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호는 다산(茶山)이다. 1762년 경기도 광주부(현재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하여 28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789년 대과에 급제한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 생활을 했다. 곡산부사,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 과학, 지리 등에도 밝아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 승하 후 당시 금지되었던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벽파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1801년(순조 1년)에 강진으로 귀양을 갔으며, 무려 18년에 걸친 귀양살이 동안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1836년 별세하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백여 권의 책을 썼다.
한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과 근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구해왔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저술을 꾸준히 탐독하며 현대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찾는 데 힘쓰고 있다. 고전의 지혜를 오늘의 독자들이 쉽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한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과 근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구해왔다. 특히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저술을 꾸준히 탐독하며 현대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찾는 데 힘쓰고 있다. 고전의 지혜를 오늘의 독자들이 쉽고 생생하게 만날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했다. 일반상담사이자 중독상담가, 홀로트로픽 숨치료 전문가로 활동하며 마음의 감옥에 갇힌 수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또한 출판기획자로 1천 종이 넘는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치열한 삶의 현장을 지켰다. 상담 현장과 비즈니스 세계에 있으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관계라는 파도에 휩쓸려 자기 자신을 탓하며 서서히 소멸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는 타인의 인정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지우는 습관을 멈추고, 무너진 경계를 재건하해 인생의 주권을 되찾아 야 한다고 강조한다. 엮은 책으로 『몽테뉴의 수상록』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카뮈의...
대학과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했다. 일반상담사이자 중독상담가, 홀로트로픽 숨치료 전문가로 활동하며 마음의 감옥에 갇힌 수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또한 출판기획자로 1천 종이 넘는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치열한 삶의 현장을 지켰다. 상담 현장과 비즈니스 세계에 있으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관계라는 파도에 휩쓸려 자기 자신을 탓하며 서서히 소멸해간다는 사실이다. 그는 타인의 인정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지우는 습관을 멈추고, 무너진 경계를 재건하해 인생의 주권을 되찾아 야 한다고 강조한다. 엮은 책으로 『몽테뉴의 수상록』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카뮈의 인생 수업』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인생 수업』 『세네카의 행복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