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골목길은 이렇게 기록을 남겨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성공과 발전을 향한 우리의 성급한 발걸음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던 친구 같은 골목길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아닌지…. 역사적 유물이나 특별한 기억이 있는 장소가 아닌 골목길을 굳이 탐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항상 곁에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골목길을 위해 우리가 시간과 돈을 들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곳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초조함이나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강박 대신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골목길을 걷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프롤로그」중에서
내가 보고 싶은 것은 화폐박물관 바깥에 있다. 정확하게는 모서리에 새겨진 정초석이다. 얼마 전 정초석을 새긴 주인공이 초대 통감이자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총살된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원래는 ‘定礎(정초)’라는 글자 옆에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과 새겨진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현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인 융희(隆熙) 3년 7월 11일, 그러니까 1909년 7월 11일이 한문으로 쓰여있다. 광복 이후 새롭게 새긴 것이다. 은행이 지어진 시기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한복판에 이토 히로부미가 쓴 정초석이라니, 부끄러운 역사라고 해서 모두 없앨 수는 없으니 착잡한 일이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인 경성재판소 역시 1928년 완공될 당시 조선 총독인 사이코 마코토의 이름이 남겨진 정초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또한 일본의 지배가 남겨놓은 깊은 흔적이다.
아울러 이곳은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행렬이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여러 갈래로 나뉘었지만 대부분 소공로를 거쳐 갔다. 그러니까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기 위한 발걸음이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 옆을 지나갔던 것이다. 역사가 주는 무게가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첫 번째 골목. 소공동과 명동」중에서
하지만 광장시장에 들어선 순간, 시장은 다른 의미의 골목길이라는 점을 느꼈다. 치열한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장시장이라고 하면 흔히 마약김밥을 비롯한 먹거리만을 떠올린다. 우리가 갔던 날도 음식을 파는 좌판과 상점에 손님들이 가득했다. 파는 음식도 다양해서 떡볶이와 순대 같은 분식부터 회와 비빔밥, 칼국수까지 다양했다. 우리는 대개 골목길이 조용하고 고요하며 텅 빈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골목길은 치열한 삶이 오가는 곳이다. 골목길을 통해 직장이나 가게로 출근하는 사람들, 좀 더 빠른 지름길로 가기 위해 좁은 골목을 오가는 행인들. 광장시장 역시 오가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먹거리를 통해 골목과 닮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광장시장이 처음부터 먹거리로 유명한 곳은 아니었다.
---「두 번째 골목. 광장시장」중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 해방촌은 가난과 비루함의 상징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험하고 궂은일들을 해야만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보면 그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예로 해방촌에서 온 사람들이 조문하러 왔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해방촌에서조차 조문을 왔을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을 뒤집으면 해방촌이 당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5.16 군사 쿠데타 이전 해방촌 사람들은 사제담배를 무허가로 제조·판매하는 일로 먹고 살았다. 그래서 한때 해방촌의 별명이 ‘제2전매청’이었던 적도 있다. 가짜 상이용사 흉내를 내면서 식당과 성당에서 무전취식과 협박을 하던 이들도 상당수가 해방촌에서 살았다. 군 제대 후 가족들과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지친 가장이 허리띠로 목을 매 숨진 곳도 해방촌이었고,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가 약 한 첩 못 써보고 세상을 떠난 곳도 해방촌이었다.
---「세 번째 골목. 해방촌」중에서
세운상가. 아마 1980~90년대에 서울에서 학교에 다녀본 남학생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묘한 추억 한두 개 정도는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은 원하는 정보를 휴대전화로 쉽게 다운로드받을 수 있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런 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상 하나 얻으려면 발품을 팔아야만 했던 시절, ‘빨간 비디오’라 불리던 불법 영상물은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당시 사춘기 남학생들에게 빨간 비디오의 가치는 중세의 청금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빨간 비디오는 VHS 테이프에 불법 복제되어 3만 원선에서 판매됐다고 한다. 당시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가 2만 원 남짓이었으니 상당한 고가에 거래된 것이다. 테이프를 비디오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보통 〈한샘 국어〉 영상이 나오다가 갑자기 화면이 바뀐다고 했는데, 비싸게 구해온 비디오의 70% 정도는 끝까지 〈한샘 국어〉 강의가 나와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두 시간 가까이 한샘 선생님의 고전문학 수업을 듣기도 했다.
