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책을 사기 시작했다.
일회성 일 수도 있고 꾸준함의 시작일 수도 있겠지. 이왕이면 긴 여행의 시작이었으면 한다.
나처럼 책과 억지로 친해지기도 힘들듯하다.
몇 권의 책을 읽어야 인생 책을 만나는 거냐고요.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면 나는 어린 시절에 책을 안 읽었으니 지금 읽기 시작하면 그 배는 읽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선택의 문제. 그리고 흔들림의 연속.
후회와 자책의 순환고리.
그 안에 나약한 나의 존재가 계속 떠오른다. 이제야 사춘기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를 찾아 나는 계속 어딘가로 걸어간다. 다만, 이 여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은 차분해졌다는 거.
몇 권의 고전 소설을 읽고 생각했다. 고전 철학이야 무지하게 어렵다지만 사람이 존재하는 곳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비슷하구나. 책도 개중엔 재미있는 것도 재미없는 것도 있다.
다만 이 책의 느낌은 막 재미있지는 않을 듯하다. 그래도 읽는다. 그냥 던져버리기에는 궁금증이 인다. 어떤 내용일지 그 시절로 들어가 보자.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다. 인도 뱅골에서 인도총독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이듬해 어머니와 영국으로 이주했다. 경찰, 일용직 노동자, 교사, 서점 점원 등으로 일하면 글을 썼고 다수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동물농장>, <1984>를 출간하고 지병인 폐결핵으로 1950년 47세로 생을 마감했다.
영국 사회주의.
텔레스크린은 내가 만들어 내는 소리와 행동을 감시한다. 잠을 자거나 무의식적인 행동이 감시의 대상이 된다.
위대한 지도자 빅브라더는 우리 사람처럼 실존하는 인물일까?
텔레스크린을 통해 유라시아 또는 이스트 아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러나 지금의 전쟁은 20세기 초의 전쟁과는 사뭇 다르다.
우월한 침략자의 존재가 아닌 고만고만한 힘들 가지고 전쟁을 하나 실질적으로 시민들은 절대빈곤에 시달린다.
그리고 과학 기술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낙후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사랑이 허용되지 않는다. 당이 맺어주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며 가족이 가족을 감시하는 그런 현실에 산다.
선사시대 이래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의 계층이 있다. 상류층은 본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고 중류층은 상류층의 자리를 위협하기 위해 하류층을 끌어들여 혁명을 일으키고 다시금 하류층을 내몬다.
당의 지도자와 당원 그리고 프롤레로 구성되는 영국 사회주의가 원하는 세상을 어떤 세상일까?
어떤 세상을 꿈꾸길래 모든 이들의 세상이 도청되고 감시되어야 하는 걸까?
그들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조종할 수 있는가?
윈스턴을 매일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는 남자다. 텔레스크린 앞에서 어는 정도 표정과 행동을 조절하며 사는 평범한 당원이다. 모든 생활이 감시되면서 내 이웃이 내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그것은 그 또는 그녀가 사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진다.
개인은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 없다. 그리고 그 거대한 힘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을 저항이 아닌 순응으로 이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일기를 쓰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가 사는 사회는 역사의 기록이 없다. 역사는 단지 기억 속에만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기록은 순간순간 조작되어 국민에게 전달된다. 누군가는 그 정보를 곧이 믿고 누군가는 흘려보낸다.
자신이 사상경찰 아니면 스파이로 의심되는 20대 여자로부터 감시당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뜻밖에 그녀로부터 쪽지를 받는다. 쪽지의 내용은 '사랑해요'다. 그렇게 윈스턴과 줄리아는 가까워지고 서로의 아지트에서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윈스턴이 빅브라더에게 의심을 품고 형제단의 존재를 쫓아가는 중에 혁명가 골드스틴의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결국 윈스턴과 줄리아는 잡혀가게 된다. 윈스턴이 잡혀간 사랑부에서 그를 고문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에게 형제단과 골드스틴의 책을 얻는 방법을 알려준 오브라이언이었다. 서로를 배신했다는 윈스턴과 줄리아는 다시 만났을까?
기나긴 고문 끝에 윈스턴은 처형당했을까, 아님 모든 것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풀려났을까?
생각보다 오래 읽었다. 가독성이 좋은 거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쉬이 읽히지 않았다.
인간의 잔인함, 나약함에 대해 동시에 생각해 본다.
인간은 평등하게 살 수 없는 존재 인가? 결국은 계층이 있어야 하는가?
