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떻게 대리석 조각에 필요한 전문적 기술을 습득했을까? 데 로시가 어떤 방법으로 조각 기술을 익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씨앗 조각을 통해 필요한 기술을 연마했던 것 같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데 로시는 여자는 조각을 할 수 없다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조각가의 꿈을 키웠고, 남자들처럼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정상적인 조각 기술을 익힐 수 없자 씨앗에 조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조각가가 되었다. --- p. 25
데 로시는 특히 동료 화가 아미코 아스페르티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의 명성을 시기해 근거 없는 험담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여성이 인체 해부학에 능통하면 방탕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데 로시가 남성의 육체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성적으로 난잡하고 행실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비방했다. 이 때문에 데 로시는 평판이 나빠졌고 그녀의 작품은 남성 미술가보다 훨씬 저렴한 값에 팔렸다. 바사리도 그녀의 작품이 아주 헐값에 팔렸다고 말했는데, 이는 아미코 아스페르티니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스페르티니는 당시 볼로냐를 이끄는 핵심 화가 중 하나였는데,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사회적으로 취약한 데 로시를 모함하고 나쁜 소문을 냈던 것이다. --- p. 30
마리에타는 많은 초상화를 그렸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매우 적다. 더구나 그녀 스스로 서명을 한 작품은 고작 한 개에 불과해 대부분 틴토레토나 다른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전해져왔다. 그녀의 초상화가 당대 누린 엄청난 인기와 수년간 매일 아버지 작업장에서 일한 것을 고려할 때, 현재 그녀의 작품이 몇 개 남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마리에타는 그야말로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화가의 대표적 예다. --- p. 37
프란스 할스의 작품 중 수작으로 평가되던 〈즐거운 커플〉은 19세기 말 네덜란드 미술사학자 코르넬리스 호프스테드 데 그루트에 의해 결국 레이스테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극찬하던 이 작품이 할스가 아닌 한 무명 여성의 그림으로 밝혀지자 미술사가들은 그림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다. F와 H가 조합된 할스의 서명과 JL과 별 마크로 구성된 레이스테르의 모노그램은 전혀 비슷하지 않은데도 오랫동안 그녀의 작품이 할스의 그림으로 오해받은 것 역시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p. 60
카우프만은 많은 장르의 그림을 그렸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역사화가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역사화는 회화의 범주에서 가장 우월하고 지적인 분야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술 아카데미는 미술가들을 단순 기술자나 아마추어 견습공이 아니라 학식 있는 이론가로 양성해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고 했다. 또한 역사화와 종교화를 회화의 최고 분야로 두고, 초상화, 풍속화, 정물화, 풍경화 순서로 미술 분야의 위계질서를 세웠다. 당연히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의식이 강했던 카우프만은 역사화를 그리고 싶어 했고, 역사화가 남성에 의해 독점되어 여성은 덜 중요한 분야로 밀려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복잡한 알레고리와 서사, 고결하고 도덕적인 테마를 가진 역사화를 그리려면 성서 와 고전 문학, 예술 이론에 대한 깊은 교양이 요구되었고,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도 필수였다. 누드 데생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카우프만은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야 했다--- p. 77~79
“나는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그들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동등하게 대접받기를 원한다.” 그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모리조는 화가로서 남자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모리조는 1874년부터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앵데팡당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품했다. 1880년 인상파 전시회에서는 비평가 알베르 울프 등 많은 이들이 모리조를 인상파 화가 중 최고로 평가하기도 했으니, 그녀의 자의식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p. 88
카사트는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대신 여성들을 깊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존재로 품위 있게 표현했다.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들은 마치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그린 종교화의 구도를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카사트가 육아를 여자라면 누구나 쉽게 해내는 그림자 노동으로 보지 않고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음을 드러낸다. 남자의 사회생활만큼 존중받아야 할 일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 자애로운 마돈나의 모습과 카사트의 그림 속 어머니가 다른 점이라면 이상화 되지 않은, 현실적이고 정직한 일상의 어머니라는 점일 것이다.--- p. 99
남성 화가의 보조자에 불과했던 여성 화가들에게 앙귀솔라의 성공은 여자도 전문 화가가 될 수 있다는 매우 고무적인 전례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최초로 ‘화가의 자화상’을 그린 화가로서 예술가의 자부심을 명확히 드러낸, 근대정신을 가진 혁명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널리 알려진 최초의 국제적 여성 화가로서, 라비니아 폰타나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같은 다음 세대 여성 화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앙귀솔라가 그 시대에 했던 것, 즉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어머니, 아내로서의 역할이 아닌 전문 화가로서 사회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공고히 한 것은 오늘날 페미니스트의 활동이나 이념과도 다르지 않다. 지금도 미술사가들에 의해 앙귀솔라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편견의 동굴에서 발굴되고 재평가되고 있다. --- p. 116~117
