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카네기 저/임상훈 역
룰루 밀러 저/정지인 역
EBS 자본주의 제작팀 저/EBS MEDIA 기획
김호연 저
채사장 저
채사장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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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라는 책이 있는데 결이 비슷하다
읽은 지 오래되서 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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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고 밥밥밥 그놈의 밥 속터진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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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고 밥을 주는 일'에 대한 노동가치를 명백히 인식시키기, 나아가 여성의 밥하기 노동이 '자연스러운 성 역할'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이 두가지는 양립할 수 있다. '성 역할'이 아니라 노동으로 인식할 때 여성이 음식을 매개로 어떻게 사회 참여를 했는지 더 명확히 볼 수 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밥을 주는 모습을 재현하는 방식은 오히려 여성의 노동과 사회 참여를 흐릿하게 만든다
먹고 만들고 먹히는 일은 모두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식탁'은 인간의 당연한 행동들인 먹기, 말하기, 만들기를 하며 일어나게 되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밥상에 앉는다.
그리고 매일 차별을 하고 있다.
먹거리를 기르고, 만들고, 먹고, 치우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다.
밥상 뒤엎는 사람, 밥 숟가락을 먼저 들 수 있는 사람, 식사 중에도 계속 움직이며 시중드는 사람, 직사각형 식탁의 가장 '윗자리'에 앉는 사람, 준비된 음식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사람, 제사상의 도리를 입으로만 따지는 사람, 성별에 따라 먹는 입과 노동하는 손의 역할을 구별하기 등 식탁에는 권력이 오간다.
평생 남편과 아들들에게 밥을 차려주다 늙어버린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결혼 한 뒤 종종 '신랑 아침밥은 차려주냐'고 묻는다.
치매걸린 할머니와 말 씨름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할머니, 신랑아니고 남편! 그리고 남편도 내 아침밥 안차려주는데 내가 왜 차려줘" 라고 대답한다.
할머니는 4가지 없는 지지배라고 욕하고, 노인들에게 너무한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들에게 당연한 것들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걸 꼭! 알려주고 싶다.
남자들에겐 손이 있고, 누군가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평생.
살다보면 "여자라 그래~" 라던지, "여자라서"라던지, "여자야?"라는 말을 많이 듣게된다.
'여성'이란 말이 붙으면 좋지 않은, 부정적인 말이 된다.
가령, 우리나라는 운전을 잘 못하거나, 쇼핑을 과하게 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이를 데리고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을 김여사, 된장녀, 맘충이라고 지칭한다.
운전을 못하는 남자도 있고, 쇼핑을 과하게 하는 남자도 있다. 공공장소에 우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사람이 애 아빠일수도 있을 것이다.
왜 안좋은 단어들은 모두 여성화 되는것인지?
엄청 와닿았던 문단.
우리집은 유난스럽고 심각하게 가부장적인 집안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절엔 며느리들이 차린 밥상을 남자들만 먼저 먹고 일어나면 남은 것들을 여성들이 뒤늦게 먹기 시작했다. 남자 아이들은 남자어른들과 같은 밥상을 먹었고, 여자 아이들은 옆에 작게 차려진 밥상에서 따로 먹었다. 제사를 지내는 방에는 며느리들은 물론 여자 아이들도 들어갈수 없었고, 남자 어른들과 남자아이들만 절을 했다.
그게 당연한줄 알았다. 우리집은 그저 전통을 잘 지키는 집인줄 알고 컸다.
그게 옳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된 후, 나는 자체적으로 '명절 보이콧'을 실행하고 있다. 명절엔 가족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며,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다. 최근에 웹상에서 전국의 딸과 며느리들이 지역마다 '명절 브런치' 식사를 진행하던데, 코로나가 심하지 않으면 꼭 참여해보고 싶다.
일년에 두 번이 아니라 평생에 두 번이라도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
명절날 느꼈던 가장 큰 의문점은, 제삿상을 차리는 사람들 중에 제삿상을 받는 당사자와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시집가서 남편의 성을 가진 아이를 낳아주고, 매일 남편의 밥을 차려주며,
남편의 성을 물려준 남편의 조부모or 부모를 위한 제삿밥을 차려줘야하는 이 거지같은 전통.
(더 심한욕은 할 수 없기에.)
여성 노동에 숨겨진 구조적 여성혐오를 잘 보여주고 있는 '여성 청소 노동자'
한달 전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직장 내 갑질과 과로로 인해 사망했다.
현재 중고령층 여성의 노동과 삶을 결정하는 구조적 핵심에는 성별 불평등이 존재한다. 여성의 일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수준부터가 그러하다.
월 400씩 턱턱 버는 택배기사, 배달기사들의 처우보다 청소 종사자, 급식 종사자분들이
인간답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처우개선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건, 보이지않는 곳에서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읽었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이 생각났던 문단.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 광주 항쟁 등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라진 여성들이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 윤희순 의사
일제강점기 - 어윤희 열사, 김란사 교수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운동가는 357명, 서훈을 받지 못한 여성운동가들은 약 2000명.)
