를 거친다. 다시 말해 생명체는 DNA에서 시작해 RNA를 거쳐 단백질을 만든다는 것이 중심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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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안내 RNA가 목표로 하는 유전자와 결합한다. DNA와 DNA, DNA와 RNA는 서로 상보적으로 결합하기 때문에 목표 유전자의 염기 서열을 알면 이 유전자에 결합하는 안내 RNA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가위 역할을 하는 Cas9 단백질이 목표 유전자를 자른다. 이렇게 DNA가 절단되면, 세포 내에서 DNA 복구 기전이 작동한다. DNA 복구란 잘린 DNA를 다시 붙이는 것인데, 잘린 상태를 그대로 붙이면 아무런 치료 효과가 없다.
바로 여기서 DNA 복구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 DNA 복구 기전이 작용할 때 생체 시스템은 주변에 남아도는 염기 몇 개를 잘린 부위에 붙여 돌출된 형태로 만든다. 반듯하게 잘려 밋밋한 것보다는 돌출 형태여야 더 잘 붙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개의 염기를 추가로 붙였기 때문에 유전자의 염기 서열이 잘리기 전과는 달라진다. 염기 서열이 변하면 이 유전자는 원래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즉 목표로 했던 유전자의 기능을 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을 일으키는 원인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그 기능을 없앨 때 유용하다. 이런 유전자 교정법을 NHEJ라고 한다.
--- p.33~34
암세포를 정상 세포로 바꾸는 것처럼 세포의 특성이나 운명을 바꾸는 것을 리프로그래밍이라고 한다. 이미 프로그래밍된 세포의 특성을 재설정한다는 의미다. 2012년, 일본 교토대학의 야마나카 신야 교수가 유도 만능 줄기세포의 원리를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유도 만능 줄기세포는 피부 세포와 같은 성인의 체세포를 배아줄기세포와 유사한 상태로 되돌려 만든 줄기세포를 일컫는다. 배아줄기세포처럼 인체의 모든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데, 피부 세포와 같은 일반 세포를 줄기세포로 유도한 것이다. 세포는 줄기세포에서 일반 세포로 분화하기 때문에 야마나카가 수립한 유도 만능 줄기세포 기술을 다른 말로 역분화 기술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인 세포의 분화와는 달리 거꾸로 분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반 세포를 줄기세포 상태와 같은 유도 만능 줄기세포로 되돌리는 것이 대표적인 리프로그래밍으로, 일반 세포의 특성과 운명을 재설정해서 전혀 성격이 다른 줄기세포 상태로 바꿀 수 있다.
--- p.49~50
유전자 분석 업체의 경우 포화 상태에 이른 유전자 분석 분야를 넘어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할 수 있으므로 신항원 암 백신은 매력적인 분야일 것이다. 더구나 신항원 암 백신을 개발한다고 하면 기존의 유전자 분석 회사에서 신약 개발 회사로 탈바꿈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유전자 분석 업체들이 신항원 암 백신 개발에 너나없이 나서고 있다. 대부분은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신항원 백신을 개발하려는 순수한 의도겠지만, 시류에 편승해 이미지를 포장하거나 주가를 띄우려는 기업도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는 시간이 밝혀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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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R 기술은 기본적으로 DNA를 증폭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바이오 실험에 활용된다. DNA를 다루는 실험은 PCR로 증폭하지 않으면 실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PCR은 기초 연구에서나 실제 생활에서나 광범위하게 쓰인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PCR 검사를 받았을 것이다. 이때 멀리스가 개발한 PCR 검사를 이용한다. 코로나19 PCR 검사에서 증폭하려는 것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DNA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로, DNA 대신 RNA를 이용하는 바이러스다. 코로나19를 비롯해 독감 바이러스, 에이즈 바이러스 등 인간을 괴롭히는 바이러스는 대부분 RNA 바이러스다. 그런데 PCR 기술은 DNA를 증폭하는 기술이지, RNA를 증폭하는 기술은 아니다. 따라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RNA를 DNA로 바꿔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 p.68
