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저/박지원 원저
다산 정약용 저/오세진 역
김도환 저
숲노래 책읽기 2021.3.30.
인문책시렁 173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박홍규·박지원 이야기
싸이드웨이
2019.12.5.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박홍규·박지원, 싸이드웨이, 2019)는 열린배움터에서 길잡이 노릇을 하는 삶을 이루기까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읽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지으려 했는가 하는 발자국을 들려줍니다. 글님으로서는 틀(법) 곁에 꽃(예술)을 놓아야 비로소 이 나라가 거듭나리라 여기는 배움길이자 가르침길이었다고 합니다. 틀을 반듯하게 세우더라도 꽃을 곁에 놓지 않을 적에는 그저 딱딱하거나 차가운 쇳덩이에 그친다고, 꽃이 피어날 틈을 두는 틀이어야 하고, 꽃을 돌보는 손길로 삶을 가꿀 줄 아는 틀이어야 한다고 여긴다지요.
이야기를 들려주는 님은 틀(대학교) 쪽에 서서 일합니다. 그곳에서 마주한 딱딱하고 차가운 쇳덩이를 바꾸거나 고칠 만한 길을 생각하지만, 좀처럼 틈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틀(권력) 쪽에 서고 나면 주머니를 그득히 채울 만하기에, 숱한 사람들이 겉으로는 바른말(정의·진보)을 내놓지만 속은 빈 겉발림이기 일쑤라고 합니다.
틀이 아닌 쪽은 어떤 삶일까요. 틀에 들어서지 않기에 가난하거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아프거나 슬픈 삶일까요. 틀에 서서 주머니를 꿰차기에 외려 마음이 가난하고 고되고 벅차고 아프거나 슬픈 길이지는 않을까요.
2021년에 고흥군청 코앞에 높다란 잿빛집(아파트)이 잔뜩 들어섭니다. 전라남도에서도 귀퉁이라 할 이 시골자락 군청 코앞 잿빛집은 한 칸에 3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놀랍지요. 시골 읍내에 높다란 잿빛집까지 올려야 할 만큼 ‘시골에 집이 없’을까요. 시골에서도 잿빛집을 올려야 ‘서울을 닮은 살림(세련된 도시문화)’이 될까요.
틀이 나쁠 까닭은 없습니다. 그저 틀만 있고 꽃이 없다면, 풀 한 포기가 돋을 틈이 없고, 풀꽃을 둘러싼 숲이 없다면, 그 틀은 언제나 딱딱하고 차가운 나머지 아무런 숨결(생명)을 못 낳습니다. 숨결을 못 낳는 곳에는 사랑이 없기 마련이고, 사랑이 없는 데에는 새롭게 날갯짓할 생각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집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책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돈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일꾼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햇볕이나 비나 바람이나 바다나 들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누구나 넉넉히 누릴 만큼 다 있습니다. 틀을 세워서 혼자 주머니에 쑤셔넣으려 하니 모자라 보일 뿐입니다.
