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힘은 막강해지만
점차개인은 무력감을 느낀다.
인간 자신을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중인상깊었던 내용은 사랑에 관한 내용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지나치게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게 사랑하는 사람이며,
실제로는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애정과배려가 없는 사람은 항상 공허함과 불만을 느끼고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 밖에 없고 진짜 자아를보살피지 못한다.
지난 2018년 서울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나무생각 출판사의 부스를 찾았다가
에리히 프롬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설렜던 것도 잠시,
신간의 두께와 제목에 압도당해서 한동안 읽기가 두려웠지만
꼭 한 번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을 좋은 기회로 만나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이전작들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제를 관철해왔다.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네 가지 유형의 성격 유형을 보여주었다.
인간에게 내재된 ‘생산성’이 발현되지 못하면
수용 지향형, 착취 지향형, 저장 지향형, 시장 지향형
이렇게 네 가지의 유형으로 비생산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고
이것들은 단일하게 나타나지 않고 다양하게 섞여서 기질과 함께 발현된다.
이런 비생산적 유형과는 반대로
내면의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생산성’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기애’를 발휘하면 그 힘은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뿐더러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모든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자기를 위한 인간’이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고
그 어느것을 위한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게
에리히 프롬이 말한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인 듯하다.
사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가장 큰 고민거리는 ‘자아’였다.
지금도 물론 그 고민은 유효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어떻게 저렇게까지
잔인하고 이기적일 수 있나 하는 생각으로
성악설을 절대적으로 믿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다양한 인간의 유형들의 형태에서
내 자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원론적이지만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기에
타인을 품을 수 없었던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는 없겠으나, 그들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사실 그들의 존재를 애써 무시해왔다)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우선 내 자신의 모습부터 오래도록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산적인 ‘사랑’의 활동도 어느 정도는 해야되지 않나,라는 생각도 했다.
너무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달까...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한 에리히 프롬은
스스로의 모습을 제대로 진지하게 바라봤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싱클레어가 배웠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프란츠 크로머는 그가 알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악한 인물이었다. 충동적인 허풍에 이끌려 도둑질을 했다고 거짓말을 한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약점을 접혀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데미안을 만나 도움을 받을 때까지 고통과 갈등과 혼란의 시간을 겪게 된다. 가까이에서 보자면 그 사건은 비극이었지만 멀리서 본다면 희극이었다. '의심'의 시작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알을 깨고 나와 아브락사스를 향해 비상할 채비를 갖추게 했기 때문이다. '자신에 이르는 길'이라는 위대한 여정의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이야기다.
이기와 이타의 경계에서
시대와 국가를 넘어 우리나라에서까지 '데미안'이 사랑받는 것은,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과 의미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아의 세계는 완전하다. 사랑과 안전을 보장받는 동화같은 세계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하고 집단생활을 시작하며 우리는 묘한 괴리감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사회에서 마주치는 어떤 사람들은 '교과서의 예외'를 넘어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라는 경악스러움마저 떠올리게 한다. 한 쪽에서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찬양한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순의 상황을 경험하며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유행어는 이런 내면의 의구심을 반영하는 표현일 것이다. 친절과 연대를 꿈꾸지만 그것이 결국은 손해와 불편으로 돌아오더라는 경험의 반영이다. 혼돈과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에 가치를 두어야만 할까? 무엇을 미덕으로 삼아, 선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삶을 채워나가야 할까?
자신이라는 세계로 떠나는 여행
이 책 '자기를 위한 인간'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답을 찾아 떠나기 위한 모험의 문을 열어준다. 아니, 독자로 하여금 그 모험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제껏 옳다고 믿어왔던 것에 의문을 제시하며 내면의 질서를 뒤흔든다. 타인에 의해 복제되어왔던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종국에는, 자신만의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도록 만든다. 책장을 덮자마자 소설 '데미안'이 떠올랐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의 여정을 동경하도록 만든다면, 이 책은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나의 이성을 설득하며 여행의 자발적 의지를 이끌어냈다.
