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남 씨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쭉 살았으며 부산에서 살아갈 소설가이다. 아무리 딴짓하고 방랑한다 해도 결국 부산에 대한 창작이 기본 베이스인 운명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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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다! 타지 사람은 그렇다 치고 부산사람에게 부산을 물어보면 뭐 그렇게 잘 아는 게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관심이 별로 없다. 얼마나 살기 바쁘면 내 주위도 잘 돌아보지 않는다. 맨날 댕기는 버스 노선, 지하철 노선만 좔좔 외울 뿐 바로 옆 동네는커녕 자기 사는 동네에 뭐가 있고,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외부 관광객이 어디가 좋냐 물어오면 해운대, 광안리, 자갈치, 남포동, 서면까지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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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길남 씨는 글을 쓰다 말고 머리를 긁적거린다. 윗줄에 써 놓은 것처럼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팩트 확인만 한다면 그냥 마, 인터넷 정보나 대충 보고 말지, 무슨 재미가 있냐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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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길남 씨는 그때로부터 약 40년이 지났음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떤다. 아, 옛날이여…. 어머나, 이 노래도 약 40년이 지났을걸? 하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 발밑으로 펼쳐졌던 바다와 부두의 풍경은 아직도 그대로인 듯하다. 바다와 부두를 낀 부산만의 정취일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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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의 증 자는 바로 시루 증(甑)이다. 부산(釜山)의 부자가 가마 부(釜)임을 생각할 때 두 글자는 큰 유사성이 있다. 시루떡 찌는 시루도 가마솥 모양이지 않은가? 결국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은 모양이라는 말인데, 현재 부산 이름의 유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p.45
“선배, 다른 자료를 보니 ‘초량’ 할 때 ‘량’ 자가 선배 원고에 쓴 ‘기장 량(粱)’이 아니라 ‘들보 량(梁)’이라 붙어 있는데요? 이거 찾아보면 볼수록 이상한데?”
--- p.54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거대한 교각을 들어 올린다는 영도다리가 있는 부산! 부산으로 몰려든 수많은 이의 머릿속에 영도다리는 헤어진 이와의 만남도 있겠지만, 아마도 새로운 희망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아니었을까?
--- p.80
우리가 가치 있는 미래를 꿈꾸고 쌓아가듯, 과거의 사람들도 치열하게 무언가를 쌓아갔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쌓아 올린 바른 가치와 의미들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홀대하고 살피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의 가치 또한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역사가 없다면 우리도 없는 것이다.
--- p.112
당시 부산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3월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가 3월 초부터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뭐?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
이런 초보적 질문은 오늘 이후 제발 던지지 마시라.
--- p.126
일제 잔재를 없앤다며 모조리 파괴했던 근대식 건물들, 복천동 고분 주변의 고층아파트 난개발, 해변에 무작정 들어서는 고층빌딩, 새 구청을 짓겠다고 막무가내로 파헤쳤던 동래읍성 유물들, 유네스코에도 등재할 수 있는 1부두 부지에 펼쳐졌던 고층빌딩 공사 계획 등등 상상을 초월하는 무지와 만행이 판쳤던 곳이 이곳 부산의 개발과 행정 아니었던가?
--- p.136
진압봉을 피해 정신없이 달려갔던 곳은 국제시장 대로였다. 우루루 쏟아지는 학생들의 비명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닫힌 줄만 알았던 가게들의 문이 일제히 드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였다.
“일로 들어온나! 일로 피해라!”
국제시장 아주머니들의 절절한 고함이 아직도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 p.160
소설가 길남 씨는 며칠 전 이곳을 찾을 때 느낀 우울이 어느새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언제 와도 반겨주며 사람을 품는 곳…
칠암항의 푸근한 포용에 그 또한 마음을 녹이고 돌아간다.
“여기는 언제 와도 어머니 아버지 집에 찾아오듯 오면 돼요.”
--- p.200
소막마을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내로 나서려면 동구나 자갈치로 가는 나룻배를 이용하거나 문현동 쪽으로 넘어가는 장고개를 통해 진시장이나 자유시장 쪽으로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사소한 물품을 살 때는 이곳 우암골목시장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규모 재개발과 인구의 감소로 시장은 거의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이다. 다만 이 시장에서 시작한 국내 최초의 밀면집 ‘내호냉면’이 아직 건재하게 자리 잡고 있다.
--- p.212
이때 팔금(八金)의 뜻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여덟 개의 보물이나 여덟 개의 금광으로 해석한 정체불명의 썰(?)들이 지금도 주위에서 나도는 편이다. 소설가가 동분서주하며 알아본 결과 부산(釜山)의 명칭 중 가마솥(釜)의 한자에서 위에 있는 팔(八)과 밑에 있는 금(金)을 나누어서 팔금(八金)이라 이름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 pp.236~237
“어르신들, 혹시 여기가 솔바람 음악당 자립니까?“
몇 분이 고개를 돌리는데 이 무슨 꿩 구워 먹는 소리냐는 표정이다. 당황한 소설가.
“그, 그럼 청마 유치환 시비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뭐? 청마 유치원?”
“뭐하노? 빨리 안 치고? 돈도 꼴았구만. 쯧!”
아무리 유구한 역사라도 보존하고 가꾸지 않으면 개똥 취급받기 마련이다.
--- p.258
“어디서 갯가 것이 양반 동네 와서 씰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갯가 것이!”
아아, 내륙지역의 그 자부심이란…. 아직 마상(마음의 상처)이치료되지 않은 듯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그 자부심은 실로 대단했던 모양이다.
--- p.268
소설가 길남 씨는 부산만의 길거리 음식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세 번이나 남포동 골목 먹탐방을 시도해보았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다. 그는 먹거리를 접하면서 한 가지 묘한 공통점을 느낀다. 이곳 부산 길거리 음식은 한 가지 재료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것. 자꾸 뭘 섞어!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