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엄청난 외적 성과는 탁월한 내적 성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2020년의 거대한 성공은 2000년의 작고 단단한 출발이 세월의 강을 헤엄쳐 건너서 불러일으킨 공명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예외적 행운이 아니라, 끊임없는 한계를 차례로 돌파하면서 여물어온 열매였다. 그 사이에 「살인의 추억」도 있었고 「마더」도 있었으며 「괴물」도 있었다. 「설국열차」와 「옥자」가 있었는가 하면 「플란다스의 개」도 있었다.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영화가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지만, 일곱 편 중에 평범한 작품은 없었다. 유머와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로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세계는 우리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20년이 흐르는 동안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이 개봉할 때마다 글을 쓰거나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복이었다.
---「작가의 말」중에서
#6∼7 기우가 계획을 설명하다 : 기정이 만들어준 가짜 증명서에 대해 기우는 서류만 미리 떼었을 뿐 어차피 내년에 연세대학교에 갈 것이니 위조가 아니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건 현재 행위의 정당성을 미래의 자격으로 보증하려는 논리다. 기택은 아들의 계획에 감탄한다. 하지만 일자리 접수와 대학 진학을 포함한 일련의 계획은 결국 허물어지고 만다. 계획이 통하지 않았던 것은 기우와 그 가족에게 미래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같은 계급에 속하는 근세는 그 지하 공간에서 나가려는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다.
---「기생충 189신, 장면별 해설」중에서
#82∼93, 82∼93-1 충숙이 짜파구리를 끓이다 :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연교로부터 전화가 오자 싸움은 일시에 중단된다. (「설국열차」에서 도끼와 몽둥이를 동원해 처절하게 싸우다가도 예카테리나 다리에 이르자 일시에 싸움이 중단되는 장면과 흡사하다.) 초인종을 누르고 허락을 요청하는 문광과 달리, 허락받을 필요조차 없는 진짜 주인 연교가 돌아온다. 기택 가족 혼자 차지할 줄 알았던 저택에 두 가족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돌아옴으로써 세 가족 공존의 부조리한 비극은 극에 달한다.
---「기생충 189신, 장면별 해설」중에서
이동진: 이번에는 인디언에 관해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영화 속에서 인디언에 관련된 부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감독님의 기본적인 생각을 듣고 싶은데요.
봉준호: 인디언과 산수경석에 대해서는 둘 모두 ‘A는 B다’라는 식으로 지목해서 이야기하지는 못하겠어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겠죠. 특히 인디언과 컵 스카우트와 모스 부호는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계층이나 계급, 사회의 여러 가지 모멘트가 말씀하신 것처럼 신랄하고 섬찟한 것들이 많은데 이건 박제된 박물관에서나 있을 법한 천진난만한 세계죠.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에 나오는 그 세계인 거예요.
이동진: 저는 사실 음악도 「문라이즈 킹덤」을 떠올리게 했어요.
봉준호: 뜬금없이 「문라이즈 킹덤」 같은 순진무구한 세계가 들어 있는 거죠. 연교가 설명하기에 적합할 듯한 세계 말이에요. 사실 연교는 머리가 나쁘거나 멍청한 사람이 전혀 아니에요. 단지 맑고 천진해서 사람을 너무 잘 믿어요. 그래서 이 모든 사달이 난 거죠. 모든 걸 침투하게 허용해서요. 다송이가 말하는 인디언, 컵 스카우트, 모스 부호 이런 건 기우와도 겹쳐 있는 부분인데, 이처럼 신랄하고 리얼한 현실 속에 약간 이상하고 동떨어진 세계가 들어 있는 거죠. 마지막에 모스 부호로 부자의 아련한 교신까지 이어지는 것이니까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제 역할을 하는 장치가 되었다고 봅니다.
---「「기생충」 대담_ 이동진×봉준호」중에서
윌포드는 비관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가 균형의 원리를 신봉하는 것은 그게 지고선이어서가 아니라 필요악이어서이다. “어차피 우리(인류)는 이 저주받은 쇳덩어리 기차 안에 갇힌 죄수들이고, 폐쇄된 생태계인 열차에선 균형이 필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만일 이 세계가 폐쇄된 생태계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가. 기차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말이다. 바로 거기서 세 번째 대비항에 속하는 인물들이 돌출된다.
그 둘은 커티스와 남궁민수(송강호)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서 크로놀을 두고 거래를 성사시킨 후 계속 같은 방향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언뜻 정반대 편에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같은 의도로 협력했던 윌포드-길리엄과는 정반대로, 동일한 지점을 향해 함께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던 커티스-남궁민수의 목표는 서로 완전히 달랐다. 커티스는 맨 앞칸을 바라보았지만 남궁민수는 옆문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둘에게서 대비되는 것은 방향이다.
---「뜨거운 계급투쟁과 차가운 사회생물학_ 설국열차」중에서
원래 강두는 시도 때도 없이 자는 사람이었다. 도입부에서 강두가 잠든 틈을 타서 세주라는 아이가 매점 물건을 훔치려다 포기하지만,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그는 계속 잠만 잤다. 그러나 “깨라, 좀, 깬 김에!”라며 면박을 주던 희봉의 코믹한 대사는 결국 강두의 태도가 된다. 그는 웬만해선 깨어나지 않지만, 일단 깨어난 후에는 깬 김에 계속 깨어 있는다. 매점에서 침을 흘리고 잠자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던 이 인물은 자기 아이를 잃은 후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깊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창밖을 주시한 채 남의 아이를 지키다가 깨운 후 밥을 먹인다. 그 아이 세주는 극 초반 그의 잠에 전혀 개입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더 약한 자를 먹일 수 있는 곳_ 괴물」중에서
「살인의 추억」의 프롤로그는 사실상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두만의 얼굴로 끝난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영화의 바깥을 바라보는 두만의 얼굴로 막을 내린다. 그러니 다시 한번, 「살인의 추억」에서 안과 밖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악은 영화 안의 이야기에도 존재했지만 영화 밖에서도 엄존한다. 그리고 영화는 눈 부릅뜨고 응시해도 현실의 악을 명확히 보아낼 수 없다.
영화에는 그런 통찰력이 없다. 그저 이야기 밖의 카메라를 응시하는 배우 얼굴을 통해서 영화의 면전에 악의 실체를 불러 세우고 싶어 하는 예술의 간절함이 있을 뿐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가닿는 곳은_ 살인의 추억」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