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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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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 창비 | 2024년 03월 2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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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3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298g | 128*188*17mm
ISBN13 9788936439514
ISBN10 8936439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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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도시란 영원히 이어지는 실험을 위한 장소. 이 끝없는 실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실험은 이어지는 걸까?

물론 고통.
---pp.8-9 「서문_비행기와 택시를 위한 문학」 중에서

세상에 대해 정직하게 묘사하려고 했을 때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결과물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헛헛한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걸신들린 귀신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세상은 우습다. 하지만 절대로 웃음을 터뜨려서는 안 된다.
---p.24 「귀신들」 중에서

그는 아주 간단하게 그들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 할 일 없는 그가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가열찬 도시의 일꾼인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굉장히 올바른 묘사이다!

그는 자신을 이 도시의 진정한 일꾼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시시각각 부지런히 꽤 많은 돈을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진정한 일꾼은 나와 같은 소비자이지, 노동자가 아니라!
---p.61 「하이라이프」 중에서

그녀의 독특한 웃음, 묘하게 유혹적인, 엉뚱하게 선머슴 같은 순진한 표정과 반대로 수상하게 반짝이는, 상상 속의 일본 미니멀리스트 패션 브랜드의 뮤즈 같은, 납작한 검은 눈동자와 통통한 입술, 핑크빛 팔꿈치……

아아 그녀는 정체불명의 열대 해변 같은 향기를 풍겼다. 이수영은 한비가 적어도 세 종류의 향수를 섞어 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몸에서 나는 향이 뭐야? 나는 전혀 모르겠는걸……’ 하고 속삭이는 미스터리한 열대 과일 같은 …… 도대체 저 생명체의 정체는 뭐지? 도대체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걸까? 왜 굳이 저런 식으로 만들어진 거지? 도대체 뭐가 되어가는 중인 걸까? 진화일까 아니면 퇴화일까? 이수영은 궁금해졌다. 그녀를 거기에 이르게 한 그녀의 창조자, 커튼 뒤의 진짜 얼굴, 그러니까 진실을 말이다.
---p.117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중에서

안 본 사이 윤은영은 가장 세련된 2020년대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즉 에코주의는 그녀의 핵심가치였다. 언제 어디서나 지구의 미래에 대해서 한 수 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전기자동차가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빌 게이츠가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는지, 그레타 툰베리가 얼마나 영웅적인 인간인지 그녀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떠들고 다녔으며, 그런 사회적 관점의 정당성은 명품 신발과 에코백을, 파타고니아의 합성섬유 점퍼와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실크 블라우스를 감각 있게 매치하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윤은영이 커다란 별이 새겨진 스타벅스 리저브의 값비싼 텀블러를 손에 든 채로 잿빛 전기 표범을 닮은 테슬라 전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대단한 스펙터클이었다.
---pp.159-160 「두 정원 이야기」 중에서

사진 밖의 나를 누가 기억하지? 넌 기억나니?
난 안 나. 사진 밖의 너란 존재, 나에겐 귀신보다도 낯설어.
사진이란 정말로 신기함. 옛날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영혼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이 이따금 들지 않니? 난 들거든.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렇게나 많이 사진에 찍혀버렸으니까 영혼이 완전히 닳아 없어졌겠네?

없는 거야, 우리의 영혼은.
---p.189 「♡ 1 0 0 4 7 9 ♡」 중에서

그가 두살이던 2025년 유례없는 위기가 인류를 덮쳤다. 전쟁, 하이퍼인플레이션, 전염병, 대기근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다시는 과거의 참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혁명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실세계에 어떠한 악영향도 끼치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의 삶을 최소화한 채 원하는 삶을 가상현실에서 마음껏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으며 임대주택에서 살아간다. 가상현실은 위기 직전이었던 2024년의 현실과 유사하게 세팅되었다. 그곳에서 모두가 행복한 현실을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때의 방식으로 말이다. 마음껏 돈을 벌고 무한정 소비하고 아무렇게나 사랑에 빠지는 삶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사악하고, 폭력적인, 고통으로 가득한 과거 멍청한 인간들의 삶을 말이다. 모두가 최대치의 욕망을 향해 광기 어린 포즈로 다가가던 바로 그때의 사람들처럼, 스스럼없이 스스로의 야만성을 극대화하는 데 온 인생을 바치던 미개한 인간들의 삶을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pp.201-202 「소유의 종말」 중에서

그래, 잊자, 전부 잊고, 날자,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자, 어차피 거짓말이니까, 이해한다고 말하지도 말자, 죄다 거짓말이잖아, 죽이고, 짓밟고, 비웃고 싶다고 말하지도 말자, 진심이라니 너무 민망하잖아, 근데, 네가 지금 이 도시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잖아?
---p.227 「벌레 구멍」 중에서

최근 몰에 대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람들은 길을 잃고 싶어서 몰에 온다는 것이다. 스피드광의 은밀한 판타지가 치명적인 교통사고인 것처럼, 몰에 중독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몰에서 영원히 길을 잃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243 「몰보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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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한때 나는 김사과가 폭탄보다 커다란 소리로 소설을 쓴다고 생각했다. 세계가 망해가는 걸 경고하는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혹은 이루어지지 않기를 소원하며 쏟아내는 절망적인 예언처럼. 돌아보면 나는 다만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내 안의 소란에 귀를 막고 있었거나. 이제 나는 안다. 김사과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 우리의 안팎에서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굳이 따지자면 그것이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라는 사실을 충격이 아직도 중요하다면 말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현실’만큼 무섭고 또 우스운. 망해버린 세상에서 지나치게 오래 살아남은 미래를 상상해본다. 그때 누군가 내게 2020년대의 한국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않고 먼지 덮인 도서관을 뒤져 그에게 이 책을 건넬 것이다.
-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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