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먼시 버턴힐 저/김재용 역
이채훈 저
김태용 저
안인모 저
오수현 저
지이·태복 저
존 마우체리의 ‘클래식의 발견’. 오랜만에 만난 읽을 만한 음악책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고전음악은 공동체, 자연, 인간의 열망과 승리, 약점, 그리고 혼돈에 형식을 부여하려는 욕망을 기념하는 음악이다.(15 페이지) 같은 맥락으로 저자는 예술을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혼란스러운 것을 모방과 상징체계를 통해 조직적으로 구성하려는 인간 욕구의 결과물로 정의한다.(28 페이지) 저자는 인간이 대략 20만년전부터 지구에 살았다고 말한다.(26 페이지) 사피엔스를 두고 이르는 말로 보인다.
저자는 음악은 자연의 힘을 활용하는 바 여기서 자연이라는 말은 우리 주위의 자연과 우리 안의 자연 즉 인간의 본성 모두를 뜻한다고 말한다.(55 페이지) 여기서 스피노자의 능산적(能産的) 자연과 소산적(所産的) 자연을 떠올리게 된다. 능산적 자연은 세계의 근원적 원인체계를 구성하는 신과 신의 속성들이다. 소산적 자연은 세계의 결과체계를 구성하는 양태다.
초기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은 세상에 대한 은유와 상징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들은 대략 4만년전 동굴벽에 2차원 이미지를 그렸으며 이런 이미지를 3차원 동물의 재현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움직임을 나타내고 싶으면 동물에 다리를 추가로 그려냈다.(66 페이지)
새로 나온 연극을 보고 온 사람에게 무엇에 대한 내용이었어요?라고 질문할 수 있다. 고전음악에 대해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없다. 대신 이렇게 물을 수는 있다. 어떻게 들리던가요? 하지만 여러분이 무언가를 느끼고 경험했더라도 그것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미처 없을 수도 있다. 음악의 경험은 몸으로, 감성으로, 영혼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경험될 뿐인 무언가를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들렸다는 말은 표면적인 부분이나 양식을 기술하는 것이지 그 음악이 주는 느낌이나 효과는 전하지 못한다.(137, 138 페이지) 저자는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이 말한 신체 예산(body budget)이란 개념을 말한다. 그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돈이 필요할 때를 예상해서 자원을 미리 확보하듯 캄브리아기의 작은 생물들이 배고픈 포식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살아남으려면 에너지 효율이 높은 방법이 필요했다. 신체예산에 관한 한 예측은 늘 반응을 앞지른다. 포식자의 공격에 앞서 움직일 준비를 한 생물들은 포식자가 덮치기를 기다린 생물보다 생존 가능성이 더 컸다.(리사 펠드먼 배럿 지음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26 페이지)
캄브리아기(고생대의 첫 시기)에 포식자가 출현함으로써 지구는 경쟁이 더 심하고 위험한 것으로 탈바꿈했다. 잡아먹는 자나 먹히는 자나 모두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를 더 많이 감지하도록 진화했다. 그들의 감각계는 더 정교하게 발달하기 시작했다.(앞의 책 24 페이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일관되게 위대한 곡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181 페이지)
책 중간쯤에서 익숙하지 않은 작곡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안나 소르발스도티르(Anna Sigriður Þorvaldsdottir; 1977 - )다. 사람들은 날카롭고 거칠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음악을 그녀의 고향 아이슬란드의 초현실적 지질구조와 연관시키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블랙홀로 떨어지는 사변적 은유라 표현했다.
