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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장 폴 사르트르 저/임호경 | 문예출판사 | 2021년 1월 6일 한줄평 총점 10.0 (43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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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프랑스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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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 『구토』
“사르트르의 철학 저작 중 단연 가장 중요한 책!” _한나 아렌트


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가 역자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매끄러운 번역으로 20세기 걸작 『구토』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해 출간하는 국내 완역본이다.

『구토』는 사르트르가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체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고독한 사람의 전형이다. 연금생활자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지만 섬겨야 할 상관도, 아내도, 자식도 없는 ‘낙오자’다. 그는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 놀이를 하려고 돌멩이를 집어 던지려는 순간에 모종의 불쾌감을 느끼고 후일 그때의 느낌을 ‘구토’로 명명한다. 삶에서 그 어떤 존재 의미도 찾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아도는’ 존재로서의 실존을 자각하는 순간 구토를 시작한 로캉탱은 철학교사로 생활하며 작가적 명성을 열망하던 사르트르의 분신이다. 사르트르는 주인공 로캉탱의 예리한 관찰을 통해 과거에 축적한 지식과 영광에 안주하는 지식인의 자기기만, 소시민적 권태와 부르주아의 위선, 나아가 무의미한 대화들만 주고받는 모든 인간의 비진정성을 드러낸다.

인류 역사상 가장 낙관적인 세기로 규정되는 19세기를 뒤로하고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을 경험했던 인간들의 위기의식을 사르트르는 ‘구토’ 현상으로 포착해낸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방황하는 현대인의 고뇌를 그린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과 체념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용기의 지평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구토』가 오늘날까지도 유의미한 보편성을 갖고 20세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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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편집자의 일러두기
날짜를 적지 않은 페이지
일기

작품 해설
장 폴 사르트르 연보

저자 소개 (2명)

저 :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1905∼1980. 파리 출생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조부 슬하에서 자랐다. 메를로 퐁티, 무니에, 아롱 등과 함께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슈페리어에 다녔으며,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그 시절에 만났다. 전형적인 수재 코스를 밟아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그는 항구 도시 루아브르에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일하다가 1933년 베를린으로 1년 간 유학, 후설과 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

사르트르는 1938년에『구토』를 출간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며 신진 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고,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을 발표하였다.『존재와 무』『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변증법적 이성비판』등을 발표하고『레탕모데른』지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2차 대전 전후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받았다.

그는 많은 희곡을 발표하여 호평받기도 했는데, 『파리떼』『출구 없음』『더럽혀진 손』『악마와 신』『알토나의 유페자들』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때마다 작가의 사상을 현상화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4년, 『말』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한 일화로 유명하다. 1980년 4월 15일 작고할때까지 끊임없이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역 : 임호경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다. 파리 제8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카산드라의 거울』, 『신』(공역),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조르주 심농의 『갈레 씨, 홀로 죽다』, 『누런 개』, 『센 강의 춤집에서』, 『리버티 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 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윤리』, 파울로 코엘료의 『승자는 혼자다』, 기욤 뮈소의...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다. 파리 제8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카산드라의 거울』, 『신』(공역),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조르주 심농의 『갈레 씨, 홀로 죽다』, 『누런 개』, 『센 강의 춤집에서』, 『리버티 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 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윤리』, 파울로 코엘료의 『승자는 혼자다』, 기욤 뮈소의 『7년 후』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사르트르의 모든 사유는 『구토』에서 흘러나왔고, 『구토』로 흘러든다”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
-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한 국내 완역본
-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는 『구토』

전쟁과 경제공황 이후 ‘신’이 부재한 세계,
인간 실존의 조건은 무엇인가


사르트르의 대표작 『구토』가 역자 임호경의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원문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높인 매끄러운 번역으로 20세기 걸작 『구토』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정식 계약해 출간하는 국내 완역본이다. 『구토』는 마치 탐정소설처럼 시작된다. 소설 첫 부분 「편집자의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가운데에서 발견”된 노트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발행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 노트들은 로캉탱의 일기이며 1932년 1월 초 무렵부터 쓰였다는 것, 로캉탱은 중부 유럽, 북아프리카, 극동지역을 여행한 후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마치기 위해 3년 전부터 부빌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 추가 단서로 주어진다. 이후 독자는 앙투안 로캉탱의 일기를 은밀히 들여다보며 자연스레 그의 탐험에 동행한다. 그리고 곧 로캉탱과 우리의 공동 탐사 대상이 로캉탱이 체험한 구토 현상임을 알게 된다.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34쪽)

이렇게 시작된 로캉탱의 구토 체험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보면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면서, 나이프 손잡이를 잡으면서…… 또한 로캉탱 자신, 그가 자주 들르던 카페, 부빌 시의 공원, 급기야 이 세계 전체가 구토로 체험된다. 이렇게 로캉탱의 삶 전체가 되어버린 ‘구토’의 의미는 무엇일까?

