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레 요코 저/이소담 역
한귀은 저
이규영 저
무레 요코 저/이소담 역
10월의 마지막 날. 10월 31일. 무슨 규칙처럼 종일 어딜 가도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계속 들려오는 날에, 누군가와 헤어진 적이 있다. 갑작스러운 건 아니었다. 경험해본바, 원래 대부분의 일에는 전조가 있다. 어떤 연인이 오늘 싸우고 헤어졌다고 해서 그게 충동적인 이별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 싸움이 이별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일 뿐. 그날, 그렇게 헤어지기까지 쌓아놓은 이별의 조각들이 있었을 거다.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겠지. 생각보다 담담할 것 같았는데, 온종일 서늘한 노래가 들려와서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마음을 부추겼던 듯하다. 뭔가 출렁이기 전에 잠재워야겠다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학교 근처의 작은 서점. 일반도서보다는 수험서나 전공서적이 서가를 가득 채우며 특별 분야를 편애하던 서점이다. 그 안, 한구석에 마련된 문학 코너에 꽂혀 있던 몇 권 안 되는 시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잠깐 서서 읽기에는 소설보다 시집이 낫겠다 싶어 한 권 꺼내 들어 펼쳤다. 뭔가 잔뜩 사랑의 말, 이별의 언어로 채워진 시였는데, 누구의 시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기억만 있다. 오히려 서점 안 스피커를 타고 흐르던 노래가 더 귀에 들어왔다. 어찌 되었든 이별은 슬픈 일인데, 어떻게 그 순간에도 슬픈 노랫말 같은 시 구절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있던 건지. 시에 대한 불편함은 실연한 여자 코스프레도 못하게 했던 거다. 안타깝게도...
시를 얘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시가 어렵다고 말한다. 시가 정말 어려운가? 시가 어렵다는 생각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중 · 고교 시절, 시험을 치기 위해 시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상징이니, 은유니, 직유니, 주제니, 구성인, 감정이입이니, 시적화자니, 이런 것들로 시를 괴롭히고 시 읽는 사람들을 괴롭혀 놓았으니 시가 쉽고 친숙할 수 있겠는가? (5페이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 정호승 외)”
시를 불편해하고 다 이해하지 못했던 짜증으로 멀리했던, 차마 내 입으로 대지 못할 핑계를 이렇게 콕 찍어준다. 『시 읽기 좋은 날』의 저자 김경민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를 시로 대하지 못하고 시험문제로만 대했다. 군데군데 중요한 부분 밑줄 쫙, 구절의 숨은 의미를 찾아서 별표 팍팍, 참고서에서 알려준 대로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외워야만 했다.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뭔가 공감하고 싶은 과정이 모조리 생략된 채로 시를 대했으니 시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그때보다 몇 살 더 먹고 이십 대가 되었다고 해서 시를 대하는 마음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더군다나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시를 더 접할 일이 뭐가 있었겠나. 전공이 아닌 다음에야...
김경민은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붙였다. 교과서에 실린 시로 ‘감성과 통찰을 느끼기에 중고등학생들이 그 나이에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기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직접 시를 가르친 교사였으니 현장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터다. 무슨 말인지 알 듯하다. 똑같은 경험을 하거나, 시간이 흘러야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좀 더 세상을 보고 배우면서 겪은 굳은살이 알게 해주는 것. 그 나이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강요하니 공감하기는 더 힘들었을 거다. ‘아이 때 읽은 고전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그때와 다른 시선이 생기더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권한다. 어른이 되어 시를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고. ‘詩가 이렇게 따뜻한 것’임을 알게 될 거라고, 그 아름다움에 반할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저자가 들려주는 시 50편이 담겨 있다. 그중 절반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시다. 그 시를 다시 만나볼 좋은 기회, 삶의 결정적 순간에 시가 우리와 함께 한 찰나를 포착해 글로 전한다. 울고 웃는 일상 속에서, 배우고 알게 되는 성장 속에서,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는 부대낌 속에서 함께 하는 시를 건넨다. 저자만의 사유다. 고정되고 강요되는 해석이 아니다. 그 시를 만났던 그 순간의 느낌이나 단상이 채워졌다. 그게 전부다. 자신만의 감정이 그 시에 찍히는 타이밍을 고스란히 들려준다. 이 시와 저자의 사유가 그대로 건너와 뭔가 한 마디 더 건네고 싶다면, 내 안의 감정이 동요되고 있다면, 그거면 된 거다. 그때부터 나만의 이야기를 쓰면 되니까.
