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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 다시 로크먼
▷ 푸른숲
▷ 2022년 10월 20일
▷ 420쪽 ∥ 626g ∥ 154*218*25mm
▷ 페미니즘
다시 로크먼(Darcy Lockman, 1972년~) 미국 태생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다. 미국의 여러 매체에 페미니즘, 성차별, 부부관계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고 하며, 몇 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나와 있다.
페미니즘(여성주의, feminism) 여권주의라고도 하며,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고 주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운동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1872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1890년~1910년 영국과 미국에까지 사용되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19세기까지 여성의 투표권이나 각종 차별이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인정을 기반으로 시작하여, 여성의 사회적인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하는 목표로 100년 넘게 지속하는 운동이다.
P.362 “젠더 시스템에서 ’서로 부족한 점은 있지만 평등하다‘는 허울 좋은 구호는 대부분 남자에게 혜택을 주는 성 역할을 수용하도록 한다. 이런 허울은 임시방편의 기능도 한다. 뉴욕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인 존 조스트는 일생을 시스템 정당화 연구에 바쳤다. 그에 따르면 시스템 정당화는 ’시민이 분명 계급사회에 살면서도 평등의 가치를 공언할 때 일어나는 인지 또는 이상의 부조화를 줄이기 위해 생겨난‘ 경향이 있다.”
420쪽에 이르는 책의 내용은 여성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는 신체적, 사회적, 계급적, 사상적인 불만을 적어내는 책이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에 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에 배려하는 방법을 모른다. 남성은 바깥일 여성은 집안일이라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서로 교류하기도 전에 비슷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문명과 접하지 않은 원시 부족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차이는 원시 부족에서는 당연하게 느끼고, 문명사회에서는 부당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책은 여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적어내고 있지만, 명확한 결과나 방법은 크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고, 왜 페미니즘에 관해 쓰는 저자는 남성이 없을까? 페미니즘 말고 모든 차별을 받는 사람을 위해 책을 쓰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류 문명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편견과 차별‘이다. 인류는 부족을 이루고 사회를 만들면서 이것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작은 편견은 수천 년 동안 거대한 편견이 되었고, 계급이 생기면서 차별 또한 거대하게 성장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되물어 보겠다. 300년 전 아프리카의 노예가 신대륙에서 노예노동을 하고, 미국의 여러 가정에서 가사와 노동을 할 때 그들이 차별받고 있다고 외친 사람이 있었던가? 심지어 흑인 인권 신장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도 대부분 남성이다.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탈출한 난민이 1000만 명에 육박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8세 이상 60세 미만 모든 남성에게 출국금지 명령을 내리고 싸울 것을 명령했다. 전쟁터만큼 잔인하고 두려운 장소도 없다. 단지 포격 당하는 도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할머니는 이곳은 지옥이라고 말한다. 그 최전방에는 남성이 무기를 들고 죽어가며 싸우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이런 차별의 역사는 원시 모계사회에서는 드물었다. 인류가 2500년 동안 쉬지 않고 전쟁을 해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기는 쪽의 국가의 남성이든 여성이든 패한 쪽을 수탈해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했을 때, 부당하다고 외친 일본 여성들이 있었던가