로캉탱은 철학교사로 일하며 작가를 꿈꾸던 사르트르의 분신이며 『구토』는 사르트르가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체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곧 작품 속 구토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 실존의 조건을 묻는 사르트르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르트르의 철학 체계에서는 ‘신’이 부재한다는 가정하에 이 세계의 존재들은 신의 섭리, 즉 필연성의 논리에서 벗어나 우연성의 지배 아래 놓인다. 어떤 필연성의 논리에 의해서도 포획되지 않은 채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거기에 있는, 쓸데없는, 남아도는, 잉여적 존재들의 모습. 그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낯설고 부조리한 감정이 바로 ‘구토’다. 인류 역사상 가장 낙관적인 세기로 규정되는 19세기를 뒤로하고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과 1929년 대공황을 경험했던 인간들의 위기의식, 특히 ‘신’의 부재로 인해 직면한 이런 위기의식을 사르트르 역시 고스란히 공감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그 위기의식과 무력감을 ‘구토’ 현상으로 포착해낸다.

왜,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문학을 통한 구토의 극복,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사르트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토』에 대해 언급하며 이 작품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자 가장 잘 쓰인 작품으로 꼽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참여문학론’을 주창한 사르트르는 문학비평론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어째서 쓰는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라는 세 가지 물음에 자문자답하며 문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를 탐구하고 통찰한 바 있다. 『구토』는 사르트르가 주장해온 “문학은 이웃의 구원, 특히 억압과 폭력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자들의 구원을 겨냥해야 한다”는 것에는 부합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구토』는 작가 사르트르 자신의 구원 문제를 다룬 작품이며 나아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방황하는 현대인의 고뇌에 공명하는, 오늘날까지 유의미한 보편성을 띠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되고자 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실존에 대한 고뇌, 불안을 다룬 이 작품에서 사르트르는 자신을 투사한 주인공 로캉탱이 다름 아닌 문학을 통해 ‘구토’를 극복하고 진정한 삶으로 ‘구원’받는 모습을 그려낸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그리고 내가 이 흑인 여자의 삶을 생각하듯 내 삶을 생각할 것이다. 귀중하면서도 반쯤은 전설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말이다. (410쪽)

『구토』는 인간의 극복 불가능한 삶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절망과 체념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용기의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토』가 20세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프레보, 스탕달과 플로베르, 지드와 프루스트, 포크너와 헤밍웨이까지
18, 19, 20세기를 잇는 ‘문학 창작의 교차로’에 놓인 작품
21세기에도 여전히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사르트르의 ‘글쓰기의 모험’


평범한 철학자이자 풋내기 작가에 불과했던 사르트르를 단번에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로 급부상시킨 『구토』는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망라한 작품이다. 사르트르는 1931년부터 약 7년에 걸쳐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18, 19, 20세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두루 섭렵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소설 기법들을 원용했다. 18세기 작가로는 프레보 등을, 19세기 작가로는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을, 20세기 작가로는 지드, 프루스트, 말로, 셀린 등과 같은 프랑스 작가들과 카프카, 더스패서스, 포크너, 헤밍웨이 등과 같은 외국 작가들을 섭렵했다.

