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를 말하는 사람들이
절대 말하지 않는 것
사그라들지 않는 ‘미투’의 바로 옆에는 페미니즘을 평가하는 근엄한 얼굴이 함께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칭찬하든 아니라고 비난하든, 정반대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말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웬만해서는 페미니스트와 같이 지내기 불편하다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 책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보다는 ‘진짜’가 왜 이토록 강조되는지 따져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진짜’란 지금껏 없었을 뿐 아니라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늘 ‘나중’으로 밀려났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리도록 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정신이고, 페미니즘 논의의 ‘질적’ 발전 또한 목소리들이 ‘양적’으로 쌓인 뒤에야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지만, 때로 ‘진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언어다. 너는 늘 화가 나 있는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아, 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편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를 선호하는 이들은 사회 개혁보다는 페미니스트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 페미니스트 감별사가 되어 페미니스트를 얌전하게 길들이려 한다. 태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내용을 무시할 수 있어서다. 나에게 공손하기만 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너의 말을 교양 있게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_ 27쪽, 1장 ‘진짜’는 없다
‘진짜’를 구별하고 싶은 욕망은 차별과 이어져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원래’의 ‘자연스러운’ 여성이라는 말은 트랜스젠더 여성 등은 설명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언어고,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남성 중심으로 짜인 현실을 외면한 채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암묵적 주문이다. 현실에는 수많은 삶만큼이나 수많은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욕망은 부당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진짜’가 아니라 날마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말한다.
“하나의 진짜 길만 있는 사회보다는 여러 종류의 다른 길이 있는 사회가 옳다. 물론 ‘잘못된’ 길에 이르거나 위험한 길에 다다를 수 있으며, 길을 더럽힐 수도 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패를 반복하며 길을 알아갈 권리가 있다. 누구도 그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실패를 쌓아 균열을 만들 권리가 있다. 실패조차 하지 못하면 영원히 고립된다. 완벽하지 않아서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 _ 42쪽, 1장 ‘진짜’는 없다
페미니즘의 렌즈로 바라본
여성의 몸, 일상, 정치
‘진짜’, ‘혐오’, ‘진보’, ‘칭찬’, ‘실수’ …… . 이 책의 단어들은 작은따옴표 인용(quotation)으로 가득하다. 오랫동안 남성의 시각이 ‘보편’과 ‘일반’으로 여겨지면서 여성의 몸, 일상, 정치를 둘러싼 많은 현상들이 ‘원래’ 그런 것으로 취급되고, 심지어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조차 무감각해진 상황에서 저자가 단어들을 하나씩 뜯어보며 이야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동안 ‘특권’을 누려왔다는 뜻이다. 조심과 불편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안전은 특권화되었다. “어디 여자가”라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말은 여성살해까지 그 고리가 이어져 있다. 언어 하나하나를 붙들고 집요하게 싸워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익명으로 사라진 수많은 ‘○○녀’들의 ‘원통한 혼’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다.” _ 67쪽, 1장 ‘진짜’는 없다
누군가는 페미니즘이 이미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냐고, 과거 조선시대나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곳과 비교하면 지금 한국 사회는 여성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냐고 반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자가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짚어낸 현실은 여전히 참담하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남성이 차지해야 할 공간(처녀막, 구멍, 자궁, 땅, 꽃 등)으로 대상화된다. 성을 이야기할 때는 ‘잘하니’가 아니라 ‘해봤니’라고 질문받으며, 나이듦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 등 남성과 달리 경험 자체를 조롱당한다.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나는 한 중년 남성에게서 제 자식들이 ‘빨리 손주 안겨줄 여자’를 데려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빨리 안 데려오면 자기 마음에 드는 처자를 골라 결혼시키겠다는 말까지 듣고 나면 표정 관리가 어려워진다. 아들의 파트너는 나의 성을 물려받는 핏줄을 낳을 재생산의 도구다. 이러한 사고는 상당히 지배적이며, 일상에서 ‘손주 낳아줄 여자’라는 표현은 거의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유통된다. 축사에서 인간의 먹이 생산을 위해 학대받는 암컷 가축들처럼, 인간 암컷인 여성은 빨리 다음 세대를 낳으라고 재촉받는다. 이를 에둘러 ‘가임기 여성’이라고 문명의 언어로 표현한다.” _ 86쪽, 2장 몸이 된 여성들
여성은 공간으로 취급받지만 공간의 주인은 아니다. ‘어울리는’ 자리가 정해져 있기에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도 ‘왜 거기에 혼자’ 있었냐고 추궁당한다. 영화에서는 흔히 남성들 간의 분노, 연대, 정의를 표현하는 매개물로 등장한다. 아울러 여성의 생계공간은 여전히 직장-가정의 고된 ‘2교대’ 노동으로 점철되어 있다. ‘진짜’를 논하기 전에 여성의 공간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사회의 약자는 ‘보이지 않기 위한 노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가리고, 숨고, 돌아다니지 말고,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이 노동을 소홀히 하면 비난이 날아온다. 장애인이 왜 돌아다녀, 애 엄마가 왜 돌아다녀, 노인네가 왜 돌아다녀, 계집애가 어딜 돌아다녀.” _ 148쪽, 3장 장소를 향한 폭력
‘객관적 비판’이라는 말에
숨겨진 비겁함에 대하여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는 말이 모든 페미니즘이 무조건 옹호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은 어떤 페미니즘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을 두고 앞뒤 맥락을 자르거나 일관성 없는 잣대로 평가하는 ‘비겁함’이다. 예를 들어 ‘여자라서’ 박근혜를 찍겠다고 했던 어느 페미니스트의 말에 대해 한창 비난이 쏟아질 때, 중요한 공적 자리마다 여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매도한 것이 공정한 수준의 비판이었는지 묻는다. 이런 현실은 미국에서도 다르지 않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이 힐러리 클린턴을 찍지 않는 여성들에게 ‘지옥의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 말은 ‘징그럽게 확대되어’ 비난받았다. 이에 대해 전술적 실패를 페미니즘의 문제로 공격한 것이라고 분석한 대목은 무척 날카롭다.
“‘여자라서’를 고민하게 만드는 배경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오히려 아주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구심을 품는 부분은 흑인이 흑인을 찍는 것과 여성이 여성을 찍는 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다르다는 점이다.” _ 34쪽, 1장 ‘진짜’는 없다
여성의 경우 남성과 달리 ‘같은 여자로서’라는 수사를 사용할 때가 많다. 이는 “성공은 여성 개인의 능력이지만 실수는 모든 여성의 실패로” 여기는 현실의 무의식적 반영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겁한 잣대에 위축되어 침묵하기보다는 “실패를 쌓아 균열을 만들 권리”를 요구하며 더 수다스럽게 길을 만들어가자고 주장한다.
“‘우리’ 여자는 수시로 ‘같은 여자’의 행동에 신경 쓰며 살도록 강요받는다. 연대는 방해받고 비난은 여성이 공유한다. 죗값의 무게도 달라서 “여자가 더 무섭다” 등의 말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산다. 이런 관념은 우리 일상에서 별 두려움 없이 떠돌며 여성의 관계와 생각을 지배한다. ‘여성 일반화’는 남성 사회의 주특기다. 아무 공통점이 없는 여성들을 하나로 묶는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가. 그런데 여성이 여성을 돕자고 하면 비로소 ‘여성의 다양성’이 치솟아 오른다.” _ 34쪽, 1장 ‘진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