심리학+(윤리학+철학)이 던지는 자신을 향한 의문
7 궁극적으로 신경증은 도덕적 실패를 보여주는 징후다. ... 우리는 많은 사례를 통해 신경증의 징후가 도덕적 갈등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치료의 성공 여부는 환자의 도덕적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0 이 책은 윤리학과 심리학의 문제를 명확히 하려는 이론적인 시도다. 다시 말해, 독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의문을 품도록 유도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저자는 전작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현대인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을 분석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된 윤리와 규범과 가치의 문제를 분석한다. 이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학자다. 그런 그가 심리학적 문제를 넘어 윤리와 규범과 가치를 다루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개인이 경험하는 마음의 고통에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철학과 윤리학의 문제를 끌어와서 심리학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말하는 도덕과는 다르다. 따라서 신경증을 겪는 사람이 '비도덕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도덕은 외부에 의해 주어진 '권위주의적 양심' 그리고 인간 내면의 깊은곳에 자리한 '인본주의적 양심'에 기반한다. 저자는 강요된 양심과 내면의 양심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인본주의적 양심'을 따라감으로써 열어낼 수 있는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바로 생산적이고 조화로우며 충만한 삶에 이르는 길이다.
가치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18 현대인은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점점 더 큰 당혹감에 사로잡힌다. 끈엄없이 일하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행위가 헛되고 무익한 짓이란 자괴감을 어렴풋이 느낀다.
저자는 세계대전이라는 혼돈의 시대를 경험하며 자신의 철학을 완성했다. 논리적이며 이성적이었던 자국 독일인들이 파시즘에 휩쓸려 자유를 포기하고 전쟁에 나서는 모습은 그에게 적지않은 혼란을 던졌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시대도 '혼란'으로 치면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넘치는 정보만큼 확신은 줄어간다. 진실을 의심하기보다는 쓸모있는 주장을 취사 선택한다. 세상이 연결된만큼 비교는 일상이 되었다. 윤리와 도덕보다 가격과 효용이 우선시되기도 한다. 교환의 가치인 재화는 주목받지만 행위의 주체인 사람은 소외되곤 한다. 1947년에 집필된 책을 읽으며 요즘의 시대를 절실히 떠올리게 된 것은, 시대의 유사함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변하지 않는 인간존재의 본질을 짚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용문에서 저자가 지목한 1947년의 현대인은, 오늘날의 현대인을 지칭하여 표현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갖고 있는 분들께, 자신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으로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는 분들께 의미있는 독서의 시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이해하고 깊은 곳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을 선물해줄 것이다.
'자기애'가 채워줄 '우리'의 사랑
192 진정한 사랑은 생산의 표현이며,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책임과 지식이 함축되어 있다. 진정한 사랑은 누군가에게 감동받는다는 의미에서의 '정서적 반응'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의 성장과 행복을 바라는 적극적인 열망이다.
193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즉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책임지고 그에 대해 알아갈 때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성장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사랑하게 되겠지만, 다른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니다.
다시 앞서의 의문으로 돌아가보자. 타인을 위한 삶과 자기를 위한 삶, 둘 중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만 할까? 이기적 태도는 나쁜 것이니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인간적인 태도일까? 아니면 타인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나의 이익에만 주목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일까? 저자에 따르면 이 질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류가 있다. 첫째, 이기심은 자기애와 구분된다.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모든 대상을 유용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그 '모든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자는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인 '이기심'이 아닌 '자기애'다. 둘째, 자기를 위한 삶(=자기애)와 타인을 위한 삶은 상호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두 가지를 함께 달성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다른 사람이 감정과 생각의 '대상'이듯 우리 자신 또한 우리에게 그러하다. 한편 타인을 향한 사랑의 경험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을 향한 사랑에 눈을 뜨기도 한다. 자신과 타인을 향한 사랑속에서 우리는 함께 성장하며 행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어린 아이에게서 어른의 모습을 볼 때
212 권위주의적 양심은 외적인 권위체, 예컨대 부모와 국가 등 어떤 문화에서 인정하는 권위체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목소리를 뜻한다. ... 우리 자신의 일부가 내면화된 권위로부터도 도피할 수 없다. 프로이트가 초자아로 묘사했던 것이다.