앙투안 로캉탱이 쓴 일기 형식을 취하는 『구토』에는 내적 독백,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환상소설 기법, 상호텍스트성, 패스티시, 패러디, 콜라주, 대화체와 구어체의 활용, 신체감각에 관련된 어휘의 확대 등 사르트르가 익히고 응용한 수많은 기법이 녹아 있다. 특히 신문 기사, 재즈곡 가사, 역사책, 식당 메뉴판, 백과사전, 포스터 등에 쓰인 글귀 또한 이 작품의 한 부분을 이루는데, 이러한 ‘콜라주’ 기법은 『구토』에 나타난 서술기법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듯 『구토』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내딛는 사르트르에게 그 자체로 ‘글쓰기의 모험’이었으며 18, 19, 20세기를 잇는 ‘문학 창작의 교차로’에 놓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구토』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1960년대에 등장한 ‘누보로망(Nouveau roman, 새로운 소설)’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일컬어진다. 기존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anti-roman, 앙티로망)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누보로망의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정확하고 치밀한 묘사, 인물의 해체, 이야기의 분절화, 전통적 시간관의 파괴, 일인칭 시점과 주관적 사실주의 효과의 극대화, 이야기의 논리성 파괴 등의 장치들이 『구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토』가 과거 문학 전통에 대해서 ‘도전적인 작품’이자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구토』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서술기법과 실험적인 문체로 신선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지적이고 탐구적인, 혹은 작가를 꿈꾸는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사르트르의 ‘글쓰기의 모험’에 동행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편집자 미니 인터뷰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 지성, 작가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 그러나 사르트르의 명성과 인기에 비해 그의 저작, 특히 그의 문학작품은 대중들에게 의외로 낯설다. 사르트르를 작가로서 세상에 알리고 자리매김하게 해준 그의 첫 장편소설 『구토』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세계문학선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며, 고교생 필독서로, “20세기를 만든 책”으로, 현대고전으로 늘 손꼽히는 작품이지만 주변에서 『구토』를 읽어봤다고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구토』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근저를 이루는 작가 자신의 체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 그래서 난해하고 ‘비의적이다’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점이 무관하지 않을 터. 사르트르의 『구토』는 누가,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구토』 잘알’, 사르트르 전문가 변광배(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에게 물었다.

Q. 편집자의 욕심으론 우리나라에서 언문을 뗀 모든 분이 『구토(에디터스 컬렉션)』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지만, 고전임에도 의외로 이 작품을 읽어본 이가 적어서 놀랐습니다. 『구토』는 사르트르의 분신이라 일컬어지는 주인공 로캉탱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삶과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외따로 떨어지기를 자처하는 고독한 지식인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는데요. 자연스레 로캉탱처럼 자신의 삶과 존재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작품을 어떤 독자에게 권하고 싶으신지요?

A. 고전을 읽는 데 그 대상을 ‘누구’로 한정하는 것이 가능한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모두 한 번쯤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존의 문제는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멀리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보통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에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까요. 그런데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위기를 맞게 되지 않나요? 그것이 청년 시절에 올 수도 있고, 더 나중의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실존의 위기 상태가 바로 ‘구토’의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집단의 위기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 위기의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사회에 나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청년 시절에 삶과 존재의미에 대해 한번 고찰해보는 차원에서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청년 시절에 『구토』를 읽어보셨군요. 그때와 지금의 감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A. 저는 과거에 『구토』를 읽었을 때 작품에 더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이어서 민주화 등의 사회적인 문제와 제 개인의 미래를 계획하는 문제가 맞물려 있었거든요.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읽었다면 아마 저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네요.(웃음) 문학을 전공하거나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둔 일반적인 대학생, 청년이었다면 포기했을 겁니다. 하지만 포기했다면 삶과 실존의 참다운 의미를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네요. 몸에 좋지만 입에 쓴 약을 피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진짜’에 대해서, 진정한 삶과 실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는 측면에서 살면서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Q. 교수님께서도 읽다가 포기했을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니 위로가 되면서 어쩐지 다시 한번 『구토』의 문장들을 하나하나 느끼며 정독하고 싶은 의지가 솟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구토』(에디터스 컬렉션)은 故 방곤 교수님의 번역으로 1983년 출간된 이후 약 40년 만에 문학 전문번역가 임호경 선생님의 유려한 번역으로 새롭게 선보이게 되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작품,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A. 저는 문학을 ‘그것만이 다가 아닌 것(pas-toute)’로 이해합니다. 라캉의 의미에서 ‘상징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아니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인간의 욕망은 현실 세계의 ‘법’, ‘체계’, ‘언어’, ‘상징’ 등으로 다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그 너머의 의미를 포획하는 것, 부조리한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며 문학의 부정성이라 이해합니다.

