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싯셔 켈린치 홀에 사는 월터 엘리엇 경이 재미 삼아 보는 책이라고는 준남작 명부뿐이었다. 명부를 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위안을 얻기도 했다. 몇 남지 않은 오래전 선대의 특권들을 들여다보자면 감탄과 존경의 마음이 솟아났다.
(p.7)
월터 엘리엇 경은 허영심을 빼면 시체나 다름없었다.
(p.9)
제인 오스틴(1775~1817)의 마지막 작품 《설득》은 주인공 앤의 아버지 월터 엘리엇 경이 준남작 명부를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오스틴이 활동하던 18세기~19세기 초 영국은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척으로 신흥자본가와 군인이 유력 계층으로 떠오르고 시류에 적응 못하는 옛 귀족들이 영향력을 잃어가던 시대였다. 구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고 계층 이동이 활발하던 시대에 맨 끄트머리 귀족인 준남작 작위에 매달려 위안을 얻는 월터경의 모습은 작품 전체의 줄거리와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월터경은 준남작 지위에 위안을 얻는 허세 가득한 인물이지만 실상은 물려받은 저택도 유지하지 못해 남에게 내주고 작은집으로 이사해야하는 처지다. 일찍 상처한 그에게는 세 딸이 있다. 엘리자베스, 앤, 메리. 부친을 닮아 허영심이 많은 큰딸 엘리자베스나 막내 메리와 달리 둘째 앤은 고귀한 정신과 다정한 성품을 지니고 생각이 깊지만 가족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된다.
이야기는 둘째 앤의 사랑과 결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앤은 과거 초급장교이던 엔트워스 대령과 약혼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헤어진 적이 있다.
이유는 엔트워스 대령의 가문이 보잘 것 없고 가난하다는 것.
둘의 애정이나 상대 남성의 성실성, 장래성 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지만 앤의 주변 사람들은 과거에 머물러있고, 아직 어리고 미숙한 앤은 그들을 설득할 힘이 없었다.
그 후 8년의 시간이 흐르고 앤은 여전히 미혼이다.
스물 여덟. 여성의 자립이 불가능한 시절, 정상적인 결혼을 할 수 있는 끝자락 나이.
앤 앞에 과거의 연인 엔트워스 대령이 나타난다. 섬세한 성품과 근사한 외모, 초급 장교 시절과 달리 이제는 재력과 지위까지 갖췄다.
하지만 헤어진 연인이 오해를 풀고 진심을 마주하기에는 쉽지 않은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다.
젊고 예쁜 아가씨 루이자가 엔트워스 대령과 친해지고 앤에게는 엘리엇가의 한사상속인 엘리엇씨가 접근한다.
몇몇 커플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작품 속에 묘사되는 18세기~19세기 초반 영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엔트워스 대령의 가문이 보잘 것 없다는 이유로 앤과의 결혼을 반대하던 월터경이 8년 만에 태도를 바꾸는 걸 보면 당시 영국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부유해져 과거와는 조건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귀족 작위에 집착하던 월터 경의 변화는 극적으로 보였다.
외양으로는 단순한 연애 소설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기는커녕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어 사랑받고 있다.
200년도 더 지난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제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저도 나이를 먹었고요. 예전에 설득에 넘어간 것은 저의 실수였다 해도, 그분의 설득은 위험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해주세요. 제가 설득에 넘어갔을 때는 그것이 응당 따라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떤 의무도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요. 오히려 저에게 무심한 남자와 결혼한다면 온갖 위험이 초래될 것이고, 결국 모든 의무에도 어긋나는 일이 될 거예요.”
(p.367)
오스틴이 활동하던 시대 영국의 중상류계급에서는 정략결혼이 대부분이었고, 여성은 남성의 청혼을 기다려야했다. 조신하고 소극적인 성격이 미덕이던 시절에 앤은 원하는 배우자를 직접 선택한다. 미숙함과 용기부족으로 설득당해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앤이 엔트워스 대령과 재회하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은 지난 8년간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착하고 아름답기만 한 캐릭터가 아닌 성장하는 주인공은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성장하는 주인공 앤 외에도 소설에는 매력적인 남주인공이 등장한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엔트워스 대령은 내세울만한 가문 출신이 아니다. ‘알고 보니 어떤 귀족가문의 상속자였다.’라는 말 한마디만 더해졌다면 더욱 완벽한 조건이 되겠지만, 작품 자체는 그렇고 그런 통속소설에 머물렀을 것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남자주인공에게 명문가 설정을 제외하여 더 이상 가문이 중요한 시대가 아님을 강조한다.
또한 윌리엄 엘리엇이라는 속물적인 상속인을 등장시켜 아들 없는 집안의 재산이 딸이 아닌 남자친척에게 상속되는 한사상속제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법인지 독자가 자연스레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 책이 단순히 재미만 주는 소설이 아니라 좀 더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게 만든다.
설득. 독특한 제목이다.
주체성 있는 삶을 찾고, 설득당하는 자가 아닌 설득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비혼녀 제인 오스틴의 다짐이 보이는듯하다.
제인 오스틴 작품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도장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오만과 편견 드라마를 보고 나서 였습니다. 각 인물들의 캐릭터 구성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통찰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을 읽게 되었고 그 다음에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 설득이 스토리라인이 끌려서 고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출판사 가운데 이 출판사에서 현대에 맞게 번역을 했다는 소개글을 읽고 궁금한 마음에 구매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