내게서 나가는 시선. 사랑, 이별, 관계.
내게서 나가는 타인을 향한 시선으로 공감하는 시어. 사랑을 말하고, 이별을 공감하며,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우리의 일상을 이룬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다가오는 발자국에 쿵쿵거리는 가슴을 기억한다.(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약속시각이 다 되어가는 그 똑딱임은 단순히 시계 초침 소리가 아니라 심장이 뛰는 소리다. 사랑의 순간만큼은 시계 초침 소리가 ‘똑딱똑딱’이 아니라 ‘두근두근’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사람의 자세는 희생이 아니라 자존심일 수도 있다.(진달래꽃 / 김소월) 사랑이 끝난 사람의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기억해야 할 자신의 역사 같은 것. 사랑은 끝났으나, 그 사랑의 기억은 고결할 것이기에.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이의 의미를 생각해본다.(꽃 / 김춘수)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한다. 가족, 친구, 동료, 또 그 이상의 여러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 그 말들이 가진 공통점은 관계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필요 없는 단어들일지도 모르지만, 관계로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소통이 고민과 노력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말하는 강은교의 시(사랑법 / 강은교)는 집착이 아닌 침묵의 시간을 허용하는 듯하다. 사랑의 범위가 다양하다는 전제하에 이 말은 여러 관계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관심, 타인의 고통에 관해 함부로 단정하지 말 것. 그건 우리가 이루는 가장 기본적 관계인 가족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게로 들어오는 시선. 나, 내 마음, 나를 이루는 것.
누군가를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위험하다. 그 위험에 가장 크게 적용되는 건 나 자신이다. 남이 보는 나, 누군가가 말하는 나. 여러 말을 들을 수 있지만 정작 나에게서 듣고 싶은 나에 대한 말은 들을 수 없다. 내 뒷모습도 나는 볼 수 없다. 거울이 비추는 나도 온전한 내가 아니다. 단지 어느 순간, 가끔, 조금씩,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느낄 뿐이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실제와 반대지만 꽤 닮았다고 인정하는, 제대로 보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이 섭섭하다고 말하는 의미를 알 것도 같다.(거울 / 이상) 나를 들여다봐야 할 것은 나 자신인데,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아무런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고통스럽다. 내가 나를 안아주고 보살펴주고 싶은데 잘되지 않음을 느낄 때마다 답답하다. 거울로 마주한 모습이 그래도 나와 가장 닮은 모습일진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그 섭섭함은 더해지겠지. 누군가는 열등감으로 버티고 서 있는 힘을 가지는 듯하고(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누군가는 먼저 가진 웃음으로 눈물의 힘을 누르는 듯하다.(눈물 / 김현승) 무너지는 꿈으로 삶을 버티면서도, 아직 다하지 않은 꿈 때문에 오늘도 버티는 삶이 되어버리는 청춘(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을 떠올린다. 치열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온전히 봐야 하는 이유가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한 꿈을 꺼내야 하기 때문인지도... 신분증에 들어가지 못한 그 꿈이 때로는 삶 전부가 되기도 하며 나를 지탱해주기도 한다는 것. 오늘을 버티는 이유가 된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한 기다림일지도 모른다.
내게서 나가는 세상의 소리. 눈물, 다름, 표현의 용기.
