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고(楊萬古, 1574∼16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봉래 양사언의 장자이다. 그는 광해군 때 중년으로 알성문과에 급제한 이래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81세로 졸서하였는데, 그의 생애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1세에 선친을 여의고, 19세 때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45세 때는 인목대비 폐비 사건이 있었으며, 63세 때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71세 때는 인천부사에 부임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개국 등으로 관료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정황이었다. 그가 선조·광해·인조·효종 네 임금의 치하에서 관료로 있었다는 사실도 평탄치 않은 생애를 시사한다. 그는 선친 양사언의 영...
양만고(楊萬古, 1574∼16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봉래 양사언의 장자이다. 그는 광해군 때 중년으로 알성문과에 급제한 이래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81세로 졸서하였는데, 그의 생애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1세에 선친을 여의고, 19세 때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45세 때는 인목대비 폐비 사건이 있었으며, 63세 때는 병자호란을 겪었다. 71세 때는 인천부사에 부임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개국 등으로 관료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정황이었다. 그가 선조·광해·인조·효종 네 임금의 치하에서 관료로 있었다는 사실도 평탄치 않은 생애를 시사한다. 그는 선친 양사언의 영향을 받아 서예와 문장에 두루 능하였다.
현존하는《감호선생집》은 시집 권1, 권2가 결본으로 완질본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작품이 한시 1,168수와 산문 20편에 달한다. 이처럼 많은 작품이 현존하면서도 양만고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편이다. 그간의 연구가 부진했던 이유는 원전자료인《감호선생집》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학박사. 해동암각문연구회 회장. 강남대학교 명예교수.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것이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단국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편찬원으로 근무하였다. 강남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이래 학보사주간, 출판부장, 인문과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을 역임하고, 포은학회장, 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등도 역임하였다. 현재 강남대 글로벌인재대학 학장, 해동암각문연구회 회장으로 있다. 특히 지역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용인·이천·포천·안성 등 경기지역의 향토문화연구에 30여 년을 보냈다. 연구...
문학박사. 해동암각문연구회 회장. 강남대학교 명예교수.
용인 토박이다. 어려서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것이 성균관대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단국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양학연구소에서 한한대사전편찬원으로 근무하였다. 강남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한 이래 학보사주간, 출판부장, 인문과학연구소장, 인문대학장을 역임하고, 포은학회장, 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등도 역임하였다. 현재 강남대 글로벌인재대학 학장, 해동암각문연구회 회장으로 있다. 특히 지역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용인·이천·포천·안성 등 경기지역의 향토문화연구에 30여 년을 보냈다. 연구성과물이 지역과 연관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성현문학연구』, 『양사언문학연구』, 『박은시문학연구』, 『한국고전문학의이해』, 『향토사연구의이론과실제』, 『이천의 옛노래』, 『용인학』 등 60여 책을 냈다. 번역서로 『읍취헌문집』, 『봉래시집』, 『허백당집』, 『부휴자담론』, 『진일재유고』, 『용재총화』 등 10여 책이 있다. 짬이 나면 글 쓰는 일도 즐긴다. 산문집 『탄자와 걷는자』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