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저/박소현 역
김초엽 저
이수연 저
황모과 저
월리 코발 저/김희진 역
프랑수아즈 사강 저/김유진,백수린 역
한 작가를 알고 그의 작품들을 따라 읽는 일은 즐겁다. 그 작가가 살아 있으면 더 좋은 일이다. 앞으로 쓸 작품을 기대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작가라도 그가 살아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그것 나름대로 멋진 일이다. 독자는 그가 남겨 놓은 이야기를 읽으며 현재를 살아가면 된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으로 알게 된 곽재식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있다. 한 달에 한 편씩 단편을 쓴다니 놀라운 일이다. 미숙한 검색 능력으로는 그가 쓴 단편을 다 찾아서 읽을 순 없지만 출간된 책을 읽어도 시간은 신나게 갈 것 같은 예감이다.
『토끼의 아리아』에는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렸다. 수백 편의 단편 중 선택된 작품은 아홉 편. 모두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들이다. 과학, 물리, 화학, 열역학, 감마선, 주식, 판테르 발스 반발력, 전자의 비편재화 현상, 4차원 따위 몰라도 줄거리를 따라 읽는데 무리는 없다. 원체 멍청하고 이해력 부족한 나도 『토끼의 아리아』의 실린 단편을 읽고 재미, 신선함,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라면 게임 끝났다. 한때 SF를 읽어보려고 노력은 했다. 웜홀, 에너지, 공간, 텔레포트 이런 기초적인 단어들만 기억나는 것 보면 제대로 읽지는 않은 모양이다.
현실 세계를 그린 오밀조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SF는 나랑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우가 포도를 먹지 않은 이유를 대는 것과 똑같다. 『토끼의 아리아』에 나오는 첫 번째 작품은 『숲속의 컴퓨터』이다. 회사에서 땅을 매입하라는 명령으로 폴란드의 산속에서 '나'는 컴퓨터와 대화를 한다. 1984년에 소련에서 실시한 비밀 연구 '알렉세이 표트로프스카 사업'이라는 지극히 소련스러운 이름을 가진 연구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는 컴퓨터와. 요즘 말로 알박기를 하고 있는 숲속의 집에서 스스로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서 인간의 감성과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을 가진 컴퓨터는 '나'의 멍청한 질문에도 꽤 괜찮은 답을 해준다. '나'의 행동반경을 예측하고 스스로 광활한 인터넷 세계로 사라지면서까지'나'의 연애 사업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맥주 탐정 시리즈의 첫 이야기라고 알려진 「토끼의 아리아」는 수궁가를 재해석한다. 이 작가의 특징은 옛날이야기를 읽으며 현대적인 버전으로 재해석하는 걸 즐겨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란 원래 입에서 입으로 그러다가 글로 쓰이고 쓰이다가 다시 쓰이고 돌고 돌아 더해지고 조금씩 바뀌는 것이 아닌가. 간을 내놓으라는 무지막지한 대기업 회장의 요구에 엿을 먹이려다 도로 엿을 먹은 '나'가 왜 매일 맥주를 달고 사는지 비밀이 드러난다. 술김에 입맞춤 한 그녀와 잘 되기를 바란다.
읽으면서 더럽고 경악했던 이야기는 따로 있다. 마지막 반전이 훌륭해서 봐준다. 「흡혈귀의 여러 측면」은 어떻게 연구비로 여자 친구의 속옷을 사고 자동차를 굴리고 지옥에서나 살 것 같은 액수의 집을 살 수 있는지 고민하는 송진혁 교수가 나온다. 맥주 탐정이 소설의 마지막에 등장해 경악을 선물해주고 떠난다. 대학원들에게 영수증 처리나 시키면서도 뻔뻔함을 유지하는 송진혁 교수, 어쩌면 좋을까.
