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놀고 있다’는 문장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즐겁고 신나게 ‘놀고’ 있거나, 경제적 벌이와 연계해 ‘놀고’ 있거나(흔히 우리가 ‘백수’라고 부르는), 또는 다소의 빈정거림을 담아 바라보는 ‘놀고’ 있는 상황까지 새삼 우리 말의 재미를 느낄 만큼 다양한 뜻이 담겨 있다.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이것은 은퇴에 관한 이야기인가’ 싶으면서(아마도 정년을 채우지 않는 조기 은퇴, 소위 ‘파이어족’에 대한 지대한 관심 때문이리라) 동시에 언젠가 읽은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가 떠올랐다.
회사를 안 다니면 정말 굶게 될까. 대학 졸업 이후로 직장 생활을 계속해 왔던 아내와 나는 집에서 술을 마시며 곧잘 이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둘 다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어쩌다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나머지 한 사람이 돈을 벌어 오면 되지”라는 속 편한 소리를 하고는 다시 술잔을 부딪쳤다. 그때는 회사를 그만둔다는 걸 상상하지 못해 그런 것이었다. p.10(ebook)
아, 나도 정말 궁금하다. 어릴 적부터 ‘근면’과 ‘성실’을 가훈으로 삼으신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했던 나는 지금까지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심지어 휴일에도) 다소의 강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가끔 내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인지(거장하게 ‘자아실현’이라고는 쓰지 않겠다) 아니면 나의 강박을 해소하기 위한 적절한 대응책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게다가 ‘노는 것’과 ‘쉬는 것’의 구별 역시 모호한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감정마저 있으니 이런 내게 책 읽기가 취미가 된 것은 어쩌면 책을 좋아하는 성향과 독서는 곧 ‘생산성 있는 행위’라는 후천적 주입이 융합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논다는 것은 쉰다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회사를 다니지 않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은 남들이 원하는 것들을 하고 살아왔으니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원하는 것들을 하며 살아보려는 것이다. p.12(ebook)
(당연하지만) 나의 고민과는 무관하게 저자와 그의 아내는 함께 ‘놀기’(일명 부부가 둘 다 놀기)를 실천하기로 한다. 아무리 이제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보겠다 결심한다지만 그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항상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우리도 떨린다. 돈도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돈은 늘 모자라게 되어 있다. 그리고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뭔가를 계속 기획하고 시도하면 새로운 기회는 늘 온다. 그리고 일정 부분을 포기하거나 방향 전환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계속 미뤄왔던 일상의 행복들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비싼 가방이나 좋은 오디오, 고급 자동차 등 눈에 보이는 귀중품들을 소장 목록에서 지웠다. 그 대신 계속해서 재미있는 일을 만들고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이것은 ‘정신 승리’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젠 알고 있다. 누구든 회사를 그만두어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을 걷어낼 수만 있다면 새로운 세상은 열린다. p.12(ebook)
정말 막연한 불안감만 넘어설 수 있다면 내 앞에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저자의 글을 읽으며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나의 소장 목록에서 지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떠올려봤다(책에서 언급한 비싼 가방, 좋은 오디오, 고급 자동차는 지금도 없으니, 음..뭘 지워야 하려나?).
퇴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법이라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손에 쥔 공을 놓아야 더 큰 공을 잡을 수 있다’는 말도 떠올렸다.,(중략)..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회사나 직장을 그만둔다고 큰일이 나진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꼭 열리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p.18(ebook)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는 말은 익히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나 든든한 느낌이었는데 왜 이책에서 이 문장을 마주하니, 정말 그럴까? 하고 물음표가 따라붙을까? 회사를 그만둬도 굶어 죽지 않는다는 말은 직설적인 동시에 ‘그래, 굶지는 않겠지?’ 슬몃 내 마음을 찔러 온다.
생각해 보면 성공이란 것은 돈을 버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인간은 음식 없이 40일, 물 없이 3일을 살 수 있지만 의미 없이는 35초를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저 편하게 놀 생각이었다면 아내든 나든 며칠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책의 제목이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의미 없이 노는 시간은 거의 없다. 겉으로는 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늘 뭔가 새로운 생각을 하고 기획을 하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바쁠 때도 많다. 하지만 전처럼 힘들지는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p.246(ebook)
책에는 부부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때로는 벌리기도 한다), 자신들의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도 나의 시선은 직장을 그만둔 그 시점에 집요하게 머물러 있었다.