책을 읽고 마음이 무겁다. 이런 세상이 오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특권을 가진 소수 계층의 부과 권력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런 고전 소설에 대해 주워들은 바가 없어서 처음 접한게 좋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는 내가 어느 정도 어른이어서 좋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p19
소멸이다. 흔히 쓰는 말은 증발이었다.
p39
'방법'은 알지만, '이유'는 모르겠다.
p125
하지만 요즘은 순수한 사랑이나 순수한 욕망을 느낄 수 없었다. 어떤 감정도 순순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 두려움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의 포옹은 전투, 절정에 도달한 것은 승리였다. 당을 향한 일격이었다. 정치적인 행위였다.
p195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에요. 우리의 진정한 삶은 오로지 미래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한 줌의 흙과 뼛조각이 되어 미래에 참여할 겁니다. 그 미래가 과연 언제쯤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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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화창하고 쌀쌀한 4월의 어느 날, 시계가 13시를 치고 있었다. 윈스턴 스미스는 지독한 바람을 피하려고 가슴에 턱을 묻은 채 빅토리 맨션의 유리문을 재빨리 통과했다. 그 바람에 흙먼지 섞인 바람 한 줄기가 소용돌이처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그는 펜에 잉크를 찍은 다음, 딱 1초 동안 머뭇거렸다. 그동안 전율이 그의 배 속을 훑고 지나갔다. 이 종이에 자국을 남기는 것은 결정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작고 서투른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썼다.
1984년 4월 4일.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 일기를 쓰는 걸까? 미래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그는 종이에 적은 의심스러운 날짜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어 단어인 '이중사고'에 쿵 하고 부딪혔다.
-미래 또는 과거에게, 생각이 자유롭고 사람들이 서로 다르며, 혼자서 살지 않는 시대에게, 진실이 존재하고 한 번 벌어진 일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시대에게.
획일성의 시대에서, 고독의 시대에서, 빅 브라더의 시대에서, 이중사고의 시대에서 인사를 보낸다. 안녕하십니까!
-"그건 무슨 뜻이지, 윈스턴?"
"방금 설명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어요. 그건 꿈에 지나지 않아요. 불가능해요."
"왜?"
"두려움과 증오와 잔혹성을 기초로 문명을 세우는 건 불가능해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왜?"
"활기가 없을 테니까요. 스스로 허물어질 겁니다. 자멸할 거예요."
-그는 거대한 얼굴을 응시했다. 저 검은 콧수염 아래에 어떤미소가 숨어 있는지 배우는 데 40년이 걸렸다. 아, 잔인하고 쓸모없는 오해여!
살아있는 고전이자, 디스토피아계의 전설같은 조지 오웰의 <1984>.
이번에는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 컬렉션으로 김승욱 역자의 글로 읽어봤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은 언제 읽어도 마치 어제 막 나온 책처럼 우리에게 말을 거는데, 조지 오웰의 책이 항상 나에게는 그렇다.
너무나 유명하지만 조지 오웰만의 언어로, 사상으로, 가치관으로 이 시대에 1984를 다시 읽어보며 많은 것을 느껴본다.
어느 날 주인공 '윈스턴'은 부스스한 몸을 일으켜보며 하루를 시작해보는데 이 날은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 물론 그와 함께 하는 하루는 우리를 언제나 어디서나 지켜보는 빅 브라더와 함께다. 그런 그에게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느껴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의식이 생기면서 그러면 안되는 것, 일기를 쓰게 된다. (세상에 고작 펜으로 종이 공책에 쓰는 일기 조차 안된다니!)
1984를 읽으면서 이게 안된다고? 이걸 지켜야한다고? 이게 맞다고? 하는 물음들이 떠오르는데 만약 내가 <1984> 속 시대와 환경에 살았다면 2+2를 4라고 하지 않고 5라고 믿는 그런 세상에서 나만의 줏대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땐 그런 시대였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어느 면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1984> 속에는 신기한 신어도 있고, 전쟁과 예속과 무지를 찬양하는 강령도 있으며, 사상경찰, 텔레스크린, 헬리콥터, 마이크로폰 등 <1984> 속 인물들을 아주 철저하고 처절히 감시하는 존재들로 자유 없는 삶을 살게 만든다.
과연 인간은 자유 없이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며 살 수만은 없다.
바로 '윈스턴'은 어떠한 결심을 하고 행동에 나서는데 고작 작은 일기장 하나로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위험과 감시와 그 속에서도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거리들을 만난다.