「로봇복지법 위반」은 아직 다가오지 않을 먼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로봇과 인간의 삶이 공존할 수 있을까. 로봇에게도 마음이 있을까. 신형 로봇이 구형 로봇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면 믿을 수 있나. 폐기되지 않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검색하고 자료를 활용하는 로봇에게서 마지막 희망을 본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지구 폭발이 86년 남지 않은 미래 모습을 그린다. 서기 연도가 폐지되고 지구가 없어질 때까지 남은 기한으로 불리는 잔기 연도를 쓰면서 사람들은 무력감, 히스테리를 겪는다. 세상은 적색 경제가 시작되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자는 가족계획법이 실행된다. 자손을 남기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들이 지구 폭발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나'와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암울하거나 어둡지 않다. 지구 폭발이 86년 남아도, 눈이 보이지 않아 절망 속을 헤매도(4차원 얼굴) 곽재식의 인물들은 살아 나갈 방도를 찾는다. 뇌 활동 측정을 낮게 받을 묘수를 알려주고(빤히 보이는 생각), 얼토당토않은 연구 계획서를 보내 연구비를 지원받아 터무니없는 돈을 박에서 꺼내고(박흥보 특급), 나보다 한두 문제 더 맞아서 일등만 하는 친구를 끝까지 이겨 먹지 못해 억울해 하는(박승휴 망해라) 인물은 소설 속 인물이지만 주변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다.
긍정적이고 착하고 남에게 큰 소리 내지 못하지만 뻔뻔하고 유들유들한 면이 숨겨져 있는 사람들. 옛날이야기의 장점은 판본이 많아 교훈도 가지각색이라는 점이다. 당장 수궁가만 해도 토끼, 자라, 용왕의 관점에서 주제가 다르게 해석된다. 구비구비 흘러온 이야기는 한 작가의 즐거운 상상력으로 탄생한다. 이야기의 원형을 떠올리며 독자는 환희한다.
기가 막혀서 슬프다, 그런 느낌이다. 상쾌하지는 않은데 시원한 맛은 있고, 답답한데 피식 웃게 되는 순간도 맛보고. 현실에서 아주 먼 이야기인 듯 싶다가도 바로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도 있고, 내게 닥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데 절실함은 멀고. 나는 이 작가를 응원하는 독자이므로 좋게만 보게 된다. 이것도 역시 어쩔 수 없다.
말 잘하는 남자 같다. 글을 읽는데 수다스러운 남자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듣고 있는 것 같다. 신기할 정도로 늘어놓는다. 이런 게 재주이겠지. 소설가가 되는 사람의 특성일 테고. 한 마디로 '그래' 할 것을 적어도 수십 장 이상의 글로 써서 독자로 하여금 '그렇구나' 하게 만들어 보이는 힘.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숨찬 수다를 들은 뒤에 끄덕이게 되는 각각의 의미.
못된 사람들 참 많다. 자기 이익 챙기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죄를 짓는 그들은 살아 생전에 벌을 받게 될까? 받았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꼭 정의로운 대로 흐르지는 않더란 것이지. 게다가 이렇게 빌어 보는 나 같은 사람도 종종 정의에 벗어나는 일을 하거나 생각을 하기도 하니,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이른바 그러한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터.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도 자신에게만은 숨길 수 없기도 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싶어도 아프게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통쾌한 복수로 갚아 주지도 못했는데 흐지부지 스스로 무너지고 사라지는 나쁜 사람들의 결말을 읽다 보면 허탈해지기도 하고, 세상 다 그런가 보다 체념도 된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뭘 그리 많겠는가. 또 내 힘이 아니어도 해결되는 일이 기대 밖으로 많기도 할 것이고.
재미있게 읽고 있다. 더 바랄 것 없이 지금처럼 계속 읽을 수 있기만을 빈다.
제대로 활동하는 국내 SF작가는 그야말로 희귀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나오면 SF 부흥을 위해서라도 꼭 사게 된다.
주목받는 작가 중 한명인 곽재식 작가의 이번 작품집은 기획은 괜찮았는데,
완성도들이 다소 아쉽긴 하다.
