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기독교가 주도한 유럽의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럽의 중세를 다시 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대학의 박승찬교수님이 쓴 <중세의 재발견; http://blog.yes24.com/document/10907159>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서양의 중세가 암흑의 시대가 맞고, 동양의 각 지역은 개명시대였다고 주장하는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 째 이야기>을 읽게 되었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박홍규교수가 쓴 이 책은 고대 인문학을 재평가한 <인문학의 거짓말>의 후속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기왕의 중세사가 ‘일반적으로 서양의 중세만 다루어져온 것과 달리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의 중세 인문을 서양 중세 인문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고 했습니다. 서양의 중세도 다루기는 했지만, 분량으로 보아 동양 문명들과 비슷한 정도로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세와 달리 비서양 중세는 개명시대였음을 새롭게 주장한다’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논리의 전개에 무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큰 틀에서는 중세에 대한 정의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중세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4-6세기)이 있던 5세기부터 르네상스(14-16세기)와 더불어 근세(1500-1800년)가 시작되기까지의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라고 규정합니다. 특히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라고도 합니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918년 1392년)에 해당한다고도 했습니다.
저자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는 것은 근세에 들어와 힘을 얻은 유럽이 유럽 이외의 세계를 침략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서양의 중세가 기독교의 지배로 인한 것이라는 이유로 서양 중세를 이야기하면서 기독교가 시작된 예수의 시대까지 거슬러 오를 뿐 아니라 중세와 근세의 경계를 모호하게 잡고 있기도 합니다. 무릇 이론을 세우려면 논리의 대상에 대한 조작적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변화가 거의 없는 암흑의 시대였다고는 하지만 중세가 무려 1천년이나 되는 장대한 세월이고, 논의의 대상인 인문학 역시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아우르는 영역이라고 보면 주로 유라시아의 중세를 한권에 몰아넣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하물며 논의의 대상이 인문학에서 예술과 건축에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다보니 논점이 흐려지고,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이론에 대한 지나친 저항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중세라는 특정한 시기를 개괄한 뒤에 인도, 이슬람, 서양, 중국, 한반도 등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해당 지역의 중세를 간략하게 살핀 뒤에 사상, 문학, 예술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합니다. 일종의 비교문화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중세라는 시기의 특성을 이야기하다보니 논점이 섞이는데다가 저자의 주장을 앞세우는 관계로 개별 지역의 중세적 특성이 분명치 않아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사에서의 중세를 삼국시대에서 고려까지로 본 저자는 조선이 오히려 중세보다 암흑기였다고 주장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중세사를 논함에 있어 근대를 넘어 현대까지 끌어다 비유하는 것도 적절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심지어는 2019년에 시작한 코로나 대유행이 1980년대 이후 생긴 지구화 정책이 초래한 미증유의 대유행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길게 보면 16세기에 시작된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라는 주장은 사태의 본질을 오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우한폐렴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하여 중국의 책임을 면하게 해주었지만, 코로나 대유행의 흐름은 분명 중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책이다. 박홍규의 '또 다른 책들'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섭렵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돌려까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의 인문학적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들에 정면으로 '비평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예리하게 벼리고선 말이다.
각설하고, 1권에 해당하는 <인문학의 거짓말>이 '고대 인문학'을 돌려깠다면, 이 책은 '중세 인문학'에 관해서 사정없이 돌려까고 있다. 일단 '중세'라고 하면 으레 '서양'만을 떠올리기 일쑤인데, 이 책에서는 서양뿐만 아니라 인도, 이슬람, 중국, 한반도 등의 중세 인문을 다각도로 다루고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한참 낯설 판인데, 아예 '서양의 중세'는 이 책의 일부일 뿐이고, '비서양의 중세'를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충 짐작이 가시는가.
하지만 '중세'라고 해서 모두 곳에서 '서양의 중세다운 것'은 절대 아니다. 시기적으로 비슷하더라도 다른점투성이고, 역사적으로 유사한 점이 엿보이더라도 그 원인과 결과마저 유사하지 않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겨우 박홍규의 비평의 칼날에 정면으로 얻어맞는 충격을 받지 않고 읽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쯤되면 이 책의 내용이 매우 궁금하실 테지만, 마땅히 소개할 내용을 고를 수가 없다. 고를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 책, 자체'가 전부 생소한 내용으로 범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충격적인 흥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내용들이 나름 '전문가'들이요, '대학 교수'이신 분들인 탓에 실명을 거론하면 실례가 될 정도로 돌려까고 돌까대고 있다. 하긴 저자가 '대학 교수'이니 그 친구나 지인들이 전부 '대학 교수'가 아니겠나.