<1984> 책이 놀라운 건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쓴 바로 이 책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철저히 통제되는 빅 브라더의 시선이 과연 지금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보고 듣고 믿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
생각의 자유가 없는 전체주의는 결국 하나의 고정된 시야만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우리 곁의 '평범한 사람들'이 깨어나는 그 순간, <1984> 속에 담긴 경고의 힘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984 문예 에디터스 컬렉션이 출간되었다. 문예 에디터스 컬렉션은 《동물농장》 《멋진 신세계》 《구토》 《이방인》 《데미안》 《그리스인 조르바》 등 걸작 중의 걸작이 모여있다.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도 소장하고 읽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엄선한 작품이라는 것을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고,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명작들이니 더욱 관심이 생겼다.
그중 특히 이 책에 대한 소장 욕구가 발동한 것은 예전에 1984를 읽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미래를 예상할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데, 지금 보아도 전혀 어색함이 없이 오히려 더 맞아떨어지는 데에서 느껴지는 전율이 있다.
세상에는 소설이 정말 많다. 어떤 소설은 제목조차 생소하며 내 눈길을 받지 못하는 소설이 있고, 한 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는 소설이 있고, 한 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이 있으며, 주기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은 주기적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서 '아니, 이 장면은 이런 의미인 것 같은데… 우와, 이런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면 소름이 쫙 돋는다. 조지 오웰 정말 천재 아니야?
이번에도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어보게 되었다. 표지 그림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에 시선을 잡아끈다.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
전체주의 세계의 공포를 치밀하게 묘사한 20세기 디스토피아 문학의 걸작
《1984》를 읽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 책의 저자는 조지 오웰(1903~1950).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1945년에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우화 《동물농장》을, 1949년에 전체주의의 철저한 통제하에 지배되는 미래 세계를 그린 소설 《1984》를 출간했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런던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1950년 1월 21일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책날개 중에서)
이 책의 특이사항은 들어가는 말에 조지 오웰의 국내 미발표 서신을 수록했다는 점과 나가는 말에 에리히 프롬의 후기를 담은 것이다.
같은 소설이라도 번역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소설 본문 외에 어떤 볼 거리가 더 담겨있느냐에 따라 흥미로움이 배가 된다.
*이 글은 에리히 프롬이 1961년에 쓴 《1984》의 후기로, 한국어로 번역한 이 글의 전문을 이 책에 수록하여 처음 소개한다(편집자 주) (466쪽)
내 생각에는 에리히 프롬의 후기를 담은 것만으로도 이 책의 특별함이 있다.
같은 소설도 독자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느끼게 마련인데, 에리히 프롬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에리히 프롬의 후기가 담겨 있어서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만약 독자가 《1984》를 야만적인 스탈린 시대를 묘사한 많은 작품 중 하나로 잘난 척 해석해버리고 이 작품이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일이다. (483쪽, 에리히 프롬)
먼저 이 책에는 들어가는 말에 '1944년 노엘 윌멧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조지 오웰이 《1984》를 집필하기 3년 전인 1944년에 노엘 윌멧에게 쓴 편지로 조지 오웰 연구의 권위자 피터 데이비슨이 수집 및 편집한 조지 오웰 서간집에 처음 수록되었다고 한다.
편집자는 조지 오웰이 《1984》를 집필한 이유가 담긴 글로 평가받는 이 편지를 이 책의 '들어가는 말'로 수록했다고 밝힌다.
이 소설을 읽어나가기 전에 일단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작해야 한다. 때로는 귀신이나 살인사건이 나오는 것보다 현실 자체가 더 공포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이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층계참마다 승강기 맞은편 벽에서 포스터 속의 거대한 얼굴이 앞을 응시했다. 그 얼굴을 그린 방식이 독특해서, 사람이 움직이면 눈이 그 사람을 좇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보고 있다.' 얼굴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16쪽)
이 책에 나오는 '빅 브라더'를 지금의 우리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것을 생각해냈는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우리나라에는 흑백텔레비전조차도 1966년에 처음 나왔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때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느낄 수 있는 현실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다. 그래서 어쩌면 현실에서 당연한 수순으로 순응할지라도 다른 시각으로 볼 때 소름 끼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결말을 알고 보아도, 아니 알고 보니 더욱 놀랍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디스토피아 소설.
모두가 단 한 번이 아니라 10년마다 다시 읽어야 할 책
_<CNN>
오웰의 이야기 중 적어도 4분의 3은 '부정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다.
