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2022년 10월 21일
아이였을 때의 꿈은 하루 빨리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발견하기가 어려웠던 그 시절, 어른이 되어도 쳇바퀴 도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건 꿈에도 몰랐던 덕이 크다. 그와 함께 “난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를 수시로 외쳤다. 어떻게 살아도 그보다는 나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취해 보낸 시간들은 나에게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분명 나에게도 십대 시절은 존재하건만 오랜 시간이 흐른 탓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 했던 것과 유사한 고민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잘 보듬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또 하나의 바람직하지 않은 꼰대가 되어 그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 건 오로지 전문가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이란 말인가!
책 제목 <사춘기라는 우주> 만큼 사춘기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다. 혹자는 “사춘기와 갱년기가 다투면 갱년기가 압승을 거둔다”고도 하지만, 이는 그만큼 대처가 힘든 시기 중 하나가 사춘기라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 될 수도 있다. 내 사고에 기대어 타인을 판단하는 건 금물, 특히 사춘기를 통과 중인 아이들을 바라볼 땐 모든 기준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거대한 우주에 드리울 수 있는 잣대 따위는 존재치 않으므로. 어디까지 관대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는 다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나름 최선을 다해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음에도 어떠한 소득을 얻지 못했다는 푸념을 쏟기 바빴던 이들이라면 왠지 이 책을 향해 손을 뻗었을 듯하다.
청소년들을 위한 작품을 여럿 써온 저자다. 글이 곧 글쓴이를 닮을 필요는 없겠으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의 작품이 곧 작가 인생의 반영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성공은 자녀의 명문대 진학이라고 했던가. 어느 대학이라고 밝히지는 않았으나 어디에 견주어도 뒤쳐짐 없는 학교에 자녀 모두가 진학했다는 사실이, 씁쓸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싶어 밝힌다. 어찌 하면 자녀의 학업 성취도를 향상시킬 수 있을지, 엉뚱한 주제로 관심이 치우칠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이에 대해 말을 아꼈다.
그의 육아는 자유로웠으되 방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를 해야 한다며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놀도록 내버려 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컴퓨터 게임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자녀를 향해 컴퓨터를 끄라며 야단일 때에도 그는 조용히 물었다.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하는 것이냐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하기도 했으니, 컴퓨터 사용에 대한 아이의 의향을 물었고 아이가 두 시간이라 답하면 그 답에 책임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시험 성적에 대해서도 운운하지 않았는데, 이 부분에서는 꽤 높은 내공이 필요해 보였다. 자칫 무관심으로 비추어진다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성장했다. 자신의 결단을 부모가 존중해 줄 거라는 강고한 믿음은 한 아이가 올곧은 어른으로 자라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우주는 광활하다. 한낱 인간이 이를 이해하려 들었다가는 큰코다친다. 우리가 속한 태양계만 해도 무지의 영역이 넘친다. 사춘기가 우주가 맞다면, 우리는 어떠한 노력으로도 아이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를 포기해야 한단 의미는 물론 아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자녀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여기며 행동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이가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은 인생의 선배로서 아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수도 있겠으나, 역으로 아이에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 아이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끔, 그리하여 옳은 방향을 택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줄 줄 아는 어른,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누구보다도 나의 아이에게.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셍덱쥐베리는 <어른은 모두가 한 때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라고 어린왕자 첫 머리에서 말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른이 된 ‘나’ 역시 내가 청소년 이었을때는 어떠했는지 망각한 채 자녀에게 곧고 빠를 것만 같은 큰길로 가라로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황영미 작가는 자녀들의 청소년시절과 자신의 젊은 시절이야기를 에피소드를 통해 담담히 들려준다. 거기에 아주 별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감탄하게 하는 사춘기자녀 지도의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하고 소소한 주변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뭔지모를 위로를 받게 된다.
질풍노도의 청소년시절은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였고 그 느낌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 그리고 저자는 작가가 되기까지 공모전에서 여러차례 떨어지는 등 좌절을 겪었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실패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고 결국 성숙한 인간이 되는 마중물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많은 실패속에 살아간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의 그 말들은 따듯한 물처럼 마음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내가 도전하지 않았다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패배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열정이 패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거듭 실패하다 보니 패배에 대한 맷집도 장난이 아니다. 그러니 잘 나간다 싶을 때도 우쭐해한 적도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성공과 실패가 씨날과 날실처럼 엮여 인생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고난, 패배, 좌절은 인생에 주어진 당연한 덤이다. 우리는 그로 인해 분명히 성장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허술하고 구멍이 송송 뚫린 채 허둥대며 방황했던 나의 청춘시절을........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내가 내 자녀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는 것이다. 매사에 좀 더 충실한 모범생만으로 살아 갔으면 하는 (방황과 불평불만없이) 바램 말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왜 일까? 무엇 때문에...... 그 이유는 아마도 자녀와 제대로 된 심리적인 분리, 결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 신의 자식이다. 나는 이토록 훌륭하고 대단한 분의 자식을 키워주는 대리 양육자다. 이 귀한 아이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자녀와 심리적인 분리를 못해서 불화가 생기는 가정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자녀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독립된 인격체인줄 알면서도 심리적으로 떨어지지 못하는 분리장애... 그것이 자녀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고, 잔소리 폭풍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런데 자녀를 객관화시켜서 ‘나의 것’이 아닌 성인이 될 때까지만 대신 맡아 키워주는 사람이 부모라고 생각한다면 휠씬 마음의 짐이 가벼워질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서 자녀의 조언자 역할에 충실했다.
부모가 아이를 잘 이끌어줘서 입시에 성공하는 사례가 넘치지만 대학 이후의 남은 인생은 결국 아이 몫 아닌가?
그리하여 저자가 생각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몇몇 과정에서 실패가 없었다고 성공한 인생일까?
“그렇게 잘 달려서 과연 행복할까?”
스스롤 선택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실패했을 때도 남탓을 하지 않는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좌절해야 한다면 저 혼자서, 오롯이 좌절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른이잖아요. 아버지가 매번 이렇게 제 삶이 끼어들어서 좌절까지도 대신 막아주는 거, 싫습니다. 하지 마세요.”
저자는 강남 키즈라고 헬레콥터 부모에게 양육받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을 사는 모습을 조명해 보면서 결국 아이 스스로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어른이 되도록, 부모는 옆에서 지켜봐주고 조언자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혼돈속에서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부모들이 한 번 쯤 읽어보면 위안도 받고 또 자녀교육에 지침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