또 『구토』는 느리게, 더디게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특징 중 하나가 ‘느림’이지요? 그건 ‘자기’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자기’를 사랑하는 방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삶, 실존의 과정은 길고 순탄하지 않기에 그런 만큼 인내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문학에 대해 흔히 말하는 ‘무용(無用)의 용(用)’, 무용한 것의 쓸모입니다.

Q. 삶, 실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대해 줄곧 강조해주셨는데요. 한국의 청년들은 취업이나 생계문제에 내몰리거나 경쟁환경에 오래 노출되어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소비’나 ‘취향’에서 찾는 모습도 흔히 보입니다. SNS를 통해 자신의 ‘소비행태’나 ‘취향’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공유하는 활동 자체가 마치 자신의 오리지널리티 표현, 하나의 창작활동처럼 여겨지며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비되기도 하지요. 이런 현대인의 정체성 표현을 사르트르가 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요?

A.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에 모든 선택을 각자에게 맡길 겁니다. 자유와 더불어 책임을 강조하는 전략인 셈이지요. 저는 요새 젊은이들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지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더 영리하고 명민하죠. ‘자기실현’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저 바쁜 것이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더 빨리 소유하고 이루고 싶어 해요. 해서 편리한 방식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적인 방식을 생각하다보니 소비, 취향도 자기실현의 한 방법이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자기 인격을 투사합니다. 『구토』에서 개념을 빌려오자면 그것이 소비이든, 취향이든 진지함, 성실함, 진정성을 담으면 되는 것이지요. ‘라테 타령’인지는 모르겠으나 ‘독 짓는 늙은이’의 입장에서 한 가지 우려가 되는 점은, 진정성을 담기엔 요즘 세태가 너무 바쁘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죠.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성찰할 여유도 없고요. 참다운 의미에서 ‘멋지게’ 조탁할 시간이 없습니다. SNS에 올라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 중심의 글쓰기 행태를 보면 자기 ‘분신’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자신’, ‘인격’, ‘주체성’이겠지요.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 분신을 자꾸 조급하게 꾸미고, 가짜로, 가볍게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구토』에서 말하는 ‘개자식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진정하지 못한 삶임은 분명하죠. 사르트르는 한 인간을 그 사람이 한 행동의 총합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하는 행동에 온전히 자신의 인격과 주체성을 실어야겠지요. 한마디로 살아 있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뜨겁게, 치열하게, 많은 것을 해보고, 많은 것을 남기고 죽으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사르트르의 사유에서 인간은 신이 되고자 하지만 그 욕망은 실현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실패의 역사요, 인간은 무용한 정열 그 자체이지요. 사르트르는 그걸 알지만 그럼에도 더 열심히 살자, 뭔가를 만들어내고 남기자고 합니다. 그것도 최대한 자신을 투사해서요. 비극적인 삶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야 이 지구상에 왔다가 간 흔적이라도 남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먼지’로 되돌아갈 뿐이죠.

종이책 회원 리뷰 (40건)

주간우수작 [서평] 사르트르 - 구토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s****i | 2023.08.02

 


인생 책을 만나다!

 

'구토'는 정말 생각지 못한 순간에 찾아와 인생책이 되었다.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사유, 통찰, 감정, 감각이 아주 잘게 잘게 서술되어 있는데 평소에 하던 생각들과 상당히 겹치고 맞물린다. 맞장구의 연속이다. 뒤로 갈수록 '나도 이런 생각했는데! 나도 느껴봤어!'라고 공감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느려진다. 와닿는 문장에 치여서 곱씹다 보면 속도가 느려지고 만다. 마치 눈에 담을 게 너무 많아서 천천히 걷게 되는 여행지의 감각과 비슷하다.    

 

내겐 책을 읽을 때 포스트잇을 적는 습관이 있다. 구토를 다 읽었을 때, 표지 뒤에 붙여둔 포스트잇이 층을 이룬 걸 보면 붙잡는 대목이 많았단 뜻이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적었다. (1) 마음에 드는 구절, (2) 인상적인 비유와 묘사, (3) 스쳐가는 생각들.

 

'구토'가 인생책이 된 걸 기념할 겸 마구마구 적었던 세 가지를 '잘'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펼쳐두고 나름의 그룹핑을 거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인 '구토'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주인공인 로캉탱과 주변인물들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남겨본다.

