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사상자가 되기 싫은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난생처음 하는 전투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문득 내가 먼저 진두에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바로 지휘관의 ‘진두지휘’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관단총을 든 나는 이렇게 소리치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모두 나를 따르라!”
---「폴란드 전역, 소부대 지휘」중에서
선두에서 진격했던 부대원들이 영국군 몇 명을 생포해 즉시 내게 데려왔다. 직접 심문한 끝에 전방의 영국군 대대가 제1근위보병연대 예하 부대임을 알아냈다. 나와 그 연대의 연대장은 전쟁 발발 직전에 런던의 ‘말보로 클럽’(Malborough Club)에서 함께 식사를 했던 오랜 친구 사이였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Wie sinnlos ist das alles!)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프랑스 침공, 영국 육군을 상대로 한 전투 」중에서
J.B.모렐과 클레망 두호아는 거듭해서 영국이 단독으로, 또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은 무한대의 물자동원 능력을 보유한 영국과 미국을 절대로 상대할 수 없고 감당할 능력도 없다는 논리였다. 사실 연합군은 독일의 주요 산업도시와 교통의 요지를 목표로 집중 폭격을 가했고, 그 강도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이의를 제기했지만, 독일이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친우들과의 대화」중에서
'내 오른쪽 다리에 강력한 무언가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고, 곧 털썩 하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계속해서 피가 쏟아졌고 바지는 피로 흥건했다. 몇 초 가량 의식을 잃었다. 장갑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누군가 나를 들어 올려 수백 미터 후방에 위치한 군의관에게 옮겨갔다. 중상이었다. 이제 막 시작된 나의 북아프리카에서의 시간은 여기까지인가?
---「북아프리카 전역, 부상」중에서
그들도 우리도 17:00가 되면 모든 정찰 및 전투활동을 중단하고 다음 날 아침 동이 트면 활동을 재개했다. 나는 부하들에게 이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영국놈들과 17:00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휴전하자고 제의해도 되겠는걸?”
“정말 그래도 되겠는데요.”
---「북아프리카 전선, LRDG를 상대로 한 페어플레이」중에서
“이봐 루크! 우리는 휴전을 요구해야 하네. 그것도 지금 즉시 말이야. 아직 우리가 내놓을 것이 있기 때문이지. 가능하다면 서방 연합국들과 휴전해야 하네. 또한, 우리 스스로, 자진해서 해야 할 것들이 있지. 첫째로 히틀러가 반드시 하야해야 하고, 둘째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즉각 중단하고 기독교 교회의 자율권을 인정해야 해.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더이상의 출혈과 우리 본토의 도시들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네.”
---「롬멜이 생각한 종전」중에서
“이 친구야! 여기는 전쟁터가 아니라네. 롬멜 원수라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여기는 행정 관료들이 판을 치는 곳이야. 자네는 먼저 ‘아프리카 담당행정관’을 찾아가야 할 걸세. 아마 계급은 대령쯤 될 거야. 그가 요들 대장에게 데려다주겠지. 다시 요들이 카이텔 원수에게 접견을 승인받을 거고. 그러면 자네에게 언제, 어떻게 총통을 만나라고 알려 줄 걸세. 그러나 12:30부터 14:00까지는 중식 시간이라네.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시간이지. 따라오게. 내가 ‘첫 번째 실무자’를 만나게 해 주겠네.”
---「관료주의로 가득한 국방군 사령부」중에서
6월 초, 나는 프로이센 왕족의 한 부인으로부터 파티 초대를 받았다. 전쟁 이전에 친구였던 폰 파펜의 소개로 알게 된 부인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원두커피 선물 덕인지 다른 손님들보다 훨씬 더 나를 환대해 주었다. 거기서 나는 다그마(Dagmar)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유럽 최대의 농원 소유주의 딸이었다. 그날의 모임은 그녀의 스물한 번째 생일 파티였다.
---「전쟁 도중에 만난 약혼녀」중에서
“소령님! 적 공수부대들이 낙하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에 글라이더도 착륙하고 있습니다. 일단 제2대대에 상황을 전파하고 소령님께 즉시 이동하겠습니다.”
나는 즉각 명령을 하달했다.
“전 부대에 비상을 걸고 사단에 보고하라. 제2대대를 그 지역에 즉시 투입해라. 가능한 한 적군을 생포해서 내게 데려와라.”
---「노르망디 상륙작전」중에서
치열한 전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놀랍고도 반가운 일도 있었다. 정찰을 마친 한 전투정찰팀이 DKW 오토바이를 타고 복귀했다. 그때 나는 그 카키색의 오토바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진흙받이에 과거 내가 지휘했던 제3기갑수색대대 마크가 붙어있었다. 이 오토바이는 마치 소소한 ‘사파리’ 여행을 하고 돌아온 친구 같았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빼앗겨 영국으로 넘어갔다 다시 노르망디로 돌아온 것이다. 흠집 하나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너무나 반가웠다.
---「북아프리카 전선 시절의 오토바이와 재회한 저자」중에서
아직도 두 마을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집집마다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지하실에 숨어있는 상태였다. 전기도 끊기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고 물도 없었다. 상수도마저 얼어버렸다. 우리는 가능하면 주민들을 돕고 싶었고, 도우려 했다. 낮에는 밖으로 나가면 곧바로 사살당하거나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곤 했다. 그래서 보급품 수송도 야간에, 그것도 장갑차를 이용해야 했다. 적군이 조명탄으로 주위를 밝히면 적의 관측을 피할 수 있는 저지대를 이용해서 물자를 받았다. 이틀째가 되자 연대 군의관이 씩씩거리며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최악의 혈투, 아떵 리터스호펜 전투」중에서
더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나는 부하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달했다. “무기를 호수에 던져라!”
수많은 소련군 병사들이 총구를 겨누며 우리를 둘러쌌다.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천천히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1945년 4월 27일 아침, 그곳에서 마침내 나의 전투가 끝을 맺었다.
---「할베 포위전, 포로로 잡히다.」중에서
우리 뒤로,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십여 개의 소련산 털모자가 걸려 있었다. 어제나 그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도 큰 함성을 지르며 모자를 벗어 나무를 향해 던졌다. 그토록 그리던 자유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자유였다!
---「5년만의 해방」중에서
나는 두 개의 체제 속에서 세월을 보낸 포로였다. 프로이센 시대에는 당시의 전통에 따라 교육을 받았고, 나치 체제에서는 충성 맹세를 통해 지도부에 순응했다. 그랬기에 히틀러는 나와 같은 장교들과 장군단을 더 쉽게 기만하고 악용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나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5년간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독일의 직업 군인으로 나는 장군들, 장교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 나는 세상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추악한 권력자에 의해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저자의 회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