---「네 번째 골목. 세운상가」중에서
사람들이 떠난 이화동에는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낡은 달동네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던 이화동에 벽화가 그려지게 된 것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아트 인 시티Art In City’ 사업에서 이화동을 벽화마을로 만드는 ‘낙산 프로젝트’가 기획되면서부터다. 당시로서는 주민이 참여하는 공공미술이라는 낯선 개념이었는데, 다른 사업들이 대개 공모를 통해 뽑혔다면 이화동의 낙산 프로젝트는 애초부터 기획 사업으로 진행되어 사업비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많았다.
예상대로 벽화로 치장한 이화동은 핫 플레이스가 되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게 되고, ‘이화 벽화마을’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 벽화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조용한 거주지역이 갑자기 유명세를 치르면서 수많은 내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와 시끌벅적했으니,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촌 한옥마을과 더불어 주민들의 피해와 불만이 가장 많은 곳이 된다. 급기야 2016년 3월에는 이화 벽화마을을 대표하는 계단의벽화가 주민들에 의해 훼손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들은 관광객들이 주변을 시끄럽게 해서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벽화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벽화는 복원되지 않았고 갈등 역시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다섯 번째 골목. 이화 벽화마을」중에서
“등 비빌 한 뼘의 자리와 당장 먹을 게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아. 걱정 없는 공간에서 시간은 굳이 내일로 흐르지 않거든.” 고양이는 유연한 몸뚱이를 아무렇게나 뒹굴며 메시지를 전했다. 고양이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매우 유연한 것으로, 우리는 녀석이 전하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고양이가 없었다면 나는 골목의 에어컨 실외기나 이끼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을 이어가다 보면 고양이처럼 뒹굴뒹굴 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고양이는 그런 나를 위해 어디든 있고, 충무로 골목에서도 빤한 눈으로 보고서는 모르는 척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굳었던 마음이 많이 유연해졌다. 파랗고 긴 그림자가 드리운 충무로 골목에도 이토록 고양이들이 많으니 괜찮겠지. 막연한 나의 믿음엔 아무런 인과도 없지만 그렇게 믿어버리기로 했다. 우리는 하루의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하루를 살아내야만 하고, 삶이란 그런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여섯 번째 골목. 충무로 인쇄골목」중에서
광복 이후에도 피맛골에는 큰 변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낡고 허름한 골목길이 큰길 바로 옆 빌딩 그림자 아래 모습을 숨긴 채 예전처럼 주머니 가벼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었다. 참새구이와 정종을 파는 술집과 빈대떡에 막걸리를 파는 가게, 선지를 잔뜩 넣은 해장국을 파는 음식점, 바삭한 생선구이로 한 끼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백반집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 피맛골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자본이 모든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에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린 종로를 허름한 음식점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르메이에르종로타운을 비롯해 광화문 D타워와 타워8, 그랑서울이 차례대로 들어서면서 피맛골을 집어삼켰다. 종각역 너머에는 진즉에 종로 타워가 들어서면서 피맛길을 끊어버렸다. 국가와 권력도 어찌하지 못한 길을 자본이 없애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걷는 피맛길은 파편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 망가트리고 감춰버린 골목길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열 번째 골목. 피맛길」중에서
골목을 걷는 동안 좋은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몇몇 골목은 재개발로 모든 게 흔적조차 사라져 아쉬운 마음이 컸다. 건물의 노후화나 교통량의 변화 같은 여러 합당한 이유로 재개발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골목의 흔적과 이야기 몇 줄 정도 남겨질 수 있는 여유로운 개발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연로하신 아버지는 시골 마을 중앙에 있는 큰 나무를 그리워하신다. 나무를 떠올리심은 나무 아래에서 놀던 친구들과 여러 가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시는 것일 거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우리 세대에게 골목은 아버지의 큰 나무와 같다. 어떤 전설을 품은 나무처럼 많은 이의 서사를 품은 골목과 수많은 이야기가 전설처럼 이어지기를 바란다. 어느 시골 동네에 신성한 큰 나무처럼 도시의 동네마다 신성하고 깊은 골목이 살아 숨 쉬길 바란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