저자는 지휘자들은 영원한 학생이라 말한다. 공연에 참석하는 청중과 마찬가지로 항상 배우고 지식을 넓혀간다는 것이다.(201 페이지) 저자는 음악과 관련하여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항상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 말한다. 청중이 음악의 궁극적인 해석가다.(207 페이지) 작곡가나 연주자의 취향이 어떻든 간에 궁극적으로 음악을 해석하는 사람은 여러분이다.(284 페이지)
도전과 좌절의 숱한 연습의 시간들, 고독하고 힘들기만 하고 보상은 없을 때가 많은, 그럼에도 손에 든 악기에 숙달하고 싶다는 목적, 그래서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여러분에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음악가들 모두가 자신이 고른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겠다는 일념에 평생을 바친다...모든 연주자는 저마다 얻고자 하는 이상적인 소리가 있다. 손목의 각도, 활이나 손가락 위치 등을 미세하게 바꿔가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상적인 소리에 다가가려 애쓴다.(222, 223 페이지)
타협은 정치나 종교, 철학 담론에서 다소 부정적인 어휘로 사용되지만 음악은 타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실내악은 타협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지휘자가 이끄는 관현악곡으로 규모가 커지면 타협이 이루어지는 과정도 달라진다.(248, 249 페이지) 여러분이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다면 그 작곡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편으로 실내악보다 좋은 것이 없다.
운 좋게 연주자들을 볼 수 있는 작은 방에서 실내악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곧바로 공동 연주자의 위치로 끌어올려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그들이 애쓰는 것을 느끼고 음악적 요소들을 서로 건네는 모습을 볼 것이다, 서로 눈을 맞추고 숨소리와 몸짓, 텔레파시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249 페이지)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꾸준한 지원과 영감, 비판, 보살핌을 여성들에게 의존하여 구했다.(273 페이지)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이 ‘봄의 제전’을 실제로 작곡한 것이 아니라 ‘봄의 제전’이 지나가도록 통로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바그너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완성 악보를 보고는 내가 이 곡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어란 말을 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책들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나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와 일단 그곳에서 쓰여지고 나면 내 몸을 빠져나갑니다. 그러면 나는 공허한 기분에 빠져 내 몸 속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한 번도 나의 개인적 정체성을 느껴 보았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 불과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곳에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일종의 교차로인 것입니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87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영원히 음악과 함께할 것이라 말한다. 음악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이다.(293 페이지) 종횡무진 글 잘 쓰는 지휘자/ 음악교육자의 책은 이렇게 끝난다. 앞서 말한 스트라빈스키, 바그너의 경우 걸작을 쓴 사람이지만 만일 평범한 곡을 쓴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수준이 떨어지는 곡을 쓰고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보이려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꼭 걸작을 통해서만이 작곡가가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에 피아노 연주가의 영상이 떠서, 그것을 보다가 하루종일 라 캄파넬라를 친 여러 명의 피아니스트 영상을 보며 보냈던 적이 있다. 클래식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고, 가요에 밀려 이렇게 좋은 음악을 등한시했나 싶은 생각과 앞으로 자기전에 꼭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연주곡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클래식의 발견'을 한 것 처럼, 이 책도 지휘자가 고전음악에 대해 알려주고, 우리가 고전음악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고전음악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이 있지만, 70대의 그가 평생 클래식을 공부해오면서 어떻게 감상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조언 그리고 본인만의 느낌을 담고 있다. 청취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많은 작곡가와 곡들의 예시를 들고 있어서 클래식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궁금한 몇 가지 곡들을 들어보았는데, 실감이 나고 너무 좋았다 :) 나중에 오디오북이 나왔으면 좋겠다..
저자가 음악은 시간과 기억의 예술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좋았다. 여행을 가서 들었던 음악이,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도 회상의 매개체가 되는 순간은 많이 느껴보았을 것이다. 음악이 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기억장치처럼 작용하는 것 같다. 고전 음악도 당대의 작곡가가 작곡을 하였고, 그런 음악이 계속 전해내려오면서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방식과 경험으로 재해석한다. 이런 측면에서 고전 음악의 작곡가가 현대의 내가 음악을 들으며 하는 생각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 ㅎㅎ 이런 상상도 재미있다고 느꼈다.
