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에 속한 인간은 자연을 통제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며, 이런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진보’라고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진보나 성장 같은 덕목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의복도 자동차도 에어컨도 모두 자연을 통제하는 기능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진국에 만연한 불황은 상품경제의 자립적인 운동의 결과로서 인간의 생활이 생산 과잉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같은 양의 쓰레기를 생산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대량 생산, 대량 폐기 시대는 우리가 원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결국 파국을 맞을 것이다. --- p.32
편의점이 출현하면서 우리는 돈만 있으면 혼자서도 살 수 있는 편리함을 얻었다. 편의점은 24시간, 언제라도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과 교환할 수 있는 편리한 시장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돈뿐이며 학력도 친구의 도움도 가족의 협력도 지역 사람들과의 연대도 필요 없다. 계산대에 자기가 살 것을 올려놓기만 하면, 모니터에 금액이 표시되고 판매자와 말을 섞을 필요도 없이 돈을 내고 나서 물건을 들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 돈이 없다면, 편의점은 우리와 완전히 무관한 공간으로 우리에게 어떤 지원도 협력도 하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우리는 돈을 가져오는 무명의 소비자일 뿐이며, 돈 없는 사람은 매장 분위기만 해치는 방해꾼이다. 이럴 때나 우리는 편의점에 의존하던 삶에서 필요 없었던 것들, 즉 친구의 도움이나 가족의 협력, 지역 사람들과의 연대 등을 돌아볼 뿐이다. --- p.54-55
근대사회는 ‘국민국가’라는 구상과 ‘주식회사’라는 구상을 전제로 발전했다. 이 두 가지 체계를 근간으로 구축된 다양한 제도는 ‘모든 경제는 성장하고 문명은 도시화를 향해 발전한다’는 믿음을 공유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연금과 보험, 저축 제도, 신용카드 결제 체계, 주택담보대출 등도 ‘경제는 성장한다’는 신념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현재 1,000원은 1년 뒤에 1,100원이 된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고 제도가 설계된 것이다. 경제 성장은 근대 국민국가 성립 이후에 생긴 조건으로 누구도 경제가 성장을 멈추는 시대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주식회사는 원칙적으로는 현재 투입한 돈이 몇 년 뒤에 불어난다는 주주의 기대가 없으면 성립하기 어려운 체계다. 산업혁명 이후 국민국가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주식회사’라는 체계를 통해 실현됐다. 주식회사가 경제와 문명을 견인한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날 세계화가 전 세계적 이슈가 된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서구 선진국에서 국가 자체를 성립시켰던 ‘경제 성장’이라는 환경이 막을 내리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주식회사는 경제 성장이라는 배경이 필수조건이며 경제 성장이 끝난다는 것은 ‘자본과 경영의 분리’라는 주식회사 체계 자체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 p.115
문명의 발전은 어떤 가혹한 자연조건에서도 살아갈 조건을 갖추도록 도구와 기계를 만들어냈다. 가혹한 자연조건을 완화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연과 관계 맺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은 소진할 것이며, 오늘날 바로 그런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고양이 마을이 내게 전해준 교훈은 우리가 동물, 자연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뒷골목에서 바라보면 고양이 마을의 생태가 이치에 맞다. 고속도로에 가로막힌 콘크리트 도시에서 죽도록 경쟁하는 인간의 생태야말로 무리한 방식이 낳은 결과다. --- p.144
내가 공중목욕탕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곳이 주민 생활에서 공동의 장과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공중목욕탕을 제외하고 주민이 생활을 공유하던 장소라면 주부들이 채소를 씻거나 아이들이 놀다가 물을 마시기도 했던, 용수로에 설치된 공동 세면장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 공중목욕탕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통은 사용하고 나서 깨끗하게 헹군 다음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아둬야 했다. 욕조에 들어가면 거기 설치된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도 지켜야 할 예의였다. 불필요하게 물을 낭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욕조에 수건을 가지고 들어가 물에 담그지 않는 것도 이용자들에게는 상식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약속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공유물을 소중히 다루고, 오래 보존하려는 절약 정신이 담겨 있었던 같다. 이런 경제는 아파트 시대 이후 대량 생산, 대량 폐기 경제와 확연히 다르다.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은 경제 발전 이후에 정상 상태가 도래하리라고 예언했다. ‘정상 상태’란 생활필수품이 충족돼 더는 경제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이런 상태가 되면 이전에 욕구 충족과 생활의 편의에 사용하던 자원을 삶의 풍요와 정신적 충족을 위해 사용하는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에서 ‘정상 상태’라는 것이 실현된 적은 없었다.
---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