 

 


구토가 상징하는 것은?

 

p.34
물체들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만질 수 없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사용한 수에는 제자리에 두고, 그것들 가운데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내게는 다르다. 그것들은 나를 만지는데, 이게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들과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이제 알겠다. 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다가 손에 쥐고 있던 돌로 인해 불쾌감을 느낀다. 그가 '구토'라고 이름 붙인 이 불쾌감은 어떤 물체의 존재를 인지할 때 혹은 사물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인지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너무도 익숙해서 거기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던 것들이 문득 존재감을 드러낼 때 다가오는 생경한 느낌! 또는 우리가 정의 내린 규칙과 습관의 지배하에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어색해지는 느낌! 나는 이것이 일종의 미시감(자메뷰)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구토의 한 줄 정의는 이러하다.

 

'구토는 존재에 대한 발작이다.'

 

 


Some of these days

'머지 않은 날' 찾아온 혁명

 

p.21
나는 내가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장 간단한 해답이다. 가장 불쾌한 해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종종 겪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중략)
내가 주의하지 않는 사이에 무수한 작은 변화들이 내 안에 축적되다가 어느 날 말 그대로 혁명이 일어난다. 그래서 내 삶은 이런 급작스럽고도 일관성 없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초반에 나오는 대목으로, 로캉탱은 마치 나중에 겪게 될 자신의 변화를 예견한 듯 말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그는 '혁명'같은 순간이 올 거라 전혀 예상치 못했겠지만!

 

p.406
"마들렌, 그 음반을 다시 한번 틀어줄래요? 떠나기 전에 딱 한 번만 더."

 

부빌을 떠나기 직전, 로캉탱은 자주 들르던 카페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직원의 권유로 좋아하는 재즈곡 'Some of these days'를 듣고 한번 더 틀어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곡을 만들었을 유대인 작곡가와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고 있는 흑인 여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다. 창작자에 대한 애정과 애틋함에 빠진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도 이렇게 나를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는다.

 

이 책을 읽고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심오하고 아득한 분위기가 너무 짙어 로캉탱이 진정한 행복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재즈곡 제목처럼 정말 '머지 않은 날'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좋아하는 재즈를 들으면서 앞으로 쓸 새로운 글과 독자를 상상하며 행복을 말하고 있다. 나는 비로소 로캉탱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자각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이제 롤르봉으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도 없고, 존재를 지탱하던 안니와의 과거는 그저 옛일로 남았다. 로캉탱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상들은 모두 사라졌고, 마침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게 된 것이다. 롤르봉을 부활시키려던 목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로캉탱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남을 위한 글쓰기 아닌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아래에 적어둔 대목은 주인공 로캉탱의 말이지만, 마치 사르트르가 '구토'라는 책을 왜 쓰게 됐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읽힌다.

 

p.409
나도 한 번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물론 어떤 음악은 아닐 테고... 다른 장르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떤 책이어야 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하지만 어떤 역사책은 아니다.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대해 말하는바, 존재자는 결코 다른 존재자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 내가 범한 실수는 롤르봉 씨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다른 종류의 책이 필요하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며 인쇄된 단어들 뒤에서, 페이지들 뒤에서 존재하지 않을 어떤 것, 존재 위에 있는 어떤 것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이야기,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떤 것, 어떤 모험 같은 것이리라. 그것은 아름답고 강철처럼 단단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를 부끄럽게 느끼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중략)
한 권의 책. 물론 그것은 우선은 지루하고도 피곤한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롤르봉과 로캉탱

서로의 존재를 위한 존재

 

p.230
롤르봉씨는 나의 동업자였다. 그는 존재하기 위해 내가 필요했고, 나는 내 존재를 느끼지 않기 위해 그가 필요했다. 나는 원료를 제공했다. 내가 되팔아야만 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원료, 바로 존재. 나의 존재를 제공했다. 그의 역할은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 앞에 있었고, 그의 멋진 삶을 연기하여 내게 보여주기 위해 내 삶을 빼앗았다. 내가 먹고, 숨 쉬는 것은 그를 위해서였고, 나의 동작 하나하나의 의미는 바깥에, 저기에, 내 앞에, 그에게 있었다.