살림하는 사람은 틀을 세우지 않아요. 살림을 하기에 삶을 지어요. 사랑하는 사람은 틀에 서지 않아요. 사랑을 하기에 사람다이 하루를 노래해요. 돈·힘·이름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직 돈만 밝히고 오로지 힘만 움켜쥐고 그저 이름에 얽매이니 바보가 될 뿐입니다. 꽃돈이 되고 꽃힘이 되고 꽃이름이 될 노릇입니다. 꽃손이 되고 꽃눈이 되고 꽃몸이 될 삶입니다. 틀(법·사회·정치·권력)은 이제 그만 읽고서 틈(꽃·풀·숲·사랑·살림)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그저 제가 읽은 책들을 저 나름으로 소화하고 정리했을 뿐입니다. 전혀 대단한 것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에요. (18쪽)
우리나라는 교보문고 정도 되는 대형서점에서도 대학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든가 전문적인 학술서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일본은 후쿠오카만 하더라도 그런 방면의 다양성은 훨씬 낫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교보문고만큼의 규모는 아니더라도, 그런 다양성을 꾀하면서 훌륭한 내실을 보여주는 서점들이 몇 군데 있어요. (56쪽)
중학교에 올라온 제게 대구라고 하는 공간은 너무나도 외로운 곳이었어요. 제 마음을 이해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으니 하굣길의 헌책방에서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었죠. 그때 헌책방 주인 분들은 저 같은 학생이 책을 샅샅이 헤집고, 몇 시간이나 구석에 앉아서 줄곧 그 책들을 읽는 것을 눈감아 주었던 것 같아요. (60∼61쪽)
우리나라의 법률 교육이라고 하는 게 철두철미 폐쇄적이고 도그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법률가가 되어도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하기란 대단히 힘든 법입니다. (92쪽)
서구의 경우 르네상스 이후엔 일반적인 지식 사회, 지식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책’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근대적 지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에서 교과서라고 하는 것이 미신적 권위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95쪽)
저는 바깥세상에 대곤 정의와 진보를 얘기하면서 자기가 속한 학문, 대학, 가정, 학연, 지연, 혈연을 너무 존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던 것 같아요. (125쪽)
우리나라의 대다수 학자는 번역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이 한글로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는 의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심지어는 그런 걸 꺼리는 것 같은 인상까지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137쪽)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내내 읽다 늙었습니다>입니다.
이 책은 주책공사 인☆그램을 보고 알게 된 책입니다. 처음 인☆그램 사진을 보고 제가 넘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님으로 착각을 해서 팔로우를 하게 되었답니다^^*
<내내 읽다 늙었습니다 > 이 책은 무조건 읽으셔야 합니다.
라는 게시글을 보고, '어? 김영하작가님이 이렇게 강하게 말하실 분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무조건 읽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알고 고니 김영하작가님을 1초 닮은 주책공사 책방지기님이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던 건. 책이 정말 좋았고 알찼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는 주책공사 책방지기님이 무슨 책을 추천하는지 꾸준히 참고하고 있어요^^ 팬입니다.)
이 책은 아주 어릴 때부터 독서에 사로 잡혀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이가 든, 책 제목 그대로 내내 읽다가 늙게 된 독서가, 박홍규 교수님과의 대담을 엮은 책입니다.(제목이 너무 멋진 것 같아요)
박홍규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책인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하신 분으로도 알려져있습니다. 책 중간에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그 과정이 나와있는데 읽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음..이분을 알면 알수록 "진짜다"라는 느낌입니다. 아는 것과 행함이 일치되는게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소로우에 감명을 받아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 삶을 실천하고, 서점에서 소소한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합니다. 평생동안 차를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시간을 걸어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자식들의 출세에 관심을 쏟기보다 물질적인 사람이 될까봐 걱정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로 지낸 한평생의 삶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딱딱한 법을 가르치는 교수였지만 예술과 인문학, 역사, 철학 다방면에 깊은 소양을 가지고, 법대에서 [품위있는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한 사람을 재판하여 죄의 무게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법학책을 달달 외우는 것으로 100프로 완벽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싶어요. 이론에 인문학적인 시각이 더해진다면 한사람의 행동이 다르게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요.더 나은 인생을 살수있지 않을까요.
이 분이 깊게 감명받은 <소로우의 월든>을 다시 정독해보아야겠습니다. 필사하면서 느릿느릿 꼭꼭 씹어서 읽고 싶어요. 이 책에 대한 리뷰도 남기겠습니다.
실천하는 독서가가 되고 싶은 분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 <내내 읽다 늙었습니다> 였습니다^^*
대학시절, 지금으로부터 벌써 십수년전이네요. 금요일 수업이 일찍 끝나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영남대를 다니는 친구에게 여행 겸 놀러를 갔다. 아직 친구 수업이 끝나지 않아 친구가 다니는 법정관(? 오래 되서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을 찾아갔다.
나는 이미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법은 무죄인가> 책을 감명깊게 읽어서 영남대에 재직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 시절 대학생이라면 다들 한겨레 신문 정도 읽어주고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듯이. 박홍규 교수님의 말이, 그 폼나는 고독이, 아웃사이덕적인 사고와 생김이 좋아보였다. 무턱대고 대학 사무실에 물어 수업을 하는 교실로 찾아들어갔다.
