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2022.12.17.
읽었습니다 205
경상말로 ‘깝치다’가 있다는데, 인천에서 나고자란 저도 어릴 적에 익히 들은 말씨입니다. 서울말은 ‘깝죽거리다’인데, 점잖게 “제발 나대지 마라”라든지 “좀 나서지 마라” 하고 말하지요. 안된 말씀이지만,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를 읽으면서 왜 이분은 이렇게 깝죽깝죽일까 싶어 아리송했습니다. 이제 막 서울을 벗어나 시골에 깃들었으면서, 고작 한 해 만에 ‘시골하루(촌생활 일기)’를 낸다니, 너무 철없구나 싶어요. 더구나 스스로 시골집을 찾거나 헤아리거나 가꾸는 길이 아닌, ‘이미 시골에서 터를 다 잡은 사람들이 내어준 자리를 손에 물 한 방울도 흙 한 줌도 안 묻힌 채 얻어서 글만 쓰는 길’로 ‘시골하루’를 쓴다니, 도무지 시골사람한테는 안 와닿는 글투성이입니다. 소설 한 자락을 며칠 만에 써내더라도, 글님으로서 온삶을 보낸 숨결이 있게 마련입니다. 시골하루를 쓰고 싶다면, 제발 ‘열 해 동안 조용히 맨손 맨발 맨몸으로 숲을 마주한 뒤’에 쓰기를 바랍니다.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김탁환, 해냄, 2022.4.25.)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내 연배라면 아마 학창 시절 과제로 주어졌던 일기쓰기를 기억할 것이다.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뒤늦게 있었던 일 없었던 일을 긁어모아 글을 쓰고, 대체 그날의 날씨가 어떠했던가를 머리를 쥐어짜며 기억하려 들었던 순간이 즐거웠다 말하는 이는 별로 없지 싶다. 과제 검사로부터 해방되기가 무섭게 일기쓰기를 관뒀던 건 당연한 일이다. 글은 종종 썼으나 굳이 내 일상을 기록하려 들진 않았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방식이 아닌 펜을 들고 수첩에 비뚤빼뚤 글씨를 적기란 생각보다 고됐다. 빠름에 익숙해진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났는데 나의 더딘 손놀림은 사고를 따르지 못했다.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한 게 아님에도 가끔은 귀찮다는 이유로 건너뛰기도 하였다. 꾸준함을 재능으로 보긴 힘들 터이나 모두에게 허락되는 건 아님을 배웠다. 밋밋한 나의 일상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는 일 역시 쉽지가 않았다. 일기를 남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주객전도와도 같은 일을 벌여야 하나 고민도 했더란다.
내게 떠오르는 건 섬진강뿐인 ‘전남 곡성’. 나날이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 위기 소리를 듣는, 도시라 표현하기 어려운 곳으로 저자는 떠났다. 글의 소재를 찾아서, 집중력 발휘가 가능한 공간에 머물고자. 작가에게는 떠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있기 마련이나 어디까지나 작품 구상과 연관이 있을 때의 일이다. 저자처럼 원 거주지에서의 삶을 아예 정리하고 이동하는 경우는 드물지 싶다.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아도 섬진강변에서의 삶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좋은 사람들이 그 곳에 있었다. 하지만 막연한 동경에만 기댄다면 힘들 수밖에 없다. 그는 몸소 농사를 지었다. 땅을 다지고 씨앗을 심어가며 자연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초보 농사꾼의 농사는 수월치 못했다. 시행착오가 이어졌지만 지치지 않았던 건 농사는 사람의 영역이 아닌 하늘의 도움에 따른 것임에 일찍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허나 조금은 쓸쓸할 것도 같은 집이 안식을 제공했다. 동네를 떠돌던 길고양이들이 기꺼이 그의 벗이 되어 주었다. 그 중에는 자연스레 나이 들어 움직임이 더뎌진 녀석도 있었다. 