국내 문학계가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특히 SF 분야는 뛰어난 신성들이 많이
등장하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박승휴 망해라>라는 단편이 가장 인상깊었다.
작가 - 곽재식
아홉 개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SF 단편집이다. 기발한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과학적인 설명이 다수 들어있는 게 특징이다. 음, 저자의 약력을 보니 이과출신이다. 그런 거였군!
『숲 속의 컴퓨터』는 주인공이 폴란드의 어느 시골 외딴 숲에서 발견한 인공지능컴퓨터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 컴퓨터와 이를 따를 것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주인공. 스스로 성장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를 보면서, 스카이넷의 결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망상을 해본다. 아, 나도 돈 벌게 해준다는 컴퓨터 만나고 싶다!
『박승휴 망해라』는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뇌를 판 한 남자의 과거 회상으로 시작한다.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혼자 라이벌로 생각한 '박승휴'를 이기겠노라 평생을 바친 주인공. 그는 아무도 해내지 못한 우주 정복을 해보겠다고 결심하는데……. 걷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또 그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불쌍해 보이는 주인공이었다.
『토끼의 아리아』의 주인공이 바에서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그는 한국의 한 CPU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다른 기업에 회사 기밀을 팔아넘기려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다. 하지만 이건 거대한 음모였으니……. 읽으면서 대기업과 정부의 만행과 여론몰이를 하는 언론, 그리고 거기에 놀아나는 대중의 무능함에 화가 나는 이야기였다. 현재도 있을 법한 이야기라 더 그런 모양이다. 하아, 진짜 이런 일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고, 현실에서는 안 일어나면 좋겠다.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박흥보 특급』는 고전 ‘흥부와 놀부’를 패러디한 작품인 것 같다. 망할 것 같은 아이디어에 투자를 해준다는 얘기에 솔깃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과연 제비 다리를 고쳐주면, 나중에 돈이 들어있는 박 씨를 물어다 주는 걸까? 너무도 유쾌한 결말이었다. 어디 다리 다친 제비 한 마리 없나 찾아봐야겠다.
『흡혈귀의 여러 측면』에는 ‘토끼의 아리아’의 주인공이 유네스코 감사원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연구비를 횡령하는 교수가 주인공이다. 횡령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뉴스에 등장하는 여러 비리 사건이 떠올랐다. 하여간 세상은 넓고 나쁜 놈은 엄청 많다.
『빤히 보이는 생각』은 어느 날 옛사랑의 방문을 받은 남자가 주인공이다. 오랜만에 연락한 그녀는, 자신을 빠른 시간 내에 멍청하다는 판정을 받도록 도와달라고 얘기하는데……. 어쩐지 ‘토끼의 아리아’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해결 방법은 달랐다.
『로봇복지법 위반』은 로봇이 보편화된 시대가 배경이다. 어느 순간부터 로봇에도 감정이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로봇의 복지에 관한 법이 제정된다. 이 때문에 감정이 있는 로봇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무차별적 폐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주인공 로봇은 그 판정을 받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데……. 감정이 있는 구형 로봇을 폐기하기 위해, 성능이 떨어지는 신형 로봇을 만들어낸다는 게 너무 아이러니했다. 같은 로봇끼리 파괴해야하니, 감정을 없애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압박면접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주인공 로봇을 보면서, 인간보다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로봇은 왜 살아남고 싶었을까? 마무리가 통쾌했다.
『4차원 얼굴』은 사고로 시력을 잃은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노인이 등장한다. 그 친구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것을 남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4차원의 그림을 남기게 되는데……. 사실 프로그램 응용이야기가 나오는 순간부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뼛속까지 문과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 정해진 미래가 배경이다. 이때부터 잔기, 그러니까 지구가 사라지는 날을 카운트 다운하는 연도를 사용한다. 이후 모든 것은 바뀌었다. 아이를 낳지 않으니 관련 사업, 예를 들면 산부인과를 시작으로 소아과, 어린이집, 학교 등등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데……. 어쩐지 생각하면 암울한 미래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기도 했다. 과연 그런 상황이 되면, 난 어떤 선택을 할까?