비록 책을 가져가지 못해 사인을 받지 못했지만 스타를 만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덥수룩한 수염의 법학과 교수와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 기억에 남는다.
전공인 노동법보다 다른 수많은 교양서적 저작으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는 법학계의 이단아 같은 교수님이다.
책 소개에도 박홍규 교수는 ‘영원한 이단아’라고 소개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집단을 사랑하는 사회인데 그 속에서 ‘개인’과 ‘독서’의 힘을 예찬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부르는 별명은 바로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다.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은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며(불화까지는 아니다, 의외로 단단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집중했던 박홍규 교수의 삶과 생각을 돌아보는 대담집이다. 정년을 마치고 이제는 진정으로 유유자적 '개인'의 삶을 즐기고 있는 교수님을 『아이돌을 인문하다』와 『산책하는 마음』을 쓴 박지원 작가가 2018년 겨울부터 2019년 여름까지 총 10차례에 걸쳐 대구와 경산에 있는 교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70을 바라보는 명예교수이면서도 오늘날까지 자전거를 타고 학교 도서관에 박혀서 책을 읽고 쓰는 사람, 박홍규 교수다.
그는 대학교수이면서도 대학의 교수가 누리는 기득권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을 그만두지 않은 채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노동의 존엄과 가치를 말했지만, 정작 그 자신이 현장의 노동자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한국사회의 가족주의와 가부장주의를 통탄했지만 동시에 그는 한 가정의 장남이자 한 가정의 가부장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 보수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북도의 정치와 문화를 비판했다. 박홍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 땅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물론 유학시절이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순적인 정체성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유를 얽매는 둔중한 중력을 알고 있고, 고독이 품은 위태로운 역설을 알고 있다. 그는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을 꿈꿔왔지만 그의 발은 족쇄처럼 이 땅위에 묶여 있다. 이상을 꿈꾸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 현실을 살아가되, 이상을 노래하는 사람, 자유인이고 싶되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인을 염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매번 책의 세게에 묻혀 살았다. 10대부터 책에 천착했고, 이제는 노년의 삶에 당도했다.
그의 손을 거쳐간 빈센트 반 고흐, 몽테뉴, 조지 오웰, 헤르만 헤시와 마하트마 간다, 알베르 카뮈와 카프카 등 선인들에게서 자기 자신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박탈된 자유의 흔적을 발견한다. 어떤 권력과 군중의 대세에도 휩쓸리지 않았던 자유의 흔적을.
박홍규의 삶을 가장 명료하게 간추릴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독서'다. 수많은 정체성으로 살아왔지만 그는 항상 '읽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150권이 넘는 책을 썼다. 2/3는 자신이 저술했고, 나머지는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박지원 작가와 박홍규 교수님이 10여 차레 만나 고독한 삶의 가치, 한국사회의 병폐,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총 네가지 주제에 관해서 '독서', '고독', '사회', '인간'이란 네개의 키워드로 재구성하고 있다.
박홍규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내보이고, 자신의 한계를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추천평 중에 정말 박홍규 교수를 잘 드러낸 일화 소개가 재미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일이었다. 총리 물망에 오른 사람들의 면면을 알면 알수록 참담함을 느껴야 했던 그 시절, 그는 어딘가에 다녀오는 길에 어느 역의 대합실에서 총리 후보자에 관한 뉴스를 봤던 것 같다. 선생님은 “저 사람 누구요?”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고 사람들이 “총리 후보인데요. 그 사람은…” 하는 순간 박홍규 선생님이 했던 말이 있다. “아! 내가 또 몰라야 할 것을 알고 말았구나!” 그때 이 칼럼을 읽다가 포복절도했다. 정말 가슴에 새겨둘 명언이었다.고 하는 추천평을 보고 나 역시 모처럼 만에 웃었다.
저 촌철살인의 말과 해학이란.
철저한 경상도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부딪쳤던 박홍규. 하지만 퇴임과 함께 호 초암을 따서 초암평화사상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는 1980년대 노동법 교수로 학회에 참여하지도 않고, 스스로 주류의 삶을 걷어차고 진보적 사상으로 노동법 교과서를 발간하고 노동법에 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법학을 전공한 나는 그의 교과서를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간간히 내가 읽던 교과서에 소수설로 소개되기는 했다.
