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를 ‘자극’으로 받아들이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술관의 도슨트처럼 오페라도 누군가 친절하게 팁을 주고 가이드를 해 준다면 누구나 쉽게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알아듣기 어려운 외국어 가사는 공연장에 가면 무대 옆 스크린에 우리말 자막을 올려 주니 그리 겁먹을 필요 없다. 오페라 연출가는 작품을 만들 때 어떤 면들을 보고 듣는지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눔과 훈련 끝에 그 발걸음이 극장까지 이어져 ‘앎으로써 보이고 들리는’ 오페라의 세상을 좀 더 많은 관객들과 함께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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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한 여인의 화려한 삶과 그 이면에서 꿈꾸었던 순수한 사랑, 그리고 쓸쓸한 죽음을 그리고 있다. 나에게 《라 트라비아타》라는 작품은 황량한 들판에 화려한 성장을 하고 홀로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인공 비올레타 스스로도 1막 마지막 아리아의 레치타티보에서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직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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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랩과 전자음악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오페라’ 연출가로 살아가는 나는 길을 잘못 든 것일까? 아니면 올바른 길 위에 온전히 서 있는 것일까? 종종 생각해 본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다. 비올레타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그녀의 ‘구원’을 우리가 확신할 수 없듯이 그 답은 어떤 삶이라도 끝까지 살아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멋진 척 말해 보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만들며 살아가겠다는 한 고집쟁이의 궤변일 수도 있다. 나는 오페라 연출가다! 그래도 음악과 함께할 수 있는 삶이란 멋지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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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를 보는 동안에는 리골레토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마음껏 연민을 느껴 보면 좋을 것 같다. 함께 웃고 울고 분을 터뜨려 보아도 좋다. 이 광대의 절규와 함께 쏟은 카타르시스의 눈물이 당분간 내 안의 괴물을 붙드는 고삐가 되어 줄 테니 말이다.
--- p.78
모차르트의 음악을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악이라고까지 이야기하는데, 빚에 시달리며 밥벌이를 위해 작곡을 계속해야 했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렇게 때가 묻지 않은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깨끗하게 정화시킨다. 이것이 이성(자라스트로)의 세계에서도 고고히 빛났던 음악의 힘이 아닐까.
--- p.100
살면서 ‘어렵다’고 느끼는 일이 있는가? 사람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페라 연출을 하면서 생각하게 된 어려운 일은 바로 사람을 웃게 만드는 일이다. 스스로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위트 있는 말재간으로 분위기를 리드하는 사람들을 보면 남몰래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에게 희극 연출은 언제나 큰 도전이다.
--- p.103
한밤중, 어느 집 창문 아래. 막이 열리면 피아노의 조심스러운 음악과 함께 사람들이 살금살금 모이는데, 음악의 귀여운 느낌에 어울리지 않게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시커먼 남자들이다. 이들은 알마비바 백작의 구애를 돕기 위해 고용된 음악가들이다. 그런데 “조용조용!iano iano!”하라면서 정작 백작은 시끄럽고 힘차게 노래를 한다. 그래서 연습할 때마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겠다며 백작역의 테너들에게 구박을 하고는 하는데, 테너들은 억울하다며 전부 로시니 탓을 한다. 그래, 작게라고 써 놓으면 뭐하나 높은 음정 때문에 작게 소리내기가 힘든 것을…….기대했던 것보다 힘찬 소리를 내더라도 조금 이해해 주자.
--- p.108
로시니가 절필을 했던 이유가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21세기가 되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을 줄은 진짜 몰랐을 것이다. 결국 평가는 시간이, 그리고 관객들이 해 줄 것이다. ‘개성의 시대’가 아닌가. 자신만의 취향을 가지는 것에, 모두와 다르다는 것에 겁내지 말자. 비바 오페라! 오페라 만세!
--- p.128
오페라 연출을 하면서 많이 듣는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때 나는 망설임 없이 《카르멘》을 추천한다. 이유는 지금껏 나온 모든 오페라들 중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이 가장 많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서곡부터 〈하바네라〉, 〈세기디야〉, 〈집시의 노래〉, 〈투우사의 노래〉, 〈꽃노래〉 등 ‘아! 이 노래 나 알아!’ 하는 곡들이 전 막에 걸쳐서 포진되어 있다. 그러니 오페라가 처음이라면 이 작품부터 시작해 볼 것을 추천한다.
--- p.137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문화 콘텐츠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뻗어 나가게 되어 이제는 ‘한국’을 아는 세계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드라마로 시작하여 영화, K-팝 등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데, 오페라라고 못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우선, 다양한 소재의 신선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필요하다. 물론 창작자들이 잘 만드는 것이 첫 번째이겠지만, 작품이 살아남으려면 계속하여 공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명작 오페라들도 좋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오페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잘 만들어진 작품에는 지속적인 응원을 보내 준다면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서양 대가들의 작품을 뛰어넘는 K-오페라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 p.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