 

로캉탱이 롤르봉에게 느끼던 것을 가장 가감 없이 드러낸 부분! 로캉탱은 그동안 롤르봉에게 자신의 존재를 제공해왔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앞서 등장했던 '부빌미술관의 거북한 초상화들'이 떠올랐다. 화가인 보르뒤랭의 손에서 카메라필터를 씌운 듯 새로 태어난 부빌의 인사들. '장점'만 드러나도록 허구 섞여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서 로캉탱은 롤르봉과 그림 속 인물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 듯 했다. 롤르봉도 본인이 쓴 글 안에서 부활하겠지만 결국 멋진 삶을 연기하는 허구 섞인 위인이니까!

 

나중에 로캉탱이 그에 대한 역사적 글쓰기를 관두고 다른 글을 쓰겠다고 다짐할 때, 나도 모르게 벅찬 감정을 느꼈다.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던 수동적 사고를 주체적으로 변화시킨 로캉탱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이 벅찬 감정은 타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픈 나의 바램과도 닿아있었다.

 

 


독학자와 로캉탱

모험에 대한 새로운 정의

 

독학자는 모험을 동경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면서 누구보다 개성 강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도서관에서 그 많은 책을 알파벳 순으로 읽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인 '척'을 한다. 그리고 나름 반전이었던,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그의 불미스러운 사건! 독학자는 날 것의 욕망은 감춘 채 '있어 보이고' 싶어하는 가식적인 지식인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책에 더 빠져들게 된 부분 중 하나가 독학자가 로캉탱에게 '모험'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대목이었다. 그 뒤로 로캉탱이 모험에 대한 생각을 막 펼쳐놓는데 그 구간이 흥미로웠다. 덕분에 '구토' 뿐만 아니라 '모험'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할 수 있었고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해석했을 때, 로캉탱이 말하는 '모험'은 예기치 못한 특별한 감정의 시작과 끝, 그 사이의 여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험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떤 '굉장한 사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뭔가가 일어나고 있어!'라고 느끼는 감정의 시작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감정이 사그라들면 그때야 비로소 하나의 모험이 남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작은 배낭 하나만 들고 세계여행을 다녀왔어. 엄청난 에피소드들이 쌓였지!"와 같이 누가 봐도 대단한 일만 모험이 아니라 "그 재즈곡은 도입부터 미쳤어!"와 같이 감정을 동요하게 만드는 3분짜리 재즈곡을 듣는 순간도 모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끝이 날 것을 알기에 더 아쉬운 여정이라면 그 어떤 순간도 다 모험이 될 수 있다.  

 

p.96-97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은 끝나기 위해서다. 모험은 한정 없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죽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가 딱 하고 부러져버린다. 모험이 끝나고, 시간은 그 일상적인 느슨함을 되찾는다. 고개를 돌려보면, 내 뒤에서 선율 같은 저 아름다운 형태가 온통 과거에 잠겨 들고 있다. 그것은 줄어들고, 힘을 잃으며 쪼그라들고, 이제 끝은 시작과 하나가 된다.

 

 


안니와 로캉탱

그들의 모험 같은 사랑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안니에 대한 로캉탱의 사랑이었다. 모든 대상과 필요 이상의 거리를 두는 그가 유일하게 거리를 두지 않는 안니. 타인에겐 지나치게 적대적이고 염세적인 그가 유일하게 안니 앞에서 긴장하고 작아진다. 그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걸까?

 

안니와 로캉탱이 아주 오랜만에 만나 한참 얘기를 나누는데 안니가 이런 말을 건넨다.

 

p.349
"그거 알아? 우리가 모험가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자기는 일어나는 모험을 겪는 사람이었고 나는 모험을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었어. 나는 '난 행동하는 인간이야'라고 말하곤 했지. 기억이 나? 자, 이제 난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어. 우리는 행동하는 인간이 될 수 없어."

 

여기서 로캉탱이 왜 안니를 사랑하게 됐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니는 사람 자체가 '모험'인 인물이었고 로캉탱은 그녀를 통해 모험을 경험하는데, 이건 그의 사랑과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큰 이유가 되었다. 안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로캉탱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내 덕에 모험을 했다고!