대학시절 허름한 잠바 한두벌 외에 양복한 벌이나 구두 한결레도 산적 없이 책을 사모아서 대학 3학년때 쯤에는 만권(과장이라고 하지만)을 모았다고 한다.
아, 역시 세상에 독서 고수는 많다. 나도 직장인이 아닌 교수나 교사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나이가 마흔인 지금도 가끔(아니 많이)한다.
교수나 교사가 되어 책을 읽으며 고독을 즐기면서 살고 싶다. 사실 직장인에게는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솔직히 동양고전을 별로 읽을 필요도 없거니와, 사람들과 단절하면 너무나 힘들다. 선생님과 교수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조금 덜하다. 그들은 독립적인 연구실이나 강의실을 가지고 있고. 형식상 직급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은 조직과 멀어지는 순간 직급과 연봉을 포기해야 한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그러할 수 없음이 슬프다.
책을 좋아한 것도 읽은 것도 고독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그렇다. 가끔은 정말 집에 가서 혼자 편안하게 책 읽고, 생각하고 싶은데 회사에서는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우리가 정말 ‘고독하다’라고 하는 것, 즉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고독함에 대해서 혈연과 지연 등의 관습적인 관계, 즉 이미 맺어지거나 맺어지도록 운명지어진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내가 당연히 뿌리칠 수도 있고 외면할 수도 있는 관계이면서도,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겠다, 내가 그 사람과 같이해야 하겠다, 이러한 결단과 자성, 자각과 함께하는 미덕을 이야기한다. 그런 결단을 자발적으로 내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느 사람이 ‘고독을 선택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교수님은 비록 주목받는 대학생이고 열혈 독자팬이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단아였고, 외로움과 함께 했다.
제사를 싫어했고, 아내에게도 욕이나 폭언을 한 적이 없는 당시의 기준에 진보적인 사람, 아내와 싸우고 도서관으로 가출한 사람.
이제는 동양에서 말하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서 알아서 순하게 들린다는 이순을 넘어선 나이에 아직도 동양철학과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 대학 교수를 떠나 농부로 돌아간 사람. 하지만 그는 2019년 꽤 많이 지쳤다. 촛불정신으로 탄생한 정권이 무너지는 꼴을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다 결국 진보가 정권을 잡았고, 이제는 꽤 오랫동안 승기를 잡은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진보도 보수만큼 더러웠다.
아니 진보이기 때문에 더 나빴다고 교수님은 평했다. 최근에 진중권 교수처럼 진보에서 진보를 비판하면서 고립되어 있는 그처럼.
한국의 붕당이나 정당은 특정한 사건으로 생각을 달리하며 분열했다. 이제 진보도 그런 시점이 왔다. 솔직히 교수님같은, 유시민, 진중권, 조국 前장관 같은 사람들의 글을 너무 좋아해서 거짓말 보태지 않고 우리집에 100여권은 이들의 책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책의 진실에 대해서 나 역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조국 사태가 우리 사회에 위선적인 얼굴을 하고 있던 진보의 참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이미 기득권이었다.
저자 역시 그런 진보의 진영에 있었던 자신의 삶마져 부정하고 더럽다고 했다. 아니다. 적어도 교수님은 그러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은 있어야 한다.
저자 박홍규 교수님은 이제 인도로 떠나서 간디의 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했다고 한다. 작년 11월에 쓴 글이니까 두어달 여행하고 돌아왔을 수도 있다.
시골에서 닭도 키우고, 들깨도 심을 거란다. 그리고 한 시간을 걸어서 도서관에 가서 한 권의 책이라도 읽어야 할 책이 남아 있다면 읽을 것이고, 그리고 한 줄이라도 써야한다면 계속 써내려 갈 것이라고 한다.
교수님의 글을 앞으로도 더욱 자주 읽고 싶다. 이 대담집으로 교수님의 생활과 생각에 다가간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영남대 도서관으로 달려가 사인 받고 말씀을 나눠보고 싶다.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