작가의 약력을 읽어보자. 그는 KAIST에서 원자핵 및 양자 공학을 배웠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는 이론화학을 전공해 현직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왕성한 필력으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색다른 소재를 다루는 인간미 있는 글을 써왔다. 이상은 알라딘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쌓은 전문지식이 방대한데다 머리도 좋아 소설까지 쓰는 사람들이 있다. 번뜩이는 소재를 찾아내고 그 위에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튀어나온 부분은 깍아내고 토대에 논리의 땜질을 더해 기울어진 곳을 바로잡는다. 아마도 이들에게 소설 쓰기는 논문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과 인간을 너무 도식적으로 다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들에게 소설은 일종의 지적유희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발가 벗기는, 세상을 꼭대기서부터 바닥까지 한 방에 꿰뚫어버리는, 뜨거운 뭔가가 부재한다는 말이다.
이제 <토끼의 아리아>에 대해 얘기해 보자.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 대충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알 것이다. 싸가지 없게 말하면 이 책은 세상을 겉핥고 있다.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다. 인간의 모순적인, 다양한 속성이 공존하는 완전체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하는 기계 장치가 있을 뿐이다. 이마에 '악'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악'만을 연기한다. 이마에 '선'이라고 쓰인 기계는 오로지 '선'만을 연기한다. 이 짜여진 극본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플롯, 참신한 소재 혹은 넋을 놓고 읽게 만드는 입담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있는지는 여러분들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문장에도 딱히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바쁜 연구 생활 틈틈이 취미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지은 소설을 웹진에 발표하고, 출간까지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존경 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의 질이 저절로 올라가는 건 아니다.
차라리 하드 SF였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 바닥을 잘 몰라 순진한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다. SF도 대중화 되지 않은 나라에서 하드 SF라니. 책 뒤에는 작가가 각 소설을 쓰게 된 경위가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소설을 의뢰한 단체의 편집 의도에 맞춰 소설을 써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잡지는 이러이러한 독자들이 주로 찾아보니 이러이러한 소설을 써주세요. 대중적인 이야기를 위해 작가 본인의 욕망을 상당히 억제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작가에게 나의 평은 대단히 억울하게 들릴 것이다.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니 나 또한 결과만을 보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토끼의 아리아>는 솔직히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인공이 처한 불합리한 현실이 고스란히 전이되 책장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작가의 의도대로 된 건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체념한 듯 무기력해 보이지만 사실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주인공의 초연함을 통해 분노 너머에서 기다리는 일말의 희망을 손에 쥐길 원했을 것이다. 대실패였다. 나는 화가 나 이야기를 고쳐 쓰고 싶었다. 모든 걸 잃었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시전했고, 그렇게 쟁취한 힘과 경험을 토대로 바닥부터 새로운 삶을 쌓아 나간다.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였다. 작가는 그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맥주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연작 소설을 썼고, 그 중 한 편이 이 책에 실리기도 했지만, 고작 한 편으로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좋았던 소설은 <박승휴 망해라>였다.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배짱 있는 제목을 내 소설에 붙이고 싶다. <조용하게 퇴장하기>는 소재가 아주 좋았다. 태양계 멸망까지 남은 시간 86년. 사람들은 서기 제도를 폐기하고 잔기(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이용하는 연도 표기 방식. 잔기 86년은 멸망까지 86년이 남았다는 뜻)를 사용하게 된 인류가 한 걸음 씩 다가오는 멸망을 기다리며 사는 내용이다. 문제는, 아주 좋은 소재를 너무 대충 써먹었다는 것이다.
최근들어 SF, 범죄 느와르 등 장르 소설에 지속적으로 도전 중이다. 사람들이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는 그게 대부분 실패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 앞서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실패를 토대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보석을 나에게 나눠주는 것도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