인류가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 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은 사상이 아닌, 이런 전쟁의 역사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모든 걸 다 잘해야 하는 여자와 한 가지만 잘해도 되는 남자의 탄생” 그렇다. 남성은 무기를 들고 나가서 싸우는 것 한 가지만 잘해도 되게끔 문명이 진화해온 것이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인간의 근원적인 ’편견과 차별‘에 관해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부모가 된 후 6년 반 동안 아이들 짐 싸는 일을 비롯해 육아와 가정 내 모든 일을 책임지는 저자와 달리 남편은 더 이상 이를 거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이 부부만의 '문제가 아닌', 이를 세계 모든 가정에서 정상 범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전 지구상에 만연한 성차별주의의 오류를 짚어낸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은, 평등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오해한, 불평등한 시대를 모성으로 견뎌내는 여성들과 이기적인 남편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는 100명의 엄마들을 비롯한 전문가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결과, 생물학적인 요인, 모성의 헌신과 관련된 문화적인 의무, 남자의 필요와 욕구를 여자의 것보다 우선시하는 전 세계적인 현상에서 들여다보았다.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생물학, 신경과학 등 여러 전문가들의 최신 연구 결과를 토대로 모성 본능, 호르몬 변화, 성별본질주의 등 고정관념과 과학이 여성의 불평등한 희생과 남성의 책임 회피가 어떻게 대물림 됐는지 살펴보았다.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성에 대한 관념이다. 철학자 제니퍼 호켄버리 드래그세스는 생각하는 여자에서 성별 본질주의자들은 종종 역할로서의 성별과 생물학적 성별은 자연적 구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연적이거나 선천적이거나 명백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실은 문화적인 습관인 경우가 많다. p88
도덕적 모성은 실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엄마라는 직업에 윤리적 의무를 부여했고 이 의무는 이후에도 아주 미미하게 약해졌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똑같은 의무가 권장되지 않았다. p195
엄마라는 의무의 가혹함은 오히려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렸다. 우리는 도덕적 우월성과 자녀에 대해 품는 사랑, 육아에 대한 이상적인 관념을 내세우며 이런 후퇴에 동의했고, 이것은 외적인 구속보다 훨씬 효과적인 수단으로 밝혀졌다. 뜻하지 않게 순진한 아기가 남성 지배의 최고 조력자가 되어왔던 셈이다. p241
열혈 엄마 역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남자에게 도움이 된다.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엄마 역할에 매진하다 보면 여자는 대체로 사회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p298
엄마는 아이 음식을 한 번 더 잘라주고 챙기느라 바쁘지만 남편은 아이의 식사하는 장면을 바라만 볼 뿐이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끊임없이 신경을 건드리며 여성을 분노하게 만든다. 여성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혼자 육아를 챙기다 끝내 아이들 아빠와 싸우지만 변하는 건 거의 없다. 가족들 모두 저녁 늦게 외출했다가 지쳐서 돌아오는 날이면 남편은 자신의 몸만 씻고 침대로 들어가버린다. 여성은 아이들 먼저 챙겨서 씻기고 재운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챙길 수 있다. 이런 모습이 현재 우리들의 상황이다. 결론은, 여자가 남자보다 결코 선천적으로 더 조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본능보다는 학습된 특성임을 입증했으며, 성별 노동 분담이 선천적이라는 주장은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편리한 방편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은 우리가 배우는 정형화된 성 고정관념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계속 반복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나는 할 수 있는데, 남편은 왜 못할까?"
"둘 다 일하는데 왜 집에서는 평등한 관계를 맺지 못할까?"
이런 불평등은 엄마가 아이를 임신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들을 통해 아이들의 욕구 충족은 엄마의 몫이라는 암묵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성 역할 구분은 예전 우리 부모 세대에 비하면 아주 많이 변한 듯 보이지만 남편은 여전히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가사노동 회피는 물론 무수히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것들까지 과거 가정 교본에 얽매여 있다. 성 평등 사회인 스웨덴에서도 남자가 자녀를 돌보는 시간은 아내가 쓰는 시간의 56퍼센트에 불과하다. 여성의 경제력이 막강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 발을 과거에 담가놓고 있다. 구시대의 유물, 모성 때문에 많은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 프랑스를 뺀 세계 대다수의 가정들(저자는 미국인이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개인 문제가 아닌 뿌리깊은 문화의 폐단, 사회문제로 인식을 넓혀야 한다.
