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건축’을 추구하는 구마 겐고의 건축 철학을 한 권으로 만나보다
구마 겐고(??吾)는 단게 겐조, 마키 후미히코, 안도 다다오 등을 잇는 일본의 4세대 건축가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8개나 수상한 일본 건축계에서 세지마 가즈요와 함께 일본 건축의 한 축을 받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의 히로시게미술관, 산토리미술관, 네즈미술관, 아사쿠사 관광안내소, 중국의 대나무집, 프랑스 브장송예술문화센터 등이 그의 대표작이며, 최근에는 도쿄올림픽 주경기장과 가도카와 무사시노 박물관을 설계했다. 한국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제주 롯데 아트빌라스는 지붕을 현무암으로 덮어 오름을 형상화했고, NHN 춘천데이터센터는 팔만대장경을 보존해온 해인사 장경각에서 모티프를 얻어 설계했다.
일본의 전통 건축기법과 소재로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는 구마 겐고의 작품에는 태생적인 반골 기질이 깊이 배어 있다. 반건축, 반시대적인 그의 저항은 콘크리트와 철강, 유리를 거부하고 나무, 대나무, 종이, 세라믹, 천 등의 약한 소재를 구조체로 과감히 선택하여 ‘약한 건축’의 가치와 생명력, 미래성을 이야기한다.
도쿄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이자, 30년 넘게 건축 설계를 해온 구마 겐고는 이 책에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경험했던 다양한 장소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건축 사상이 어떻게 자리 잡고 성장해왔는지 되짚어보고 있다. 르코르뷔지에나 미스 등 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인물들과 그들의 철학에 관한 구마 겐고의 비평이 수록되어 있고, 모더니즘 건축에서부터 현대 건축에 이르기까지 일본 건축 역사의 흐름 또한 한눈에 볼 수 있게 기록했다. 아울러 기존의 건축과는 다른 노선을 택한 자신의 도전을 지금까지 자신이 실현해온 작품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저서들이 전문적 건축기술에 집중하였다면, 이 책은 건축가로서의 자신의 성장 과정과 철학적 배경을 들려줌으로써 건축을 전공하는 젊은 학생들이나 건축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건축적 영감의 토대와 디자인의 다양성을 들려주고자 이해하기 쉽게 서술했다.
건물도, 사람도 장소가 낳는다
구마 겐고는 이 책을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쓰기 시작했다. 건축이 이렇게 나약한 것인가? 인간이 이렇게 나약한 존재였던가? 폐허가 된 땅을 복구할 수 있을까? 일본이 영원히 침몰할 것 같은 암울한 기분이 들었고 미래나 내일의 문제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그를 절망에서 구원해준 것이 ‘장소’였다.
“내가 태어난 장소, 나를 육성해준 장소를 생각하자 신기하게 기분이 밝아졌다. 나를 감싸고 있는 주변 공기의 온도가 약간 상승하면서 몸이 따뜻해지는 감각도 느껴졌다.”
사람에게 장소는 그저 의미 없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그 자신이다. 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등 모든 것이 장소에 깊이 의존하고 있고 그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건축가는 더욱 ‘장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구마 겐고는 거듭 강조한다. 장소는 그저 조용히 존재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매우 섬세하다. 어떻게 하면 그 장소를 파괴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장소를 지키면서 그곳에 물건을 만들거나 디자인할 수 있을까? 장소와의 관계성을 고민한 이런 흔적이 자기주장이 강하고 위화감을 주는 건축이 아니라 ‘양보하는 건축’, 즉 지역과 토지, 환경, 문화 등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는 그의 건축 철학으로 발전했다. ‘돌’, ‘대나무’, ‘나무’, ‘종이’ 등 다양한 성질이나 표정을 가지고 있는 소재들을 선택하는 것도 장소와 가장 가까이 밀착하고 적응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약한 것들은 변화에 잘 적응하고 바로 그 약함 때문에 살아남는다.”
모더니즘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 미학을 구마 겐고는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강압적으로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고 환경을 바꾸는 건축의 범죄적 숙명을 생각할 때 건축물을 짓는다는 행위의 무게감에 무신경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분쇄가 아니라 연결이다
이 책의 원제는 『구마 겐고가 쓴 구마 겐고(??吾による隅?吾)』이다. 롤랑 바르트의 책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와 같은 글을 써보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글을 쓰는 바르트와 대상인 바르트가 분리되고 다양한 파편으로 분쇄되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향성은 정반대다. 바르트가 ‘분쇄’라면 구마 겐고는 ‘연결’이다. 한 개인으로서, 건축가로서 수많은 흔적을 남기고 이동하면서 잘게 분쇄된 ‘구마 겐고들’ 안에 무엇인가 공통적인 것이 흐르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을 찾고자 했다. 그 접착 작업의 열쇠가 ‘장소’였다.
“나라는 확고한 존재는 없다. 수많은 작은 것들이 모여 있는 것이 나다.”
이와 같은 연결 작업은 그의 건축 설계에서도 끊임없이 실현된다. 굴을 뚫어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고, 지면 자체를 바닥으로 만들어 대지와의 연결을 시도한다. 그의 대표작인 히로시게미술관이나 대나무집, 네즈미술관에도 모두 굴이 있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고, 오른쪽과 왼쪽,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회와 사회를 겹겹이 연결하고자 하는 그의 집요한 철학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