젠틸레스키가 그린 강인한 유디트와 달리 남성 화가들 이 그린 유디트는 다분히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성적 매력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들 그림 속의 연약하고 우아한, 혹은 교태 어린 자세의 여성이 애국심에 불타 그런 위험한 일을 수행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유디트가 아름답기는 했을 테지만, 적어도 적장의 목을 벨 정도의 결의와 강건한 정신이 얼굴에서 만큼은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 p. 141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해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도대체 여성 미술가들은 어디에 있는 거죠?” 그는 아내의 뜻밖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여성 미술가의 작품 을 찾았지만 전시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곧장 수장고로 달려가 페테르스의 작품들을 꺼내왔는데, 얼마 뒤 미술관 관장이 여성 미술가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그에게 자문을 구했고, 운명처럼 페테르스를 추천하게 됐다고 한다. 이리하여 400년 전의 화가는 21세기 우리 앞에 다시 돌아왔다. --- p. 147
메리안이 수리남에 도착한 것은 그녀가 쉰두 살 되던 해였다. 17세기 후반의 쉰두 살이란 지금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아마도 일흔 살쯤은 되었을 나이였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여행 비용을 위해 255개의 작품을 팔고 네덜란드 당국에 탐사 지원 신청서를 냈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지만, 탐사 경비를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난 뒤 마침내 둘째 딸과 함께 2개월간의 험난한 뱃길에 오를 수 있었다. (중략) 열대의 혹독한 기후 속에서 허름한 집을 빌려 매일 보트를 타거나 걸으면서 농장으로, 숲으로, 강으로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 고, 현지 백인 정착민들은 ‘미친 여자’라며 수군댔다. --- p. 166~167
카셀 대학 교수인 울리히 쿠체라가 말했듯이 메리안은 현대 생물학의 기초에 이바지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과학사에서 무시되었던 것이다. 당시 메리안은 ‘숙녀답지 않다’, ‘지나치게 설쳐댄다’, ‘거칠다’, ‘독립적이다’ 등 사회적 편견과 비난에 시달렸다. --- p. 174
보뇌르는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중반에 유행한 멋진 드레스는 그녀의 활동 패턴과 맞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야외로, 도살장으로, 가축 시장으로 쏘다니며 작업할 수 있었겠는지를. 남들이 뭐라든 그녀는 평생 남자 농부들이 입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은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또한 남자들처럼 담배를 피우고 사냥도 했다. --- p. 180
매우 보수적인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감추지 않고 대범하게 사회적 편견에 맞섰다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봐도 놀랍다. 그녀는 시대와 사회가 규정한 규범 밖에서 오직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르며 살았다. 사회적 통념을 깨는 보뇌르의 행동은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지만, 이는 여성으로서의 제약을 뛰어넘고자 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p. 192
모더존 베커의 누드는 기존 누드화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몸에서 벗어나 여성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보는가를 그리려 했던 것이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이후, 수잔 발라동과 프리다 칼로도 전통적인 여성 누드의 규범을 뒤엎는 방식으로 여성의 몸을 그렸다. 이 들은 모두 남성의 성욕의 대상, 타자화되고 상품화된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성 자신의 관찰과 정체성을 그린 화가들이었다.--- p. 199
결혼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미술 학교를 수석 졸업한 재기발랄한 딸에게, 한 남자의 아내가 됐으니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요리 학교에 보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가, 부모가, 딸과 여성들에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아를 포기하는 것을 분명한 태도로 거부했다. 가사 노동을 최대한 줄였고, 아틀리에를 얻어 미술 작업에 몰두했으며, 어느 정도 예술적 성취를 이룬 다음에 아이도 갖겠다고 선언했다. --- p. 204
다다이즘은 기존 사회의 체제와 가치에 저항하며 출발한 혁명적인 운동이었지만, 남성 다다이스트들은 유독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기존의 가부장적 가치관에 머물러 있었다. 주요 멤버인 한스 리히터 역시 회흐를 “돈이 부족한데도 (다다 예술가들을 위해) 어떻게든 샌드위치, 맥주, 커 피를 마련해준 좋은 여자”로만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남자들이 그녀를 예술적 동지가 아니라 먹을 것이나 챙겨주는 심성 좋은 여자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p. 232
그녀의 디자인은 세계의 식물들이 재현된, 일종의 세계 식물 지형도였다. 대체로 사람들은 책을 통해 식물과 씨앗 품종에 대해 과학적 지식을 습득했지만, 패션 역시 식물학 지식을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패션 디자인을 통한 식물학 지식은 특히 왕립학술원 같은 단체로부터 배제된 일반 여성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가스웨이트가 디자인한 직물의 드레스를 보면서 이국적인 식물에 대한 지식을 대화에 활용했으며, 이국의 식물을 통해 유럽을 넘어 다른 대륙의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 p.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