6.25 전쟁 - 여성의용군교육대
광주 항쟁 - 이효정
여성이란 이유로 역사책에 이름 석자 새기지 못하는 거라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이들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여러 책을 읽다보면 비출산을 주제로 한 책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 신념이 더욱더 굳건해짐을 느낀다.
아이를 낳고 나면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분명, 육아노동과 가사노동으로 인해 여성도 노동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임금을 받을 수 없으니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출산으로서 경력 단절이 되며, 그의 성을 따른 아이를 키우게 되는 꼴이다.
내 직업은 안정적이지 않으며, 내 일은 아이를 낳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해서 다시 시작할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직업이다. 혹여라도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성향 상 내 삶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올인할 것임을 내 자신이 너무도 잘 알아서, 나는 비출산을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 맞벌이 딩크부부로서,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편보다 수입이 덜 있는 것도 맞고, (상여금이나 명절 보너스까지 합하면 훨씬 덜 버니 연봉으로 치면 꽤 차이가 난다.) 남편의 벌이수준으로 인해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싶은 시간대에 일하고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가 소비하고 싶은 것들은 내가 번 돈으로 소비하고, 내가 투자하고 싶은 것들도 내 돈으로 투자한다. 이러한 경제적 자립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맞벌이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
결혼한 여자의 자리는 누가 정해주는가.
이를 여성의 도리나 의무라고 우기지만, 결국 착취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시간은 가족을 위해 쓰여야 하며,
여성의 자리는 남편 옆에서만 가장 '정상적인 권력'을 갖도록 구성되어 있다.
가부장제는 그렇게 여성 착취를 여성의 권력으로 포장해서 굴러간다.
'내조'라는 말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여성 상위시대라고 징징거리지만, 남성들이 실제로 자신의 권력을 잘 알고 있다.
즉,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임을 방증한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군대나 가보고 권리를 주장하라'고 한다.
그런데 여성들은 군대를 '안'가는게 아니라 '못'가는데 무슨소리인지?
군대를 가는 것 또한 남성들이 결정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 것일까.
그게 자신들의 권력이라는 것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절대 가지지 못하는 권력.
안다는 것은 때로 불편하다. 나는 모를 것이다, 몰라도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시키며 차라리 몰라도 되는 권력을 지향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자신의 세계에 그 낮선 세계가 스며드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 때문에
조롱해 멸시하거나 척결의 대상으로 삼는다.
리뷰를 마치며,
모두가 당연하다 생각하던 차별의 밥상을 수면위로 꺼내어
이야기 해준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받아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모두 그럴 권리가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 표어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개인적 경험은 사회 내 성별관계의 정치학에 의해서 발생되는 구조적 맥락이 있어,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행위나 사건은 사회적으로 작동되는 여성성이나 남성성의 정치적 역학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뜻으로, 즉 ‘여성의 개인적인 경험은 단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구조가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에서 비롯되었으므로 한낱 경험으로 치부되던 여성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회문제화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자료원: 페미위키).
여성으로서 태어나서 겪는 일련의 경험들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지 않고 사회구조적인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이 책은 그 필요에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입, 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이라는 부제를 달고있는 이 책은 매일 마주하는 밥상에서부터 의문을 갖는다. 과연 누가 만드는 식탁인가, 누가 가장 먼저 먹고, 누구와 먹고, 누구는 끝까지 먹지 못하는가.
읽으며 꽤 많은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나와 엄마의 이야기. 그리고 엄마의 엄마 이야기. 대체 여성은 어디서부터 이러한 모습으로 이어져왔을까.
과거로부터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게 우리는 같은 모습을 하고있다. 또 물리적인 거리가 무색하게 전 지구의 여성들이 닮은 모습을 하고있다. 걸어온 길이거나, 걸어갈 길이거나.
가장 인상깊었던 꼭지는 [말하는 입 - 피로 맺어진 밤 / 선술집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할 때 여자들은 어디에 있었나] 이다.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는 있지 못했다. 우리들에게 정해진 자리는 부엌이거나 너무나 투명한 자리여서 권력과 연결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다. 그래서 다른성별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는 권리도 갖지못해 여전히 싸우고있다.
2021년 현재,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있다. 이제 우리에게도 언어가 생겼으며 힘을 모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정치적인 행보역시 이어가고있다. <정치적인 식탁>은 당연하게 여겨져온 일상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사유하고 담론을 공론화하고 행동한다면, 우리의 내일은 달라질 것을 믿는다.
"정해진 자리 바깥으로 나가고, 정해진 역할을 벗어나 경계를 무너뜨리며 질서를 교란시킬 때, 타자와 주체의 권력관계는 전복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