DNA 메틸화를 암 진단의 생체지표로 활용하면 극소량의 DNA만 있어도 검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PCR로 표적 생체지표 부위의 DNA만 증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암이든 생체지표가 좋을수록 정확도가 높고 조기 진단이 가능하다. 따라서 목표로 하는 암에서만 선택적으로 존재하는 생체지표가 있는지, 암 발병 초기부터 존재하는 DNA 생체지표를 보유하고 있는지가 그 기업의 경쟁력을 측정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 p.73
미국 바이오 기업 모더나는 mode+rna 내지는 modern+rna의 합성어로 추정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회사는 RNA 연구에 천착한다. 회사는 창립 후 20년간 RNA를 이용하여 백신 연구를 해왔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2019년 말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됐고, 이듬해인 2020년 5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서 초고속 작전을 승인하며 자국의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미국 FDA는 화이자-바이오엔테크의 코로나19 백신과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을 연이어 승인했다. 이는 백신을 개발한 지 8개월여 만에 이룬 성과로, 전 세계 백신 개발 역사상 가장 단기간이었다. 그 이전에 가장 빠른 것은 에볼라 백신으로, 이마저도 5년이 걸렸다.
--- p.95
바이오 의약품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혁신 치료제가 바로 세포 치료제와 유전자 치료제다. 앞서 유전자 치료제는 특별한 유전 질환을 치료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세포 치료제는 세포 자체를 치료제로 활용하는 의약품이다. 우리 몸에는 무수히 많은 세포가 있는데, 그중에서 면역세포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나 정상 세포에서 비정상 세포로 변한 암세포를 공격한다. 세포 치료제의 큰 축 가운데 하나인 면역세포 치료제는 면역세포를 이용한다. 면역세포 가운데 대표적인 저격수 역할을 하는 세포가 살상 T-세포로, 과학자들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T-세포의 살상 능력을 높여 암세포를 죽이는 것이다.
--- p.143
줄기세포는 손상된 세포를 대신할 정상 세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치료 도구다. 줄기세포 자체를 치료 물질로 이용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환자의 몸에서 줄기세포를 채취해 치료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양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몸속 줄기세포를 몸 밖으로 꺼내면 원래 있던 체내 환경과의 차이로 인해 줄기세포의 분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세포는 주변 세포를 포함해 자신을 둘러싼 미세 환경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체내와 비슷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세포 치료제 개발에 있어서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 p.154
현재 질병 치료는 저분자 합성물에서 세포를 이용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저분자 합성물과 항체 등 바이오 의약품이 미시적인 치료 접근이라면, 세포나 조직, 장기 등을 활용한 방법은 거시적인 치료 접근이다. 미시적인 접근이 바탕이 돼야 거시적인 접근도 가능하겠지만, 인류가 미시적인 접근으로 생명 현상의 원리를 모두 파헤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생명 현상의 원리는 모르더라도, 문제가 되는 세포나 조직, 장기를 통째로 새것으로 바꿔준다면 바꿔준 세포나 조직, 장기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세포 치료제가 등장한 것은 미시적인 치료 접근에서 거시적인 치료 접근으로의 변혁이다. 변혁의 속도는 더딜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질병 치료의 패러다임도 거시적인 치료로 바뀔 것이다.
--- p.183
그렇다면 어떻게 의사 과학자를 육성할 수 있을까? 여러 해법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빠른 길은 의사 과학자가 창업한 바이오 기업이 대박을 치는 것이다. 어떤 의대생이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과학자의 길을 걸으며 회사를 창업했는데, 이 회사가 승승장구해 창업 10년 만에 신약을 개발하고 코스닥에도 상장한다면, 창업자인 의사 과학자는 엄청난 부를 거머쥘 것이다.
--- p.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