20세기 중반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85퍼센트 이상이 가부장적인 문화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문화가 가부장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체적으로 크고 힘이 센 남자는 전쟁 같은 활동을 통해 여자보다 더 높은 지위와 권력을 누렸다. 오늘날 성취와 지위는 신체적인 힘과 관련이 없음에도 성 역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여성이 현재 주양육자인 이유는 지금까지 그래왔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UN은 2018년 보고서에서 여성이 집안일과 육아에서 남성보다 평균 2.6배 많은 일을 한다고 추정했다. 전 세계 문화를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부부의 3분의 2가 첫아이 출생 이후 3년 안에 관계의 급격한 질적 하락, 갈등 및 적대감의 극적인 증가를 경험한다고 밝혔다. 자녀의 수가 늘어날수록 불만 역시 증가한다. 남자 배우자의 육아 참여는 관계에서의 충돌 확률과 엄마의 만족도를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인자다. 남자 배우자의 가사 참여도가 낮은 부부는 이혼할 확률이 높으며, 모든 이혼 소송의 약 70퍼센트를 여자가 제기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간통과 관계 소원 다음으로 불공평한 가사 분담이 파경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여성들은 어디에서도 평등한 존재가 아니다. 남성 지배를 실제 관철하는 사회적 관습은 직업 세계에 비해 개인 영역에서는 많이 변하지 않았다. 집안일의 36퍼센트를 하는 남성이 가사 분담이 가장 공평하게 이뤄졌다고 보고했고, 여성들 또한 이 의견에 동조했다. 이 연구는 1994년에 발표된 자료지만 26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평등한' 것은, '똑같은' 분담이 아닌 여자가 가사의 3분의 2 정도를 하는 것이고, 남녀가 모두 동의했다는 데 있다.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런 부조화의 원인을 모두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 수행 때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양육이 여성만의 특별한 재능이라는 이야기는 불평등을 숨기고 우리 자신을 독려하면서 아이들에게 엄마 혼자 모든 일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믿음을 주입할 뿐이다. 2017년 <뉴스위크>는 '85세 넘은 여자는 그쯤 남편이 저세상으로 가서 더 행복하다'는 기사를 통해 노년에 여자가 행복한 이유는 배우자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결혼 생활을 정리한 싱글맘이 덜 힘든 이유 역시 누구(남편)에게도 좌절감을 느낄 일이 없어 좋다는 점이다. 어쩌다가 행복의 핵심이 이렇게 변질된 것일까?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연방이 국가 보조의 영유아 탁아 시설을 이상적인 소비에트 시민으로 키우는 데 중요한 도구라고 선언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은 소비에트연방과 차별화하기 위해, 정부 보조의 영유아 탁아 시설을 반대하며 오직 엄마만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미국 시민을 키울 수 있다는 여성 희생 숭배를 강화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남자와 비교하여 여자의 노력과 안락이 가정에서 발목 잡히는 한 여자는 결코 남자만큼 막강해질 수 없다. 애정이 넘치는 다정한 사람으로 칭송받는 '온정적 성차별'은 사회 변화를 교활하게 억누른다. 이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는 지위를 부여해 여자들의 무임노동을 교묘하게 독려하고 확장시킨다. 바꾸기에는 우리가 힘이 없다고 느끼는 시스템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 여자들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종속성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이제는 적응을 멈출 때이다. 우리 여성들이 모든 성차별주의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해야 저항이 생기고 불평등한 가정을 정당화하는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귀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트에서 엄빠 손을 잡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웃음이 나곤 했다. 그뿐이었다. 결혼을 한다거나 그래서 아이가 생긴다거나. 그런 일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상한가. 일하겠다고 면접 보는데 왜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냐는 훈계와 다그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런가 보다 하며 여기는 걸러야지 했다.
아이를 보면 귀여워 죽겠다거나 누군가 결혼을 하면 나도 하고 싶다거나 마음조차 들지 않는 나는 비정상인가. 다시 로크먼의 책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을 읽고 나서 명쾌한 답을 얻었다. 너는 절대 이상하지 않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놔둔 사회와 관습과 문화와 역사가 잘못됐다. 바다 건너 사는 미국 언니 다시 로크먼은 다양한 사례와 해박한 지식, 다정한 어조로 말해 주었다.
어떤 게 잘못되었나. 우선 모성 본능이라는 말부터. 남자 너는 이런 일 못해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다. 똑같이 세포 분열해서 성별만 다르게 태어났지 할 수 있는 일 없는 일을 구별 지을 필요가 없다. 사회화 과정에서 여성, 남성의 역할 분담이 나누어진다. 여자아이의 경우 인형을 주며 놀게 한다. 잘 데리고 놀면 칭찬한다. 남자아이는 로봇과 공을 준다. 던지거나 뻥 차면 칭찬한다.
아이는 칭찬을 받는 순간 학습한다. 아, 이걸 더 잘하겠다. 여기서부터 역할 분담이 달라진다. 똑같이 인형을 줘보자. 똑같이 로봇과 공을 줘보자. 어떻게 될지는 더 잘 알겠지. 모성 본능은 사회가 책임질 수 없는 양육과 돌봄을 여성에게 떠넘기기 위해 만들어낸 말일뿐이다. 법과 제도를 만들 형편도 여력도 되지 않기에 여성에게 짐을 지우기 위해 너희는 모성 본능이 있으니 직장을 다녀도 집에 돌아와서는 남자보다 애를 더 많이 돌봐야 하고 상사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한다고 부추기기 위해.
