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중의 고전 두 작품이 만났다. 소크라태스의 <변명>과 카프카의 <변신>이 그 주인공이다. 작가도 작품의 제목도 누구나 한 번 이상 들어보았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두 작품을 읽고 내용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나도 모름에도 아는 척하며 살아온 부류였다. 아니, 아는 줄 알았는데 이번 독서를 하면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내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찌 인간이 모든 작품을 섭렵할 수 있단 말인가 싶으면서도 내심 부끄러웠다.
두 인물이 시대가 상이하듯 작품 또한 서로 다른 양상을 지녔다. 전작은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론하는 과정이 다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변명 이후 독배를 마시고 이 세상을 떠났다. 기록을 남기고자 하여도 시간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즉, 변명은 소크라테스의 글이 아니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분주히 움직인 탓에 오늘날까지 읽히는 기록이 탄생할 수 있었다. ‘변신’은 글쓰기의 달인과도 같았던 카프카가 직접 저술했다. 보헤미아 태생,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 이렇게만 보아도 배경이 복잡한데, 하필이면 이 인물은 1800년대 후반에 출생했다. 당대 유럽대륙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이른 죽음 덕(?)에 유대인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변명이 굉장히 현실적이라면 변신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인간이 뜬금없이 끔찍한 벌레가 되는 일은 상상 속에서도 쉬이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이토록 다른 두 작품이지만 소재는 ‘죽음’으로 동일하다. 살아있는 인물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당당함을 선보인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이미 예견돼 있는 듯한 죽음을 끌어안는다. 그에게 죽음은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존재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되며, 그 순간 그의 고결함 또한 힘을 얻는다.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인 그레고르 잠자 또한 죽을 운명이다. 형식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벌레라는 껍데기에 담긴 내용물(그레고르)은 전과 다를 바 없지만, 가족을 비롯한 여타 등장인물들은 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 마치 돈 버는 기계처럼 지내왔던 그레고르는 역설적이지만 벌레가 됨으로써 끝이 없을 법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 노동이 곧 그레고르의 존재 이유였던 터라, 더는 노동할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가치를 상실하고야 만다. 외면을 뛰어넘어 혐오의 대상이기도 한 벌레와 그레고르는 동격이다. 정체성을 잃은 불쌍한 그레고르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다.
‘죽음을 말하는 철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이는 이 책의 부제이다. 이 부분을 염두 않고 책을 읽은 탓인지, 내게 두 장르 사이의 차이는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측면이 보다 큰 울림을 선사했다. 세상과 타협 않고 죽음 또한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인 소크라테스, 결과적으로는 죽음의 원인이 된, 가족 구성원에게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관한 그레고르. 둘 중 과연 정답이 존재할까를 놓고 나는 고민했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동일하지만 결코 동일한 죽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누구도 실체를 알지 못하는데, 죽음을 두려워했다 하여 비겁하다 손가락질할 순 없다. 죽음을 향해 지금 이 순간에도 걷고 있는 우리로선 앞서 죽음을 경험한 이들을 그저 경외로이 바라보는 게 행할 수 있는 전부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요상한 게 유행하고 있다. 부모를 비롯, 가까운 지인 등에게 “내가 만일 바퀴벌레가 되면” 어찌 대해줄 것인가를 묻는 그들의 의도가 그저 즐기기 위함만은 왠지 아닐 듯하다. 혹자는 이와 같은 행태를 “’나 얼마만큼 사랑해’의 현재 버전”이라 칭했다.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은 건 모두의 공통된 욕구다. 소크라테스처럼 굴든, 카프카의 창작 인물처럼 굴든은 어쩌면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그 순간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한 게 어디 있겠는가! 우리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죽음이라면, 비록 즐기진 못하겠지만 끊임없이 접함으로써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특별한 인문학 독서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책 [생각을 바꾸는 인문학, 변명 VS 변신]에 주목하게 되었어요.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큰 빛줄기가 될 수 있는 인문학의 힘을 제대로 배워보고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만나게 된 이 책을 재미있게 그리고 진지하게 읽어보게 되어서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서툴고 쉽게 회피하기만 했던 나의 생각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인문학 책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보고 싶었던 이 책이었나 봅니다.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도 유명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것, 그리고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고뇌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라는 생각에 더 사색의 시간을 깊이 발휘해볼 수 있었다는 점도 꼭 말하고 싶어요.
고전을 읽으면서 깨닫고 느낄 수 있는 삶에 대한 가치와 인간의 존재 의미 등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들을 곱씹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허락받은 기분입니다. 삶에 대해서 더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통찰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부여받은 기분이기도 하고요~ 감사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또 오래오래 보고 느끼면서 책장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 이 철학서와 소설을 함께 수록하여 '죽음' 이라는 주제로 직접 비교해 읽어보며 철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른지 느껴볼 수 있도록 구성한 책을 읽어본다.
생각을 바꾸는 인문학, 변명 VS 변신
플라톤, 프란츠카프카
스타북스
B.C.399년,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인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당했으며, 자신의 사상을 버리거나, 독약을 마시고 죽는 사형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은 당시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과 전체 아테네 인들을 향해 한 연설을 제자인 플라톤이 재구성한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선택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만일 당신이 조금이라도 사회에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면, 죽느냐 사느냐의 위험을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선한 사람이 할 일인가, 악한 사람이 할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p049
소크라테스는 트로이 전쟁에서의 죽은 영웅들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냐며 반론하면서, 아킬레우스의 예를 든다. 헥토르를 죽이면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을 알면서도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살게 될까 걱정하였던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원수를 갚고 곧바로 죽임을 당해도 좋습니다. 살아남아 땅 위의 짐이 되어 뱃머리가 굽은 배에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어떤 자리에 있든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치욕 외에는 다른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정의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죽음을 두려워한 내가 신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지혜가 없는데도 지혜로운 자를 가장한다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로 마땅히 법정에서 소송을 받아야 옳은 줄 알겠습니다. 나는 신탁을 믿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지혜가 없으면서도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의미에서 죽음은 최대의 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이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죄악 중 최대의 죄악이라 믿고 있습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며,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일반 사람들과 이 점 역시 같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롭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저 세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솔직히 인정하는 점일 것입니다. (...) 따라서 나는 세상에서 악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선할지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을 것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대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신념을 지키고, 시민 상호 간의 합의된 약속인 법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하는 의무도 이행한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고 나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한 남성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사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죽음에 관한 주제를 건져올리려면 「변신」 한 권 만으로는 어려운 감이 있다. 「변신」 에서의 죽음은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가 죽는 결말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에서는 죽음만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곤 한다. 죽음, 존재의 불안, 운명의 부조리성은 카프카의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코드들이기도 하다. 카프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죽음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적기도 했다.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 란 제목으로 더욱 알려진 카프카의 편지글 문장인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의 의미 속에 또한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독서가 우리에게 강한 충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느냐고 반문했던 카프카는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충격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생겼던 상처가 심해져서 죽는다. 그러나 타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레고르 스스로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운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가족조차 경제적 이해타산이 얽히면 그 관계가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비판을 담았다고 해석되면서 「변신」 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소설로도 읽혀지고 있다. 가족과 직장으로부터 외면당한 한 개인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벼랑에서 삶을 놓아버린 듯한 결말... 이런 그레고르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살고 있을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과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속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문득 '인간이란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이 연이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 속 죽음을 분석하며 삶을 생각하게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책을 지원받고 읽은 후 직접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