229 사회와 부모의 권위가 어린아이의 의지와 자발성과 독립심을 깨뜨리는 경향을 띠는 한, 어린아이는 부모로 대변되는 권위에 맞서 싸운다. ... 자동인형이 아니라 온전한 자격을 갖춘 인간, 즉 본래의 자신이 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도 싸운다. ... 자아가 약화되고 가짜 자아가 빈자리를 대신하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감정이 둔해지며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합해진 결과로 자아가 대체된다.
232 양심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응이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 생산적으로 살아가며 충만하고 조화롭게 발전하라고 촉구하는 '참자아(true self)'의 목소리다. 달리 말하면, 우리 안에 잠재된 존재가 되라는 목소리다.
"아이가 참 어른스럽네요."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보통은 아이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잘 수행하는 모습에서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면, 이제 나는 슬픔을 느낄 것 같다. 부모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고, 그렇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의지력과 자발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염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을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권위주의적 양심'의 특징이다. 반면 '인본주의적 양심'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다. 삶에서 경험한 도덕적 경험의 진수를 담고 있기도 하다. '권위'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자아'의 요구에 의해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옳다는 느낌을 따라 행하며 불편한 느낌을 받고 멈춘다. 이러한 양심의 목소리를 따라감으로써 우리는 본래의 자기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하며 성장과 행복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
"아이가 참 어른스럽네요." 유년기의 내가 참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나는 그러한 칭찬이 기뻤고, 칭찬에 대한 주변의 반응 또한 뿌듯하게 느껴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은, 늘 나의 가치체계의 최상단에 위치했다. 인정받는 것이 기쁜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현재가, 인정받지 못하게 될 미래가 불안해지기도 했다. 아쉬움은 두려움이 되고 때로는 죄책감마저 느꼈다. 나의 잘못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의 잘함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묘하게 합리적인 희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희망을 현실로 실현해내지 못했을때의 '자책감'은 늘 마음의 한 자리를 터줏대감처럼 차지하고 있었다. '좋아함'보다는 '해야함'이 먼저였고, 자발성과 자기애는 생기를 잃어갔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41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최초의 운동마저 이끌어내지 못한 사람이 자발성을 갖출 수 있을리 만무하다. 자발성이 없는 사람은 고유성을 갖출 수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교환가치가 있는 페르소나를 끈임없이 변검해나갈 뿐이다. 고유성이 없는 사람은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다. 소외된 자아가 계속해서 공허함의 메아리를 울려보낼테니 말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납득할 수 있을리 없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받지 못한 인정을 타인에게 갈구하게 될 것이다.
타력에 의해 겨우겨우 돌아가던 수레바퀴는 신선한 긍정을 통해 비로소 제 힘으로 돌기 시작한다. 바로 양심의 소리를 향한 신선한 긍정이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강요된 규칙으로 설계됐던 주입적 질서를 떠나보내고, 양심에서 비롯된 강력한 의지가 구축해낸 '의미와 가치와 신념'으로 조각된 주체적 질서를 따라 흐르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한다.
존재를 위한 존재, 자기를 위한 인간
자기를 위한 인간. 나의 존재 위에 그 무엇도 두지 않음으로써 나를 사랑하는 인간. 너의 존재 위에 그 무엇도 두지 않음으로써 너를 사랑하는 인간. 삶 위에 그 무엇도 두지 않음으로써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인간. 나와 세상의 도덕적 문제를 직시하는 의지로, 나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책임감으로, 본래의 자신이 되고 본래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용기로, 비로소 자기를 위한 인간에 이를 수 있기를 꿈꿔본다. 지금 이 순간, 양심의 소리에 온전하게 귀를 기울이며.
에리히 프롬 저/ 강주헌 역의 자기를 위한 인간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들 중에서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등의 책들을 읽고나서는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한 인간이 신간으로 나오고 또한 이북으로도 나와서 이렇게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한 인간이라는 제목에서 보이다 싶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타인을 위해서 하려는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왔던 많은 기억들로부터 체화되어 왔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무감각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여러의 선택지가 있을 때 그것을 자신있게 선택할 수 있는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도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의 자기를 위한 인간을 읽어보세요. 지루할 수 있지만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