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바드는 매우 가파른 계곡으로 접어들었는데, 깊은 계곡 바닥은 다이아몬드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근처 동굴에서 거대한 뱀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저녁에 동굴에서 나온 뱀들이 신드바드를 거의 삼키기 직전, 그의 옆에 큰 고깃덩어리가 떨어졌는데, 거대한 독수리가 내려와 그 고깃덩어리를 집어 들고 날아올랐다. 신드바드는 기회를 엿보다가 주머니 가득히 다이아몬드를 챙긴 다음 고깃덩어리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마침내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그 고깃덩어리를 채서 날아올랐고, 신드바드는 계곡을 벗어날 수 있었다. 주머니 가득 가져온 다이아몬드 덕분에 신드바드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 문제는 이 이야기가 1500년 전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책에도 나온다는 사실이다.(112-3쪽) 인도양의 상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이유는 자신이 가져온 상품이 어디서 난 것인지를 숨기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 결국 『아라비안나이트』가 되었다.
---신드바드와 다이아몬드와 상인들이 거짓말을 한 이유, 185쪽
기원전 273년, 마우리아 제국의 왕 빈두사라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 왕세자는 부왕의 서거 소식을 듣고 급히 수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그의 이복형제 아소카가 그리스 용병을 동원해서 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왕세자는 성 밖의 해자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 이 사건 이후로 4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이어졌다. 불교 경전은 아소카가 이복 형제 99명을 죽이고 동복형제 티사 한 명만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왕실 관료 수백 명도 목숨을 잃었는데, 아소카가 손수 목을 벤 사람만 500명이었다고 한다. 권력을 확실히 잡은 뒤, 아소카는 기원전 270년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한 자이나교도는 붓다가 자이나교의 스승(티르탕카라)에게 절하는 모습을 그리다가 발각되었다. 불교를 신봉하던 아소카는 그와 그의 가족들을 집에 가두고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는 자이나교도의 머리를 가져오면 머리 하나당 금화 한 닢을 상으로 준다는 칙령을 내렸다. 대학살은 누군가가 실수로 불교 승려 비타소카를 자이나교도로 오인하여 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비타소카는 바로 아소카의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자 티사였다. 오늘날에도 극단주의자들이 자신의 종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만화가를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옛날 아소카가 자행한 살인과 너무나 유사해서 소름이 돋는다.
---그렇게 위대하지 않았던 아소카 대왕, 119쪽
인도양 연안 곳곳에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전해오고 있다.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북서부를 중심으로 몰려 있으며, 그 전통의 뿌리가 워낙 깊어서 신석기 시대까지 닿아 있다. 유전자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대부분 순다 랜드로부터 퍼져 나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순다 랜드는 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오늘날 타이만의 지역명이다.(66쪽) 모계사회의 전통은 워낙 강해서 이슬람이 점령한 지역에서도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지 못했다. 모계사회 시스템은 단지 특이한 문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도양 연안의 정치사에도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왕조의 정통성을 따질 때 모계를 근거로 내세우는 곳이 많았다. 또한 현대에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여성 총리가 출현한 사례가 많고, 복싱 세계 챔피언을 다섯 차례나 거머쥔 메리 콤도 인도 북서부 마니푸르 출신이다.
---순다 랜드와 모계 사회의 전통, 103쪽
몰디브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유명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불만에 가득 차 이런 글을 남겼다. “여자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반쪽도 가리지 않는다. 대다수는 앞치마 하나만 걸치는데, 배꼽에서 바닥까지 드리울 뿐이다. 나머지 몸 전체는 그대로 노출한다. 이렇게 입고서 시장이든 어디든 돌아다닌다. 내가 그곳에서 법관으로 있을 때 이런 관습을 뿌리뽑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옷을 입으라고 명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절망한 이븐 바투타는 임신한 아내를 남겨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벗은 여자 때문에 절망한 이븐 바투타, 229쪽
인도 상선이 동남아 지역에 왔다가, 나가족 족장의 딸 소마가 이끄는 해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해적의 공격에 맞서 싸운 인도 상인들의 지도자는 잘 생기고 젊은 브라만 청년 카운디니아였다. 전투 와중에 배가 일부 파손되자 인도 상인들은 하는 수 없이 배를 인근 육지에 정박하고 수리를 해야 했다. 당연히 그들은 육지에서 또다시 공격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육지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우호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소마 공주 때문이었다. 용감한 카운디니아에게 관심을 갖게 된 소마 공주는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소마가 카운디니아에게 청혼했고, 카운디니아는 받아들였다. 이들의 결혼으로 부남 왕국이 탄생했다고 한다. 부남 왕실은 이후 수 세대를 이어가며 유지되었다. 이 전설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약간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베트남의 참족 비문과 캄보디아의 크메르족 비문에도 남아있다. 참족과 크메르족의 왕실은 모두 스스로를 소마와 카운디니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도 이 같은 내용이 남아있다.