어느 골목길의 구석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내는 목소리는 아니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곧 그것들은 내 것이 된다. 내가 내는 고통의 소리이며, 내가 흘린 눈물이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의 소리인 것이다. 시인은 시로 그 소리를 낸다. 당연의 세계를 당연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아이러니를 꼬집고(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2 / 김승희), 시선의 변화를 유도한다. 영화관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자리에 앉는 것(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이 좌절마저도 허용하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지적한다. 무고함을 알면서도 나서지 못하는 것, 차마 날아갈 수도 없는 존재가 자신임을 절망한다. 그저 주저앉는 것이 그때 할 수 있는 일 전부인 것처럼 여길 수밖에... 어쩌면 당연한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름을 시도하지 않았을 때 오는 고정관념이다. 세상 속에서 그 당연함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 당연함을 만든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일 테다. 그래서 그 당연함을 거부할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 거부의 목소리를 내야 할 때 필요한 건, 용기.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지는(폭포 / 김수영) 물줄기'는 삶을 조금씩 갉아먹는, 에스키모가 늑대를 잡으려 심어놓은 칼날과 같다는 사냥 방식. 자신이 맛보는 피가 자신의 것인 줄도 모르고 계속 핥아대는 순간을 맞닥뜨릴 거라는 경고 같은 거다. 시들이 우리에게 누군가의 울음소리, 누군가의 슬픔을 공유할 자세로 세상에 부대껴야 한다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하나 듣고 보면, 별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다. 그저 은유로 가득한 문장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시를 접하고 보니, 시인이 할 수 있는 말을 시로 전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의 감정을 적고, 세상에 소리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때로는 감정을 추스르는 역할을 시가 하고 있다. 궁핍한 삶을 얘기하고, 혼란한 세상을 한탄한다. 사랑과 이별을 다독이고, 추억을 꺼내 읊조린다. 눈물과 상처에 시가 온기를 불어넣고 있는 거였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가슴을 열어 보여 답답하고 힘든 속내를 풀어놓는 것처럼, 시가 말을 하고 있다. 저자는 그런 시 구절에 자신의 사유를 담았다. 시의 배경이 되는 시간에 했을 법한 고민을 들려주며 역사의 한 때를 설명한다. 그 시간에 그런 시를 읊고 있는 이의 고뇌를 공유한다. 상처와 아픔을 말하는 마음을 토닥거리며 위로를 건넨다. 그때 우리가, 처음 이 시들을 대하고 미처 다 알아채지 못했던 가슴의 울림을 위해서라도 꼭 한 번은 시와 재회해보라고 말한다. 혹시 또 모르지. 사라진 줄 알았던 추억이 떠오를지도, 급하기만 했던 마음이 속도를 조금 늦출지도, 참았던 눈물이 흘러버릴지도...
저자는, 시가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한 말이라고 했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시를 저자의 사유가 함께한 글이 담담하게 만나게 한다. 시의 재해석이 아니라, 시에 각자의 의미를 담으면 그만인 거다. 똑같은 시라도 들려오는 타이밍에 따라 나만의 감정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한 편의 시가 내 사랑을 기뻐해 주고, 이별을 위로해주며, 답답한 마음을 세상에 뿜어주고,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상상에 빠지는 것처럼 시를 읽고 자유롭게 사고'하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가 우리에게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다. 자유로운 사고로 정답 없는 삶의 문제들을 잘 건너갈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갑자기 찾아드는 외로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그리움, 삶의 고단함에 고개 숙일 때, 일상처럼 다가오는 슬픔에도 기죽지 않게 마음 온도를 높여주었으면 좋겠다.
병원 -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시 읽기 좋은 날이 따로 있을까?
그런 날은 따로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시 읽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자주 접하는 생활환경이 아니여서 시가 낯설어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치고 읽다보면 시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운 시들이 다소 나오기에 전혀 거부감이나 거리감은 느낄 수 없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춘수의 '꽃', 이상의 '거울', 이육사의 '절정','광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김수영의 '폭포',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등 시를 즐기지 않아도 학교만 다녔다면 얼마든지 접했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들 아닌가. 게다가 시를 줄줄 외우지 못하더라도 윤동주, 강은교, 서정주, 박재삼, 정호승, 박노해, 김영랑, 도종환 등의 이름도 들어봄직하지 않은가.
문학에, 시에 아무리 문외한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책이다.
모르는 시들만 잔뜩 있었다면 아마 이 책을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시적인 감성을 가지지도 못한 사람이고 열심히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학창시절 열심히 밑줄 긋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던 시들을 어찌 잊을 수 있나.
그나마 그때의 기억으로 시를 읽고, 모르는 시들은 다시 읽고, 또 읽고.
> 괜찮은 시 한편 |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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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찌질해 보여요. 그냥 쿨하게 떠나면 되지 왜 그래요?"
몇 년 전 수업 시간에 이 시(김소월의 '가는 길')에 대한 감상을 물었더니 한 학생이 이런 인상적인 코멘트를 날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이 '쿨함'이 곧 '선함'이 된 듯하다. 쿨하지 못한 태도는 경멸과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분위기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중략)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 사람과의 이별에서 마냥 쿨할 수는 없다. 힘든 상황이라면 충분히 아파하는 사람이 쿨한(더 정확히 말해 남들에게 '쿨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건강하지 않을까. (p.143~144)
김소월의 '가는 길'에 대한 저자의 소감이다. 맞는 말이지 않은가. 좋아하는 감정을 언제부터 시각을 정해 놓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끝낼 때도 이시각 이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헤어지자고 하는 쪽보다는 통보를 받는 쪽이 어떻게 쿨하게 굿바이 할 수 있겠는가.
