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형,지일주 저/인문학 유치원 해설
이어령! 교수, 장관, 작가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타계하기 전까지도 늘 민족과 국가의 앞날, 그리고 사람들에게 생각의 깊이, 사유를 이야기하던 사상가였다.
이어령 교수가 자신의 마지막 제자라 할 수 있는 김민희 기자에게 솔직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들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이어령 교수와의 5년여 세월, 100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통해 이 시대 최고 지성이라고 한 시대를 이끌었던 노교수의 생각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물음표가 있었기 때문에 느낌표가 생기는 거예요. 목마름 없는 지식은 고문이야.”
그는 어릴 때부터 늘 호기심에 가득차서 세상을 향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찾으며 살아왔다.
한국은 평전, 즉 한 개인의 삶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더해 평하는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이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같은 책들의 출간이 매우 적은 편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님이 이 문화를 개탄했다. 그래서 조금 다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평전을 집필했다.
우리나라는 평전보다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더 많다.
평전이 많지 않은 것은 아마도 탐구할 만한 특별한 인물이 많지 않아서 일테고, 특히 정치 논리 등에 갇혀 인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령 선생님도 기실 그런 면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군사정부의 후속격인 노태우 정부 초대 문화부장관으로 봉직했고, 그로 인한 진영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분명 있다.
그런 진영 논리를 넘어 이어령이라는 한 인물이 걸어온 치열한 80년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어령은 서울대 재학 시절부터 우상의 파괴, 분지필화사건, 불온 논쟁 등으로 당시 문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흙속에 바람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올림픽 개폐회식, 굴렁쇠 소년, 디지로그,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 자본주의 같은 사상으로 시대의 화두를 던지는 반항아, 참지식인, 논쟁가 등의 이명을 달고 살았다.
또한 문화부 장관으로 한 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외국어인 '로드 숄더'를 '갓길'로 바꾼 일이다. 애초에 '갓길'이라는 말이 이어령이 창시한 단어다.
원래는 노견(路肩)이라는 심히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도 노견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발족,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 계획 수립 등이 그의 재임 중에 실시되었다. 문화 바로 세우기 운동 전도사 같은 일이었고,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3부작도 그의 후견이 있어서 탄생했다. 조정래 선생은 그의 수필집 <황홀한 글감옥>에서 밝히기를 1989년 10월에 소설 태백산맥을 탈고한 뒤 아리랑을 집필하기 위해 1990년 당시 중국으로 취재를 떠날 때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내사 문제로 안기부에서 막아 출국에 문제를 겪을 때 이어령 장관이 먼저 조정래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부른 뒤 출국문제를 해결해 줬다고 한다.
태백산맥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항도 그가 의견을 내주어서 불온서적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되더라도 인간의 신체에는 사이버 세상의 논리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습니다.
디지로그는 단순한 감성공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속도와 정보의 속도를 어떻게 조정하고 조화시킬 것인가’가 디지로그 이론의 최종적인 해답입니다.
그의 사상이 곧 디지로그였다.
고인의 영면을 바란다. 나 역시 그의 저서를 읽으며 대학시절을 보내왔고, 지금도 읽고 있다.
뛰어난 글솜씨에 지금도 글이 촌스럽지 않다.
이어령을 잘 몰랐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시대의 지성'이 떠났다는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었다.
책에서는 창조적 생각이 왜 중요한지, 왜 끊임없는 탐구를 해야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의 상상은 과연 어디까지 닿을지 짐작할 수 없다. 시대의 지성이란 수식어가 정말 잘 맞는 사람.
책을 읽는 내내 뒷덜미에서 소름이 짜르르 끼쳤다. 한 시대를 함께 한 그를 제대로 알아뵙지 못해 죄송스럽다.
추천 지수는 생략, 다만 구성과 편집이 아쉬운.
