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 밀러 저/정지인 역
이창현 글/유희 그림
김초엽 저
팀 페리스 저/박선령,정지현 공역
엠제이 드마코 저/신소영 역
최인아 저
[판권의 뒷면] 누구의 삶도 흔하지 않으니까 -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2023년 01월 31일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도망가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킨 큰언니들.
지키기만 했나. 발 벗고 나서 스스로의 삶을 가꾼 큰언니들.
근데 그 가꿈이 '노동'이라는 게 이 책의 키포인트.
책 읽고 나면 키포인트의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큰언니들의 진짜 이름은 '엄마'라는 이해, 공감, 미안심에서 기인한 부끄러움, 뭐 그런 울 것 같은 감정으로.
인터뷰집인데, 인터뷰를 마친 후 '인사이트'라는 정리 페이지를 마련해둔 게 좋았다.
구술로 짐작해 본 한 사람의 인생이 통계를 통해 당대 사회적 배경을 다시 읽을 사료가 되어주거든.
법률을 되짚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도 주거든.
함부로 하찮게 다루는 노동.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그 노동의 수행자를 '특정 연령층' 혹은 '계급'으로 타자화하는 사회적 합의. 여기에 조곤조곤 설명해주거든. 이 노동의 중요함 특별함 소중함을.
그러니까 인마들아, 연탄재 막 발로 차고 그르지 말라고. 어? 청소해 주시고 경비 서 주시고 말야. 을매나 힘드셔. 잊고 있었겠지만, 그분들 다 집에 돌아가면 소중한 엄빠야 인마들아. 인제부텀 잊지 말자.
이 책 도비라 디자인이 되게 멋지다.
"난 걍 집에서 살림하고, 애 보고, 남편 내조하고, 잠깐 알바하고, 뭐 한때는 직장도 나갔고, 과수원도 개척하고, 식당을 운영한 적도 있지만서도 딱히 한 건 없어."라고 말하는 한 마디로 '집사람'이라 생각하는 엄마들에게 직업을 붙여 명함을 만들어줬다.
이를테면 평생 아픈 시부모 봉양하신 분에게는 'a.k.a 요양보호사' 이런 너낌으로.
아, 진짜 멋진 인터뷰이가 있었는데 이 분 얘기는 꼭 남겨두고 싶다.
"(명함이)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
크.
이 문장에 도착했을 때 미간 붙잡고 '크'만 백 번 연발했다.
진짜 멋지지 않나요. 내 자신이 명함이라니.
다 읽고 나서는 '나도 울엄마 명함 한 번 파 줘볼까?' 가벼운 마음을 가졌더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 동공지진 대차게 일어났다.
왜냐하면 딱히 생각나는 직업이 없기 때문에.
아니 왜? 울엄마 아직까지 직장도 다니시는데 왜지?
엄마의 노동을 폄하하거나, 엄마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엄마가 잘 하는 것. 엄마가 일생을 바친 것 등을 도저히 판단 못하겠다.
엄마에게 중요한 우선순위 같은 거 아무리 떠올려도 매겨지지가 않는다.
엄마의 삶이 객관적으로 봐지지가 않아서 그런 걸까.
이거 나한테 좀 충격이고, 두고두고 엄마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의 은혜로운 작업은 영상으로도 기록됐다. 에피소드 별로 영상 다 있다.
유튜브에서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빠질 수 없는 리뷰 속 코너!
밑줄 그은 문장들도 옮겨둡니다. 츄라이츄라이.
36페이지 / 손정애 님
일을 계속하는 사람은 그게 재능이 되고 다른 걸 불러오니까 일은 손에 놓지 말고 가능하면 하는 게 좋다고 봐요.
109페이지
코로나19 이후 필수노동자들의 처우는 조금 나아졌을까. 법은 만들어졌지만 달라진 건 없다. 2021년 11월부터 필수업무 지정 및 종사자 보호·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지만 아직(2022년 3월 기준) 필수업무 범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의만 무성했던 '필수노동 보호방안'은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같은 기초적인 질문에서부터 막힌 상태다.
143페이지
정성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성인지데이터센터장은 "노동시장에 이제 막 진입한 청년들만 놓고 보면 임금이나 비정규직 비율 등에서 눈에 보이는 격차가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청년 노동 시장 자체가 워낙 불안정해졌고 일에 대한 관점도 이전 세대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 세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경험하는 차별을 파악하려면 똑같은 출발선에 서 있었던 남성과 여성의 경력 개발 경로가 달라지는 '과정'을 봐야 하는데, 현재로썬 이를 통계적으로 추적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182페이지/ 김춘자 님
그는 답답할 때면 들로 산으로 다닌다. "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이상해져부러.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들로 나가. 나가면 마음이 편항께. 정 답답하면 저그 나가서 소나무하고 이야기를 혀. 소나무야 소나무야 너는 어찌 이리 건강하냐. 나는 마음이 이래이래. 소나무하고 말하고 갈대하고 말하고... 나는 진짜 듣도 안 하고 보도 안 하고 그라고 살았네. 그래야 쓰겠다 싶어서."
더 옮기고 싶은 인터뷰가 많은데 여기까지만 정리한다.
나머지는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중요한 마침표.
이 책이 나에게 오래 생각해 보라 던져준 인사이트는 146페이지의 이 한 문장이다.
차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올 해 상반기에 읽은 비문학 중 가장 최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일은 하지만 명함이 없는 그들의 이야기.
우리나라 필수노동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고령층 여성들은
불안정한 고용환경과 적은 임금 등 열악한 조건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일을 소중히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행해나간다.
책을 읽다가 두어번 눈물이 나더라.
모든 일 하는 자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