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우리 둘이 서로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의 아내를,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죽이는 거죠. 우린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으니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완벽한 알리바이라고요!" p.37
건축가 가이는 3년째 별거 중인 아내 미리엄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이혼을 하려고 마음먹게 된 건 미리엄이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고, 그와 결혼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가이 역시 현재 교제 중인 앤과 결혼을 하고 싶었기에 이혼을 해야만 했다.
가는 동안 기차에서 책을 읽으려던 가이는 자세를 바꾸려다 맞은편에 앉은 젊은 남자를 건드리게 됐는데, 그때부터 그 남자 브루노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혼에 대해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고 싶었던 가이는 브루노를 거절했지만, 그는 자신의 특별 전용실이 조용하다면서 함께 가기를 권했다. 가이는 계속 거절을 하기가 뭐 해서 브루노를 따라가게 됐다.
조용한 특별실에서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됐다. 가이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미리엄과의 이혼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고, 브루노는 증오하는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브루노는 가이에게 상대가 증오하는 사람을 서로 죽여주면 되겠다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미리엄을, 가이는 브루노의 아버지를 죽인다면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거라면서 말이다. 브루노의 제안에 가이는 놀라고 당황하여 거절의 뜻을 내비친 뒤 기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이는 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미리엄이 놀이공원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분명 브루노의 짓일 거라 확신했는데, 그때부터 가이는 브루노에게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자신이 미리엄을 죽였으니 가이가 브루노의 아버지를 죽일 차례라고 말이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바라던 일을 이룰 뿐 아니라 친구에게도 도움이 되는 살인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친구를 위해 하는 일이었으므로 몹시 기뻤다. 그리고 그에게 희생될 그녀는 죽어 마땅했다. 그는 앞으로 그녀를 만나게 될 많은 남자들을 구제해 주는 셈이었다! 브루노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현혹되었고, 아주 오랫동안 기분 좋게 술에 취해 있었다. p.82
가이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그의 전체적인 자아도, 브루노도, 그의 업무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반쪽 자아였다. 그는 그 반쪽 자아를 때려 부수고 지금의 자아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p.239
개인적으로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가깝게 지내는 아는 사람에게 말하기보다는 한 번 보고 말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속을 털어놓으면 좋을 때가 있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전제조건이 붙어야겠지만 말이다.
가이가 브루노에게 미리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브루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진 인간이었다. 자신이 혐오하는 아버지가 있고, 가이에겐 미리엄이란 존재가 있으니 서로 대상을 바꿔 살해하면 되겠다는 기이한 논리를 펼쳤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이가 경악하는 건 당연했다. 미리엄이 골치를 아프게 만들기는 하지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라 결혼까지 했었는데 죽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이는 거절 의사를 내비치고 기차에서 내렸지만 브루노는 거절이라는 뜻을 받아들일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부정보다는 긍정의 뜻으로 알고 미리엄을 어떻게든 찾아내 죽이게 됐으니 말이다.
미리엄이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불리해진 건 당연히 가이였다. 두 사람이 이혼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별거 중에 미리엄이 바람을 피워 임신했다는 사실 또한 알려진 것이었다. 남편의 입장에선 살의가 생길 수 있는 상황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다행히 가이는 앤과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함께 있었기에 알리바이가 확실했던 덕분에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부터 브루노의 압박이 시작되어 가이는 미리엄이 죽기 전보다 더 골치가 아파졌다. 브루노는 자꾸만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해대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경찰에 교환 살인에 대해 말할 거라고 협박을 했다. 거기다 앤에게까지 편지를 보낸 탓에 가이의 괴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가이는 브루노를 달래기도 하고 화를 내 보기도 하지만 그는 포기하질 않았다. 오히려 살인을 한 후에 가이를 자신의 소울메이트, 잃어버린 형제 내지는 반쪽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서로 닮았다면서 말이다. 브루노의 끈질긴 압박에 가이는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죽이게 되면서 끝인 줄 알았지만 절대 끊어낼 수 없는 관계라는 게 더욱 분명해졌다.
"가이가 늘 말하는, 모든 것에는 이중성이 있다는 생각이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나란히 있다는 생각, 모든 결정에는 그에 반대되는 이유가 있죠.
(…중략)
사람들, 감정들, 모든 것이 이중적이라는 거죠. 개개인의 마음속에 두 사람이 있는 거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일부처럼 당신과 정반대인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죠." p.323
여기서부터 놀라웠던 건 가이의 심리였다. 기차 안에서 교환 살인이라는 브루노의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땐 경악하며 그런 제안을 한 그를 벌레 보듯 했었다. 그런데 브루노가 자꾸만 찾아와 압박을 가하자 가이는 마음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를 죽인 뒤에는 마치 브루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브루노라는 존재가 가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욕망을 끄집어냈다고 말이다. 이로 인해 가이는 욕망에 충실한 자아와 정직한 자아가 대립을 벌이게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브루노는 가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과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일 테고, 가이를 구제해 주기 위해 혹은 일깨우기 위해 미리엄을 죽인 것일 수도 있었다. 이후에는 아버지를 처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이가 자신과 같은 사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인해 그를 압박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낯선 타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점점 비슷해지는 것 같은 묘한 상황이 긴장감 있게 흘러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끝내 달랐던 건 범죄를 잘못된 것으로 인지하느냐 아니냐에 따른 결말일 것이다. 혼란스러움으로 인생 전체가 뒤흔들린 가이가 그나마 브루노보다 나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놀랍게도 데뷔작이라고 한다. 첫 소설이 이렇게 대단한 작품이라니 천재적인 작가였음에 분명한 것 같다.
이 소설의 저자는 스무 편이 넘는 작품이 영화화된 작가이자 데뷔 후 60년 사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현재까지도 영화인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다 그녀의 놀라운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첫 작품임에도 출간 1년 만에 하드보일드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가 이 작품을 각색하여 시나리오를 쓰고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이 연출하여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이 탄생했다
최근에는 데이빗 핀처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소식이 전해졌다 하이스미스는 서로가 증오하는 대상을 처치해주는 교환 살인이라는 소재 살인 계획인 실행되면서 펼쳐지는 갈등 양상 인물들 사이의 팽팽한 감정선 등을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그려낸다 동시대 작가들뿐만 아니라 영화인들까지도 그녀의 작품에 빠져드는 이유다
달리는 열차 속 우연히 맞은편에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된 두 남자 브루노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가이는 곧 이혼할 아내가 거슬린다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자 브루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이라며 교환 살인을 제안하고 그럴듯한 논리에 공포를 느낀 가이는 도망치듯 열차를 빠져나온다 얼마 후 놀이공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가이의 아내 아내의 소식에 가이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왔음을 느낀다 아내를 죽인 범인이 브루노임을 알게 된 가이는 이제껏 쌓아 온 명성이 위태로워지고 재혼할 애인과의 관계도 어색해지며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 이러한 과정이 독자의 가슴을 옥죄며 치밀하게 그려지고 이와 동시에 브루노의 사이코패스적 욕장이 방백과 행위를 넘나들며 거침없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