 

이런 거침없는 모험형(?) 안니에게 필요한 건 당연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이정표였을 것이고, 그래서 안니는 로캉탱에게 당신이 내 이정표였다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세드앤딩. 안니는 더 이상 행동하는 삶을 포기하고, 로캉탱은 그런 안니에게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서로가 사랑했던 건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서로라는 걸 깨닫는다.

 

둘이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서 사르트르와 그의 아내였던 보부아르가 떠올랐는데,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의 결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로캉탱은 사르트르의 페르소나, 안니는 보부아르의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더 떠들고 싶은 이야기

 

실존주의 -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사유

이 책은 사르트르가 서른셋이었던 1983년 출간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사유는 결국 비슷하다는 걸 읽는 내내 느꼈다. 분명 시대적 상황과 환경은 크게 다르지만 '살아가는 존재'라는 본질이 같아서인지 우리는 결국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하는 물음에 본능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애쓰게 된다. '구토' 덕분에 실존주의에 대한 흥미가 더 깊어진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구토를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김춘수가 쓴 '꽃'이라는 시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었는데, 어떤 현상도 이름이 붙여졌을 때 생명력을 갖는다는 말이었다. 그동안 내가 느끼던 이름 없던 감각반응도 '구토'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이제 나는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이다. '아, 지금 내가 구토를 느끼고 있구나!'라고. 이제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가는 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특별한 사랑방식

사르트르의 평생 짝이었던 보부아르에게도 관심이 간다. 두 사람은 사랑을 둘만의 전유물로 여기지 않고, 각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것을 이해하는 관계였다고 한다. 나라면 정말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의문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생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서로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표현했다. 두 사람을 모두 다룬 책인 '사르트르 VS 보부아르'에도 흥미가 가는데 한번 읽어 볼 생각이다.

 

 


 

 

이제 진짜 마무리. '구토'를 읽는 내내 로캉탱에게서 나를 보았다. 어느 순간에는 로캉탱인지 나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빠져들었다. 몰입의 시간이 끝나서 아쉬운 책이지만 로캉탱의 앞날을 응원하는 마음을 스스로에 대한 응원으로 이어갈 생각이다. 내게도 '머지 않은 날' 찾아올 '모험' 같은 사건들을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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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구토ㅡ장 폴 사르트르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s******s | 2022.11.25
도서관 인문학강의를 통해서 읽게 된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도서관에서 빌려온 도서로 읽다보니 여기저기 밑줄도 그을 수 없고 온전히 내 책으로 느끼면서 깊이 읽게 읽을 수가 없는 듯 해서 다시 구입해서 보게 된 구토. 어찌보면 어려운 책이지만. 하나 하나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느낌이고, 깊이 있게 사물을 바라보게 되고, 온전히 내 삶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왜 실존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나온 것일지? 또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내 능력은 무엇인지? 등등을 생각하게 왠지 모르게 내가 철학하는 사람이 되는 듯 하고, 이것이 오로지 나만이 아닌. 내 스스로만이 아닌, 내 아이들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 스스로도 나에 대해 온전히 깨닫지 못 하는 상황에서 내가 낳았다고 우리 세아이를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일까?

자기 스스로 자아존중감이 높아지면 좀 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쉬워지고 편안해 지는 것은 아닐지?

구토란 자기 몸에 해로운 물질을 내 보내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는데, 이 삶 속에서 간혹 느끼는 역겨움도, 그럼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야 하는 것인지? 인생이란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데, 난 내 인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도록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자기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성찰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인지? 내 옆에 있는 내 가족을 비롯해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삶에 주체가 되도록 믿어주고 기다려 주고 있는 것인지? 온전히 인생과, 나 스스로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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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구토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e********d | 2022.10.28
장 폴 사르트르 구토 - 번역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크의 구토를 간간히 읽어 보려고 구매하게 됨. 특히 철학 소설 장르 상 번역의 문체와 매끄러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출판사 번역들을 비교해 보았음. 이 책의 번역이 가장 좋다고 구매해서 판단되어서 읽어 봄.
장 폴 사르트 의 말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가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이자 실존 철학의 기투성 이라고 할 수 있음.
일기 형식의 평범한 일상과 주인공의 심리묘사의 형태를 띤 책으로서 철학적인 의식을 담고 있음.
장 폴 사르트르 - 벽. 이방인- 알베르 카뮈.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등의 철학 소설들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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