합창, 교향악, 발레, 오페라, 실내악, 독주 리사이틀에서 고전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며 짧은 소개도 덧붙인다. 음악회에 안간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정말 코로나 상황이 끝나면 당장 내한 피아노 공연에 달려가고 싶다!!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 마음을 해소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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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클래식의발견 #에포크 #책콩 #책콩리뷰단
클래식의 발견
지휘자가 들려주는 청취의 기술
존 마우체리 지음, 장호연 옮김
에포크
무엇이든 그 길을 앞서 걸어간 이의 안내를 따라가면 혼자서 가는 길보다는 쉽고 헤메지않고 가게 되지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음악을 소개해주는 아이의 줌 수업을 옆에서 같이 듣다가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도 비발디의 사계도 새롭게 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음악이 이런 느낌을 담고 있구나, 동물의 모습을 음악으로 담아내니 이렇구나 하고 구분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이 책은 제목인 《클래식의 발견》보다, '지휘자가 들려주는 청취의 기술'이라는 부제목이 제 마음에 더 와닿았습니다. 존 마우체리 지휘자가 유명한지는 저자 소개를 보고야 알았지만 곡을 해석하고 수많은 연주자들의 소리를 모아 하나의 곡으로 연주하는 지휘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과 또 다른 진중함과 깊이가 있을거란 기대 때문이었죠. 그리고, 책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음악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서부터 우리가 막연히 '클래식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그 범주를 정의하는데부터 시작합니다. 그리스음악으로부터 시작된 '서양음악', 그 중에 고음악과 초기 음악 다음에 특정 시기를 가리켜 말하는 '고전음악'을 카논(규칙, 척도)이라한다는 것까지 우리가 어느 부분의 음악을 다룰것인가를 분명히 보게 합니다. 단지 음악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시각예술, 문학, 무용, 연극을 함께 언급함을 통해 같은 예술의 영역이지만 새로운 것에 활발히 반응하고 상영되고 소유되는 그들과 달리 음악은 250년간의 핵심 레퍼토리가 지금도 연주회장과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주되고 있다는 것. 바흐와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다 따로 들어보았지 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또 세계대전을 통해 음악이 어떻게 단절되고 또 확산되어갔는지 보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존 마우체리의 글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음악이란 무엇이고, 음악가와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에 대해 관심이 옮겨집니다. 그러면서도 나무에 집중하기보다 내가 지금 보는 나무가 숲 안에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 서양음악을 누구보다 전문적으로 다룬 지휘자였음에도 그의 글에서는 특권의식이나 현학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양음악은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이해하기 쉬운 음악이라고, 음악은 사람들이 듣고 즐기도록 작곡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일화 속 경험을 통해 그 음악을 나도 듣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지요. 고전음악이 한 국가나 인종의 표현이라기 보다 모두의 것이라고 이야기 하면서요.
그의 삶이 음악과 함께 한 삶이기에 한 작품 한 작품을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대해, 작품과의 만남, 음악회-독주, 실내악, 합창, 교향악, 발레, 오페라 -에 가서, 그리고 작곡가와 연주자와 나 -저자-번역자-수용자-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무수한 작곡가들과 작품들이 언급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음악, 역사와 함께하는(구체적인 연도와 자신의 나이를 언급하니 더 실제적으로 다가왔지요) 음악이란 것을 계속 보게하면서요.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을 책 한 권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고전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해 준 책. 비록 이 책에 등장한 곡들 중 익숙한 것 보다 낯선 것이 더 많았지만, 그래서 새롭게 알게되고 그 음악을 들었을 때 조금은 친근하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책
《클래식의 발견》이었습니다.