---해적 공주 소마 이야기, 135쪽
라마굽타는 적들의 계략에 빠져 포위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화친을 청했고, 사카족은 라마굽타의 왕비 드루바-데비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는 가문의 수치였기에, 라마굽타의 동생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형수 드루바-데비로 분장하고 사카족 진영으로 들어간 뒤, 마침내 침실에서 사카족의 왕을 죽이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침략자들은 대혼란에 빠진 채 서둘러 철수했다. 이 일로 인기를 얻은 찬드라굽타는 대중적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이를 시기한 라마굽타는 동생을 암살하려 했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마침내 찬드라굽타는 형을 죽였다. 그러고 나서 스스로 형을 대신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드루바-데비와 결혼했다.
---여자로 변장해 적장을 죽인 왕자, 165쪽
이번에는 인도로 갈 함대의 규모를 왕창 늘렸다. 대포로 무장한 13 척의 함선에 선원 1200명이 탑승했다. 카브랄의 함대는 캘리컷의 왕 사무드린에게, 아랍 상인들을 모두 내쫓고 포르투갈과 독점 거래를 하자고 요구했다. 인도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의 거래는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시간을 끄는 가운데 아랍 상선이 화물을 싣고 항구로 들어왔고, 순례자들을 실은 배는 아덴만을 향해 출발하려 했다. 카브랄은 이 모든 배를 포로로 잡았다. 아랍 사람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시내에 있는 포르투갈 파견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카브랄은 배 10척을 더 포로로 잡은 뒤 항구에 세워놓고 불을 질러 선원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였으며, 이 끔찍한 광경을 캘리컷 사람들은 해안에 서서 모두 지켜보았다. 배를 모두 불태운 뒤 카브랄은 이틀 동안 도시를 향해 포격을 가했고, 사무드린은 궁을 빠져나와 도망쳐야 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인이 인도양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다녀간 뒤...,249쪽
포르투갈 요새에서 보급을 담당한 사람은 나루탐이라는 이름의 인도 상인이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포르투갈 요새의 지휘관 페레이라가 그 딸을 탐냈다. 나루탐과 그의 딸은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페레이라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협박에 못 이겨 나루탐은 결혼에 동의했다. 다만 성대한 결혼식 준비를 위해서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또한 미라니 요새의 관리들에게는 건물을 수리해야 하니 그 동안 물건을 좀 치워두겠노라고 통보했다. 이를 핑계로 나루탐은 요새의 모든 무기를 치워버리고는 술탄 사이프에게 알렸다. 오만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공격을 가했고, 결국 1650년 요새와 도시는 모두 오만 술탄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인도 상인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을 지켰고, 오만의 포르투갈인 거점도 막을 내렸다.