새삼 경제적 벌이의 수단을 내가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일을 하는 곳’으로 한정 지어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물론 ‘새로운’ 벌이의 형태를 고민하는 것이 막막하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위에 열거한 짓거리들 중 돈이 되는 모임은 하나도 없다. 요즘 인스타그램에 쓰고 있는 ‘공처가의 캘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떠랴. 언제나 그랬듯이 인생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런 ‘즐거움’ 아니던가. 그러니 쓸데없는 짓을 두려워하지 말자. 장담하건대 가끔 딴짓을 하면 할수록 인생은 즐거워진다. p.188(ebook)
나에게 성공이란 ‘인정받는 광고인’이 되는 것인가 여러 차례 자문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내 속에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을 계속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렵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부부가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면서 한옥이나 고치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어리석게 비칠까 봐 겁이 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p.228(ebook)
저자가 아무리 쓸데없는 짓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끔 딴짓도 하라고 그리고 실수담도 여러 개 만들라고 하지만 완벽주의자를 표방(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완벽주의를 표방하면 참으로 고단하다)하고 실수를 하면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지만 이미 속으로는 한껏 자책하는 표리부동한(아, 적고보니 나라는 사람, 조금 별로인 듯) 인간인 내게서 흔쾌히 동의를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정말 즐겁게 ‘놀고 있는’ 이 부부가 부러운 것은 나 역시 그런 삶에 대한 기대를 쉬이 접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언젠가 <나도 이제 놀기로 했습니다> 이런 제목의 글을 쓰며 사람들에게 같이 놀자고 권할지도 모른다. 뭐, 사람 일이란건 알 수 없으니 이왕이면 즐거운 의외성을 기대해 보고 싶다.
FROM Millie
*덧붙이는 말
저자처럼 위트있게 구직 호소문을 올릴 수 있는 반짝이는 재능이 있다면 조금 더 의외성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그저 핑계인걸까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밥을 많이 먹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술을 많이 마시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나이는 좀 있지만 카피는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홍보 영화 시나리오도 잘 씁니다.
카피라이터지만 CDCreative Director도 잘합니다.
카피라이터지만 비주얼 아이디어도 잘 냅니다.
강의도 잘하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프레젠테이션도 잘하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칼럼도 잘 쓰지만 카피를 더 잘 씁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지금 일을 찾고 있습니다.
*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린 구직 청탁서
*기억에 남는 문장
나의 무모한 결정을 태연히 받아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내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과 시간에 불쑥 전화를 해서는 “나,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둬야겠어”라고 말했을 때 흔쾌히 “그래. 잘 생각했어. 결심하느라 애썼겠네”라고 해준 아내는 일요일에 카 셰어링 서비스에서 차를 빌려 회사에 있던 책과 짐을 모두 싣고 집으로 왔을 때도 진심으로 퇴직을 축하해 주었다. 그냥 말로만 축하해 준 게 아니라 한 달짜리 제주도 여행까지 선물해 주었다. 당시 제주도에 별장을 지어놓고 아직 입주하지 않은 지인이 하나 있었는데 아내가 그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한 달간 나 혼자 글을 쓰며 지낼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p.10(ebook)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말하면 옆자리분이 뭐라고 하려나? 한달 제주도 여행 선물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런데 반대로 갑자기 옆자리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과연 나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는 ‘그만하면 충분히 벌었으니 이제 그만하라’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업계는 늘 위기였고 다니는 회사마다 사정이 안 좋았다. p.16(ebook)
“혼자 있을 때 뭘 하고 노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 p.30(ebook)
완벽한 계획이나 설계도는 없다. 진정한 성공을 만들어주는 건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작은 응원과 호의라고 생각한다. 근심이 쌓여 발바닥이 뜨거워질 즈음엔 이렇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꼭 나타난다. p.62(ebook)
“일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일을 할수록 피곤해진다는 게 그 증거다”라는 프랑스 소설가의 농담을 난 진담으로 생각한다. ‘일은 조금만 효과적으로, 노는 건 오래 많이.’ 목표는 이건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늘 문제다. p.98(ebook)
토머스 에디슨의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도 짜증 나긴 마찬가지였다. 흔히 이건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로 오해되곤 하는데 사실은 ‘누구나 다 노력은 하지만 1퍼센트의 천재성이 없으면 다 소용없다. 다행히 나는 그걸 가지고 있었다’라고 잘난 척하는 얘기였으니까. p.140(ebook)
*아, 그런거였나? 99퍼센트 노력에 강조점을 찍고 있던 내게 결국 1퍼센트 천재성의 유무가 결과를 좌우한다는 이 말은 얼마나 힘 빠지는 대목이던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잘하고 싶은 사람은 꾸준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p.224(ebook)
그래서 매일매일이 힘든 날이지만 동시에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느리고 고단해도 지금처럼 날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하고 또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겠는가. p.240(ebook)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소확행’을 꿈꾸지만 거기에 늘 ‘언젠가’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런데 정말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루게 될까?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하루에 8시간씩 성실하게 일해 봤자 결국에는 사장이 되어 하루 12시간씩 일하게 될 뿐이다”라는 지독한 독설을 남겼다. p.244(ebook)
*쳇! 하루 8시간씩 일한다 해도 사장이 될 수 없는 이 조직에서 과연 나는 뭘하는 거지? 로버트 프로스트의 독설에 현타가 오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p.246(ebook)
동종업계 출신의 저자가 쓴 글이라 읽으며 무척 공감한 책이었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최근 널리 알려진 파이어족 부부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번아웃증후군 회복기 같은 내용이었네요. 어쨌든 직장은 없으나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도 하고 쉬기도 하는 부부 이야기였어요. 욕심을 버리고 적당히 벌고 잘 사는 방법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책이네요. '논다'는 게 '(무작정) 쉰다'는 게 아니었어요. 재밌게 한번에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