그리고 적대적 성차별과 온정적 성차별이 있다. 이 사회가 약고 교묘해진 게 결혼과 육아 정책을 만들고 인식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책의 제목대로 은밀하고 달콤한 말로 여성이 스스로를 주눅 들고 문제가 있다고 만들고 있다. 여성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 속으로 몰아넣는다. 적대적 성차별의 언어는 가령 이런 식이다. "여자는 함께 일할 때 툭하면 자기들끼리 싸운다." 누가 보아도 성차별적인 언어다. 온정적 성차별은 모호하다. "여자는 남자가 할 수 없는 식으로 남을 보살펴준다." 모호하고 교묘함을 느꼈는가.
다시 로크먼은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주저하지 않고 털어놓는다. 남편 조지와의 갈등을 사례로 일하는 여성이 겪고 있는 부당 노동과 현실을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한 현장감으로 재현한다. 부부 100쌍을 인터뷰했다더니 전문 서적과 논문이 아닌 부부들의 사례로 사실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겪고 있는 듯한 혹은 내가 모르고 겪을 일을 보여줌으로써 정신 차리게 손을 꼬옥 잡아준다. 네가 잘못된 게 아니야.
일하고 돌아왔는데 집이 더럽고 선생님한테 아이 관련 문자가 와도 죄책감과 부채감을 여성 혼자서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과학과 역사, 인문학으로 알려준다. 동일 노동을 하고서도 여성은 남성 보다 낮은 임금을 받아도 된다는 당연한 생각은 누가 하게 만들었는가. 부부가 똑같이 실직을 해도 왜 집안일은 여성이 더 하게 되는가. 여성 작가에서 일과 양육의 병행을 묻는 어리석음의 출처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모성 본능이라는 말은 헛소리다. 주양육자를 당연히 여성으로 보는 시선을 바꿔야 한다. 기저귀를 엉망으로 갈아도 여성은 침착하게 남성에게 알려주면 된다. 공감 능력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일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날 일은 없다. 온정적 성차별의 언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의 원인을 자신 탓으로 돌리는 건 쉬운 해결책이다. 살아봐서 알지 않은가. 그렇게 단순할리 없다, 세상은.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은 나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성차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난다. 그러다가 유레카를 외치며 이마를 친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하는구나.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으며 살 수 있구나. 좋은 봄날에 건투를 빈다. 내가 하는 일은 너보다 후진 일이 아니다. 똑같이 최저 임금 9,160원 받으며 하는 일이다. 집에 와서 같이 움직이자.
제목이 그럴 듯한 것 같지만 형용사가 수식해주는 단어는 결코 반갑지 않는 단어다.
성차별. 가사분담, 회사내에서의 승진과 연봉 관련 문제 등등.
사회적으로 표준화된 규칙은 없지만, 문화적으로 암암리에 정해져있는 나름이 기준이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존속이 과연 발전하는 사회에서 옳은 것인가. 질문해보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저널리스트인데, 실제로 자신이 양육을 하다보니 이런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왜 남자들은 일을 더 하지 않는가."
여자가 남자보다 자식이 원하는 것에 더 민감하게 태어난, 생물학적인 원인이자 결과인 것일까?
미국노통통계국 수집자료에 의하면 직장 여성의 가정 내 육아 분담 비율은 65퍼센트인 반면, 남편은 35퍼센트이며, 이 수치는 20년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는 과연 이대로 여자들이 가사돌봄 노동을 대부분 부담해야 하는건지, 변화가 오지는 않을런지 궁금하여 90명 가까운 엄마들을 인터뷰 하고, 여러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작가는 적대적 성차별과 온정적 성차별을 구분 지어 정의를 내렸다.
"온정적 성차별은 "남성 지배를 애정을 담아 또는 기사도 정신으로 표현하는 것" 으로 여자는 도덕적 나침반 기능이 탁월하지만 남자의 보살핌과 보호 역시 필요로 하며, 여자는 남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조장한다. "
적대적 성차별은 쉽게 구별할 수 있지만, 온정적 성차별을 인식하지 않으면 그것에 익숙한 채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온 여러 사례와 저자가 던지는 '질문'을 통해서 여성의 삶에 대해 보다 넓은 인식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