---무스카트 상인의 아름다운 딸
네덜란드 군대는 발리 섬의 사누르 해안에 상륙했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진군했다. 가는 길에 눈에 띄는 집집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덴파사르에 있는 왕궁 근처에 가서야 사람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맞이하는 병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왕궁 안쪽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요란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략자들은 사격 대형을 갖추고 기다렸다. 잠시 후 정문에서 왕과 왕의 여러 왕비와 아이들, 성직자들, 하인들, 신하들이 참여한 행렬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장례식 복장 차림으로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를 갖추고 있었다. 행렬이 침략군 병사들의 코앞에 이르자, 여인들은 보석과 금화를 집어 던지며 병사들을 조롱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직자가 전통식 단검을 꺼내 왕을 찔렀다. 이를 신호로 발리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칼을 꺼내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네덜란드군의 총기가 불을 뿜었고 순식간에 발리 사람들은 모두 쓰러졌다.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네덜란드 군인들은 그들을 모두 쏘아 죽였다. 이내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대략 1000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병사들이 목격한 것은 발리식 힌두교 의례 “푸푸탄”으로, 최후의 저항을 의미했다. 네덜란드의 지휘관은 그러나 자신이 목격한 의례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모양이다. 휘하의 병사들이 보석을 줍고 궁전을 약탈하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가 불을 질렀다. 그들은 이웃 왕국으로 진군했고, 다시 한 번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최후의 저항 의례 “푸푸탄”, 335쪽
아마도 제2차세계대전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전투였을 것이다. 클라이맥스는 코히마의 어느 테니스코트에서 맞붙은 육박전이었다. 일본군이 패배했고 연합군이 승리했다. 일본군 사망 및 실종자는 5만 3000명, 연합군 사망 및 실종자는 1만 6500명이었다. 양측 진영 모두 인도인 병사들이 참전해서 용감하게 서로 싸우다가 죽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누군가의 제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1943년 벵골 지역에 닥친 기근으로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처칠은 당시의 가혹한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식량 공급을 늦추거나 다른 곳으로 전용했다.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는 청야전술(초토화작전)의 일환이었다. 처칠은 인도인을 “짐승 같은 종교를 믿는 짐승 같은 인간들”이라고 했다. 또한 벵골 지역의 기근은 “토끼처럼 먹고 자란 놈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2차대전 최고의 비극, 테니스코트 전투, 363쪽)
아리아인 침략설에 의하면, 인도 문명은 밝은색 피부의 외부인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이는 영국 식민 통치자들을 위해 조그만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즉 영국인은 후대의 아리아인으로서, 원주민을 문명화시킨다는 (고귀한) 사명을 띠고 인도 땅에 들어왔다고 스스로를 포장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아리아인 침략설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현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자료나 고고학 자료는 매우 빈약한 반면 유전자 데이터를 비롯해 그에 반대되는 자료는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리아인 침략설이 여전히 인정되고 있다.
---아리아인의 침략설은 가짜다, 30쪽
베다와 관련된 미탄니 왕국의 신 미트라(Mitra)는 중동 지역에서 유명한 신격이 되었다. 몇 세기가 흐른 뒤 로마 제국에서도 다시 유명한 신격, 곧 태양의 신 미트라(Mithra)로 추앙되었다. 소수파 종교였던 미트라 숭배는 로마 후기에 이르러 널리 확산되며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경쟁상대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화되기 전 로마에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축제가 있었는데, 매년 12월 17일에 시작해서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축제의 마지막 날인 12월 25일에 미트라교에서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 파티를 열었다. 로마 제국에서 주류 종교가 된 기독교는 솔 인빅투스 축일을 그대로 계승해서 그날을 크리스마스로 삼았다. 청교도들도 이런 엉터리 크리스마스에 동의할 수 없었다. 북아메리카와 브리튼 지역의 청교도들은 17-18세기에 크리스마스를 금지하고자 했는데, 그들이 보기에 과거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지나치게 흥청망청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12월 25일은 휴일로 남아서 지금은 기독교도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가 축제를 즐기는 날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95쪽
인도까지 진출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군하고자 했으나, 몹시 지친 부하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들은 인더스강을 따라가다 보면 지중해가 나오리라고 믿었다. 아라비아해 해안에 도착한 때는 기원전 325년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지중해가 아니었다. 고향까지 가려면 발루치스탄과 이란 동부의 사막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의 사막을 건너는 도중에 수천 명의 병사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어마어마한 전리품도 모두 버려야 했다. 짐을 싣고 가던 동물들도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군이 지중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에 아홉은 목숨을 잃은 뒤였다.
---길을 잘못 든 알렉산드로스의 비극, 115쪽
알렉산드로스의 기습에 놀란 다리우스는 전장을 버리고 도망쳤다. 페르시아 대군도 궤멸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전장을 지킨 용병들이 있었다. 바로 인도인 기마대였다.(114쪽)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 이슬람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680년 카르발라 전투가 벌어졌고, 무함마드의 손자 후사인 이븐 알리와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대학살을 면치 못했다. 그 때 알리의 군대에도 힌두교 용병이 있었고, 이들도 카르발라 전투에서 학살을 당했다.(182쪽) 인도양 상선의 경호를 맡은 병력도 인도의 용병이었다. 영국이 중국에 들어가 아편 전쟁을 일으켰을 때, 남아프리카에서 앵글로-보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의 전선에 인도 용병들이 참전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네팔의 구르카는 세계 최고의 보병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영국이나 브루나이 같은 나라에서 지금도 여전히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다. 이러한 용병 문제는 수많은 역사적 연속성 가운데 단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