사랑에 찌질해도 보고 진상도 되어보면서 사람이 성숙해 지는 거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이런 유명 시인들의 시를 읽고 나름의 감상을 적은 것만이 아니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하거니 인기많은 시인은 아니지만 멋진 시인을 알게 되어 무엇보다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지방 도시의 공장에서 시쓰기를 즐기는 계약직 보일러공이 바로 그 '시인'이다.
'시인 이면우'. 요즘 같은 시대에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꿈이 거창한 몽상가라고 할 것이다.
시보다, 소설보다, 문학보다 더 중요한 것이 먹고 사는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멋진 아빠의 모습, 시인인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거미 中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시는 그 제체로 진실하고 필요하며 친절한 (보너스로 경제적이면서 새롭기까지 한)말이며, 진실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은 말들로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따뜻하게 위무하는 마법의 말이다._(본문 중에서)
모처럼 휴가를 내 몇 가족이 모여 강원도로 향했다. 겨울의 제 맛은 물좋고 공기좋은 강원도라야 느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한껏 품고 말이다. 부산에서 살 때만 해도 눈은 보기 드물었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대상이었지만 서울의 눈은 흔해 빠지고 불편하고 지저분함을 의미했다. 눈을 두고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곳도 이곳 서울이다. 새하얗게 내린 눈이 녹지않고 먼지와 뒤엉킨 채 시꺼멓게 변색해 버린 모습은 영락없이 쓰레기 쌓인 모습이다. 그런데 강원도를 향하면서 기대한 건 또 다른 눈의 이미지다. 한번 눈이 내리면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내린다니 그곳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의 상징일 수 있겠지만 잠시의 여행객에게는 낭만의 대상일 뿐이다. 서울의 눈을 잊게 해줄 그곳, 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해줄 것 같은 곳. 그곳을 가며 집었던 단 한 권의 책이 바로 《시 읽기 좋은 날》이었다. 강원도의 겨울을 만끽하러 간 것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분주함을 경험하기보다는 시를 읽을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찾기 위함이었다.
순백색의 세상을 경험하는 것 자체만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키긴 충분했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깨끗한 눈과 뒤섞여 동심으로 하나 될 때 그 속에 있는 어른들도 마냥 동심일 수 밖에 없었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지고 서로 갈등할 일도 없었다. 어른과 아이가 한 데 뒤엉켜 눈 속에 뒹굴어도 마냥 즐겁기만 했던 순간이었다. 그 곳에서는 근심도 걱정도 없는 자연인 그 자체가 돼버린 듯 했다. 그런 분위기에 잔뜩 취해서일까,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잠든 고요한 아침시간에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서광을 등불삼아 시 한편, 글 한편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가다 보니 시가 작가의 글이고 작가의 글이 시가 된다. 내 두뇌를 감싸고 있던 각질들이 크리스피 도넛의 표면이 깨지듯 바싹바싹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경험을 했다. 이런 날이 시 읽기 좋은 날이구나하고 감탄했던 날이다. 시는 잃어버린 감성을 일깨우고, 작가의 글은 일상에 대한 공감의 장을 넓혀 주었다.
시에서 삶을 찾아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잘 묻어난 책이라 생각된다. 시가 일상의 이야기를 이끌고, 일상은 시로 승화된다. 강원도로 여유를 찾아간 날이 시 읽기 좋은 날이라 여겼지만 책을 읽고 나선 일상이 곧 시가 될 수 있고, 언제 어디에 있든 내가 머물고 있는 그 날이 곧 시 읽기 좋은 날이라 여기도록 해 주었다. 한 편의 시로 나의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색가가 되어야겠단 생각도 하게 된다. 티끌하나 없는 순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강원도 산골의 눈도 눈이고, 도심 길가에 시꺼멓게 뒹구는 눈도 눈이라 부르듯, 아름답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면을 모두 지닌 것이 우리 삶이란 것을 책을 통해 공감하게 된다. 작가는 시를 통해, 현실이 만화처럼 항상 정의가 승리하고 착한 공주는 멋진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해준다. 현상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힘을 시를 통해 기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책을 읽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시는 대충 감상하고 작가의 글에 집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