심포니 지휘자인 존 마우체리가 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 에세이는 음악사에서의 이해하기 쉬운 상식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크레마클럽 구독자여서 따로 결제 없이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역시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과 매우 가까운 사이여서 초반에나 마지막의 감사의 말에도 레너드 번스타인을 레니라는 애칭으로 칭하며 언급했고요. 특정한 작곡가나 연주자를 추천하거나 일화로 삼지는 않고 시간 순으로 음악사를 다루지도 않고 어떤 테마들을 챕터 삼아 상당히 객관적인 음악에 대한 지식을 갈무리해 담은 책이라고 생각됐습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완전히 입문자 격의 독자들보다는 청취를 취미로 갖고 음악에 대한 지식을 늘리고 있는 중의 독자들에게 박식한 길잡이가 될 듯해요.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 저자가 쓴 부분을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러한 너무 어렵지도 않고 친절한 문체로 특히 음악사를 다루었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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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음악 애호가라면 프랑스 극작가이자 시계 제작자이며 첩자인 보마르셰가 쓴 두 편의 희곡 『세비야의 이발사』(1775)와 『피가로의 결혼』(1781)을 모를 수가 없다. 이 희곡들을 원작으로 하는 유명한 두 오페라는 순서가 바뀌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1786년에 먼저 만들어졌고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는 1813년에야 작곡되었는데, 보마르셰가 원작인 두 희곡을 쓰는 중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알면 우리의 이해가 넓어진다. 그는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하는 루이 16세를 도와 첩자로,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에게 군수품과 물자 및 자금을 지원하는 정보원으로 일했다. 미국 혁명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군주제가 부패한 프랑스의 상황에서 보마르셰가 두 번째 희곡에 상류 계급을 묘사한 것은 공개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검열관들은 처음부터 이 작품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로시니의 오페라에 나오는 젊은 백작(주인공), 그리고 그와 결혼하게 되는 사랑스러운 여인(영리하고 뛰어난 로지나)은 모차르트가 음악을 붙인 두 번째 희곡에서는 부도덕한 백작과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부인이 된다. 이렇듯 미국·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오스트리아·영국의 당대 정치 상황은 오늘날 사랑받는 ‘표준 레퍼토리’ 오페라들을 둘러싸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남편(루이 16세)을 설득해서 <피가로의 결혼> 상연을 허락받았다. 앙투아네트는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할을 맡아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고, 1785년 8월 19일 자신의 개인 극장에서 이 작품이 마지막으로 공연되었을 때에도 로지나 역을 맡았다. (앙투아네트는 1791년 6월에 체포되었고,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클래식의 발견 : 지휘자가 들려주는 청취의 기술 | 존 마우체리 저/장호연 역 중에서.
여러분이 방 안에 앉아서 이 책을 읽는다고 할 때, 피아노 건반을 하나 눌러 소리를 낸다고 상상해보자. 그 음 하나만으로도 곧바로 방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음악에서 소리의 요소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강력하고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깔본다면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 없다.
- 에런 코플런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꽤 낭만적으로 들리는 책의 오프닝 문구이다. 크레마클럽에서 새로 올라온 음악 카테고리의 도서 중 읽어보았다. 서양 고전음악은 청소년이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과 전공자를 대상으로 한 책들 사이의 갭이 깊다고 생각하는데 일반 대중 대상의 읽기 편안한 음악 교양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개별 곡들이나 연주자를 추천하거나 평가하는 책은 전혀 아니며, 지휘자가 해설하는 서양 고전음악 책임을 마케팅 문구만 읽어도 알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개인적인 지휘 경험에 대해 쓴 에세이도 아니다.
이러한 음악서들은 높은 인기를 얻는 대중적인 책은 거의 되지 못하지만 교양으로서의 서양음악사, 음악 상식을 어떤 톤으로 편안하거나 읽기 좋게 전달하는가가 책에 대한 평을 보통 가르는 것 같다. 음악 교양서들 중에는 어떤 진입장벽을 낮추지만 대충 구글링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정보를 띄엄띄엄 서술하는 정도의 아마추어적인 책들도 있는 반면 이 책처럼 음악가들이 쓴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책들도 있다. 조금 더 책의 분량이 길어도 줄인 듯한 느낌 없이 자연스럽겠다는, 그래서 좀 더 저자의 견해와 지식을 열어주어도 좋았으리라는 감상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