_움베르토 에코
다시 읽은 이 소설은 지금의 나에게도 역시나 소름 끼치는 전율과 현실 자체의 모습에서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미래의 나에게는 또 어떻게 다가올지, 이 책은 정말 주기적으로 다시 펼쳐들고 싶어진다.
특히 1984 문예 에디터스 컬렉션에는 에리히 프롬이 알려주는 조지 오웰 《1984》 읽는 법이 수록되어 있으니 더욱 관심 있게 읽어볼 수 있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생각보다 더 절망적인 공포소설이었다. 고문과 결말도 그렇지만, 어쩌면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피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과 어디선가 과거에 혹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을 리얼함이 특히 끔찍하게 다가왔다. 먼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경고를 보낸듯한 작가의 통찰력이 놀라웠다. 마치 미래를 보고 과거에 가서 쓴 것만 같았다. 혹시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몇 국가들의 누군가들이 이 책을 참고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많이 비교되곤 한다. 둘 다 읽은 입장에선, 절망적으로 끝나는 두 소설이 다 매력적이고 흥미로웠지만 1984가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거 같다. 리얼해서 상상이 더 잘 되었달까.
여러 철학적 주제를 던지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1.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개인의 삶은 인류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진실과 거짓 / 나와 세상의 경계는 어디일까. 생각과 행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극단적으로, 뇌를 이식받은 사람은 이전과 같은 사람일까.
3.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나 계급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 가능할까.
4. 증오가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 현대사회에서는 2분 증오 시간이 따로 없어도 스스로 증오할 대상을 찾고 서로 혐오하는데..
5. 언어와 생각의 상관관계 - 여러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인격이 여러 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언어와 사고는 연관성이 크다는데, 이를 반영한 듯이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하기 위해 신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는 발상이 놀랍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스스로 언어를 파괴하고 제한하며 생각을 가두고 있는건 아닐까.
6. 자유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상적인 구절들
그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그녀가 젊고 예쁘고 성에 냉담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 침대에 들고 싶은데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왜 그들은 중요한 일에 대해 이렇게 소리치지 못하는가?
의식이 생기기 전에는 그들이 봉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봉기하기 전에는 의식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훤히 알 수 있는 것, 어리석은 것, 진실한 것을 반드시 옹호해야 했다. 자명한 이치는 진실이다. 그것을 잊지 마라! 진짜 세상은 존재하며, 그 세상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 자유는 2더하기 2가 4라고 말할 자유를 말한다.
우리는 죽음을 가능한 한 뒤로 미루려 하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달라질 건 거의 없어. 인간이 인간인 한, 생과 사는 같은 거야.
계급사회는 빈곤과 무지라는 바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산업의 바퀴를 계속 돌리면서도 세계의 부를 늘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재화는 반드시 생산해야 했으나, 그것을 국민들 사이에 퍼뜨릴 필요는 없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지속적인 전쟁밖에 없었다.
지금은 지배자들이 서로 싸우지 않는다. 지배 집단이 백성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뿐이며, 전쟁의 목적은 영토의 정복이나 적의 침범 저지가 아니라 사회구조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달라졌다. 전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전쟁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편이 아마 정확할 것이다.
당은 가족의 유대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면서, 가족의 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이름으로 지도자를 부른다.
나보다 머리가 좋고, 내 말을 공정하게 들어준 다음에 그냥 자신의 미친 논리를 고집하는 미친놈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야. 혁명을 지키기 위해 독재체제를 확립하는 사람은 없다. 독재체제를 세우려고 혁명을 하는 거지. 박해의 목적은 박해 그 자체야. 고문의 목적은 고문 그 자체고. 권력의 목적 역시 권력 그 자체다.
지구의 나이는 우리와 같다. 우리 나이보다 많지 않아. 어떻게 우리 나이보다 많겠나? 인간의 의식을 통하지 않으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비하면 신어의 어휘는 극소수였으며, 그 어휘를 더욱 줄이는 새로운 방법들이 끊임없이 고안되었다. 어휘가 해마다 늘어가기는 커녕 오히려 줄어든다는 점에서 신어는 거의 모든 언어와 정말로 달랐다. 선택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생각을 향한 유혹도 줄어들기 때문에, 어휘를 죽이는 것이 이득이었다. 궁극적으로는 고등한 뇌를 전혀 쓰지 않고, 성대로 올바른 발음을 하는 것으로만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