선생님의 말씀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만 같아서, 추천 지수는 생략했어요. (인터넷 서점에 올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점수를 달겠지만요.) 평생 문화를 생각하신 선생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만, "이 책은 나에 대한 용비어천가 같은 책이 되면 절대로 안 돼."(p.368)라고 선생님께서 밝히신 것과 달리, 이 책의 편집과 구성은 답변자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서고 있어 부담스러웠습니다. 때문에 담담하게 서술되었을 때 더 매력적이었을 답변자의 생각이 질문자의 어설픈 구성으로 인해 다소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져 아쉬웠습니다.
이하 내용은 인상 깊게 접한 선생님의 문장들을 개인적으로 인용한 모음집입니다. 직접 책을 통해 생각을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 "나는 천재가 아니야. 창조란 건 거창한 게 아니거든. 제 머리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p.9)
★ (백만대군을 이끄는 장군이 될 팔자에 대해) "그런데 요즘 생각하면 그 사주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백만대군은 내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말(언어)이고 그것으로 공감을 함께 나눠온 독자들일 수도 있으니까. 칼을 그것보다 강하다는 펜으로 바꿔봐. 내가 휘두르는 대로 언어들은 내 명령에 따라 움직여왔어." (p.15)
★ "고독의 대가는 생각의 탄생이었어." (p.18)
★ "거리두기를 하면서 우리는 평소 잊고 있던 '거리'를 자각하기 시작했지." (p.22)
★ "평탄할 때에는 만인이 평등해. 욕망도 비슷하고 별 차이가 없어.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창조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커지지." (p.24)
★ "과연 나의 눈물이 남을 위한 눈물이 되었을까." (p.32)
★ "작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잖어." (p.58)
★ "나는 내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확신범이 아니여. 확신범이라면 유언밖에 더 남겄어?" (p.58)
★ "도서관에 가보면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얘기를 더 보태겠어? 다만 70억 지구인 중에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의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은 제각각 소중해요." (p.60)
★ "창조를 하려면 먼저 파괴를 해야 돼." (p.70)
★ "빈칸이 있어야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생기는 거지. 빈칸 없이 정확하게 말하면 끌어들이는 힘을 못 가져요." (p.107)
★ "문학이 언론이 되면 안 돼요. (...)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봐요. 그 '님'을 '일제강점기의 조국'으로 한정하면 그건 언론의 언어지 시의 언어가 아니에요." (p.124)
★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소원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이 하얀 원고지 위에서 숨을 거두게 하소서.' (p.137)
★ "사람들은 일회성 행사에 왜 그 많은 돈을 낭비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질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태어날 때, 죽을 때도 한순간이다. 그것을 위해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있지 않은가." (p.155)
★ "만인이 납득하는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니지. 낡은 생각이라는 증거니까." (p.158)
★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최고의 해결 방법은 긴장을 푸는 유머야." (p.214)
★ "궁즉통은 몇 천 년간 강대국 사이에서 견뎌온 한국인의 창조력이자 돌파력이지." (p.247)
★ "질투 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내가 비참해지잖아. 대신 그 사람을 돕는 거지. 그러면 천재의 작업을 같이 하는 거니까." (p.348)
★ ('독립된 주체'로 우뚝 서는 삶은 어떤 경지일까요.)
-하루를 살아도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삶이지. 누가 뭐라고 하면, 뉴스에서 무슨 보도가 나오면, 책 한 줄을 읽어도 뭐가 기이고 뭐가 아닌지를 제 머리로 판단하면서 사는 삶 말이야. 역사를 접할 때도 마찬가지야. 역사라는 건 안방 얘기 다르고 부엌 얘기가 다른 법이거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각 안방과 부엌에서 하는 얘길 들어봐. 안방 얘기 들으면 며느리 잘못이고 부엌 얘기 들으면 시어머니 잘못이지. 그렇다면 누가 옳은 거야? 그래서 지식인이, 지성인이 필요한 거야. 뜬소문, 가짜뉴스, 음모론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경험주의를 넘어선 냉철한 이성의 힘을 가진 지식인 말이야. (p.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