볕 좋은 날이면 엎드려 움직일 줄 모르는, 다가서도 인지 못한 채 휴식에 여념이 없는 녀석은 비록 인간은 아니었으나 삶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함은 아니었을 텐데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빼곡하게 들어찬 책은 알찼다. 타인의 삶을 엿본다는 쾌감에 취해 시작된 독서는 어느 시점부터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따르는 느린 걸음과도 닮은꼴로 진화해 나아갔다. 농사에 일가견 있다는 이로부터 받은 꽃씨가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색의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오래도록 버림받았던 공간에 사람들이 오가며 들어찼을 온기를 상상했으며, 열 명 남짓한 지역 주민들이 인내심을 발휘해가며 끝끝내 저자가 준비한 과정을 모두 소화해내고 느꼈을 희열에도 동참했다. 여전히 내겐 낯선 장르인 판소리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품게 됐다. 우리의 것이지만 재미라곤 몰랐고, 더구나 아무나 즐기는 것 아니라며 멀리하기까지 해왔다. 비록 소리 아닌 글로 접했으나 마냥 높았던 장벽이 조금은 허물어진 듯했다. 얼굴 아닌 발에 탈을 쓰고 표현하는 일이 필요로 할 정교함을 고민하는 일도 즐거웠다. 섬진강 옆이라 가능했던 일일까. 시간을 잊은 듯 흐르는 강줄기와 닮은 삶이었다.
오로지 사람만 고려하고 사람의 안위만을 중시하는 이제까지의 삶과 곡성에서의 삶은 달랐다. 저자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위해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무(無)의 실천에 대하여 설파했다. 40분 글을 쓴 후 맞이한 20분의 달콤한 휴식, 논두렁을, 강변을 거닐며, 스스로 시간을 머금은 채 성장하는 작물들을 바라보며 그가 살아낸 시간들이 부러웠다.
섬진강가는 기(氣)가 좋은 곳인가보다.
내가 알기로 그 근처에 사는 문인들이 꽤 많다.
맑고 밝고 글감이 넘치는 곳이라는 뜻인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대개 저자에 대해 궁금증이 있고 가끔
독자와 만나는 시간이 있으면 달려가곤 했던 나로서는 저자는 그저 책으로만
만나는 일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이미지와 영 다른 모습이 느껴지면 왠지 배신감이
든다고 할까. 그럼에도 소설보다는 이런 에세이집에서 더 가깝게 저자를 만날 수
있어 좋다.
프로작가들은 대개 자신만의 집필실을 가지는 모양인데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던
글쓰기 터가 곡성이란 시골로 옮겨가면서 쓴 1년간의 일기가 퍽 평화롭다.
짦은 시간동안 시골의 넉넘함이 그새 담겼던가 보다.
글쓰기 한 시간 하늘보기 한 시간 텃밭에서 풀뽑고 강아지랑 산책하고...신선놀음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더불어 주변에 좋은 지인들이 많아서 참 행복해보인다.
동네글방을 열어 글쓰기도 가르치고 세상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쓰고 싶은 글도 쓰고..
읽다보니 나와 비슷한 점이 참 많았다. 아버지가 평안도 영변사람이라는 것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도..그리고 시골에 내려와 시골살이를 하는 것도.
나는 뭍으로 나가는 일이 퍽 어려운 곳이어서 외로움을 많이 견뎌야 하는 것은 좀 다르다.
세상을 달관하여 살아간 조선의 광대 달문이 좋아 집필실의 이름을 달문이라 했다던가.
작가라는 일이 그렇다. 세상에 속하였으되 조금은 세상위에 서서 달관하듯 살아야하고
때로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들여다봐야하는 그런.
그래서 담아야 할 것 들이 너무 많아 쉽게 지치기도 하는.
글이라도 써서 덜어내댜 살아갈 수 있는 그럼 사람.
그래서 그걸 읽는 우리들은 닿지 못한 세상과 만나고 행복해지는 그런 시간들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