진보적인 견해를 전혀 감추려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적'으로 '기존의 학설'을 탄탄한 논리로 까대는 통에 읽어가는 내내 숨가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가볍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묵직한 한 방으로 '지인들 또는 친구들'일지도 모를 '그 분들'을 하나하나 근거를 대며 잘근잘근 밟아주고 있다. 개중에는 내게도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도 사정없이 두들겨 부수는 통에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조곤조곤 까대는 '박홍규의 썰'을 읽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마력을 뿜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단맛과 쓴맛을 동시에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의 근거가 '나의 상식'과 죽이 맞을 경우에는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지만, 반대로 '나의 상식'과는 정면으로 대치하는 경우에는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간만에 승부욕이 돋는 책을 만나 즐겁기 그지 없다. 전적으로 '저자의 편'에 설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그 당당함에 박수를 보내면서 말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의 자격으로 쓴 리뷰입니다
여느 철학과는 다르게, 흔히 인문학이라고 하면 나름 인류사 모든것을 포괄한 것 뿐만이 아니라, 무언가 현실의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필요한 (어느) 실질적인 가르침을 얻기 수월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들여다보았을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의 모습은 앞서 기록한 것과는 반대로, 각각의 현실에 있어서 이용당한 인문학의 모습을 들추고, 지적하고, 보다 올바른 모습의 인문학이 어떻게 정의되고 활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 나름의 믿음이 굳게 자리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이처럼 나 개인의 학습과 인식에 있어서도, 흔히 지성을 마주하려는 시도에 비추어 흔히 '대세'를 따르려고 했다. 그야말로 학교의 필독서로 그리스.로마신화가 추천되고, 정작 조국의 역사와 철학을 마주하기보다 서양의 고대철학을 접하려고 했으며, 더욱이 고대 이집트 등의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서양세계의 정복과 전쟁과 같은 소위 영광의 시대라 포장되어 온 서양사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결국 이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리 될 수 없었던 다른 문화권(문명)에 대한 비판의 눈초리를 보내며, 이른바 '학문의 권장'에 고개를 끄덕이던 때가 젊은날의 나의 모습이였다. (아니,그것이 세상의 상식으로 통할 때가 있었다.)
물론 저자 등이 그 흐름을... 역사를 부정하라는 메시지를 위해서 이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 그리고 더 나아간 미래의 인류를 생각하며, 이른바 인문학은 보다 참된 인간의 가치를 빛낼 더 높은 인식을 주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학문이 되어야 마땅하다. 는 것이 어쩌면 이 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감상이 든다.
서양 고대가 그리스.로마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의 역사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기보다는 위대한 역사로 숭상해왔다.
159쪽
때문에 점차 비평을 넘어서 드러나는 주장에 따르면, 저자 개인의 삶 뿐만이 아니라, 이 책의 주장에 이르는 많은 것이 매우 진보적인 것으로도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강대국의 논리와 승자의 논리가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 속에서 결국 인문학의 가치 또한 그에 따른 변명거리를 제공해 왔다. 예를 들어 '제국의 길'을 언급한 그리스의 페리클레스의 인식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애써 외면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게다가 흔한 역사가 아닌, 그 결과가 낳은 인식에 있어서도, 인문학은 계급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문명간의 선진과 야만을 나누는데 쓰이며, 세상에 갈등과 차별을 낳았고 또 그것이 폭발한 전쟁을 정당화하는데도 쓰인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때 저자는 이 모든것을 시대의 흐름 중에서 '최선'을 선택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닌, 오롯이 인문학의 거짓과 타락?이라 주장하는 것 같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느낀 진보의 메시지 또한 지금까지 의심치 않았던 많은 교훈과 가치에 대한 비평과 지양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였다. 그렇기에 이에 그 메시지를 마주하는 독자들 특히! 국가의 존재와 사회를 결집시키는데 있어서 활용된 (상식이라 생각되어진) 현실 속의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지 나는 그 감상이 사뭇 궁금해졌다. "희망하는 모든 민족이 독립의 길을 걸어야 평화와 인권이 보장된다"는 말을 혹 중국 등에 넌지시 던져보면 어떠한 반응을 할까? 물론 개인적으로 그 주장이 오롯이 어리석다, 비난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은 힘의 논리 위에 드리워진 불평등, 번영을 위한 희생과 강요, 그리고 자칫 최악으로 흘러갈 상황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정의론의 하나로서, 이를 인문학이란 더 높은 것을 향하는 추진체가 아닌, 최악을 막는 브레이크로서 생각하는 '나'는 분명 저자와는 다른 생각과 정의를 가지고 있다. 새삼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