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과 신하가 힘의 균형을 이루는 새 세상을 꿈꾸다”
저널리스트의 펜 끝에서 되살아난 비운의 천재, 송익필과 조선의 정치를 말한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200년의 왕권체제 이후, 리더의 정통성을 중시하던 선비들 앞에 내놓여진 방계승통의 선조, 끊이지 않은 내분 이후 급기야 외적의 침략을 받게 되기까지 정치권 중심에서 갑론을박하던 선비들은 무엇을 간절히 원했던가? 21세기 이 땅에서 400년 전의 정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사회 분열주의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당쟁의 근원을 재조명하는 『조선의 숨은 왕』은 역사서의 행간에 숨겨진 인물 송익필을 본격 분석하며 선조시대 정치가 왜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었고 이후의 분열 양상은 과연 어떠했는지를 심도 있게 포착해 낸 책이다. 십여 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독파하며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종, 정조의 리더십을 집중 조명해 통시적 역사읽기의 장을 연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의 저자 이한우가 역사라는 날줄에 정치라는 씨줄을 엮어 집필한 신작으로, 임금과 신하가 함께 운영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 선비들의 활약상을 펼쳐 보인다.
동서분당의 근원을 이조정랑직에 대한 정파간 갈등으로 풀어낸 기존 역사서의 시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자는 그보다 2년 전인 선조 5년, 선조 즉위의 1등공신인 중추부영사 이준경의 유언상소에서 발견한 “사사로운 붕당을 깨트려야 합니다”라는 문구에서 실마리를 얻어 그 세력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경기도 파주 일대를 중심으로 ‘파주 4걸’이 존재했으며 이후 정치일선에 나아가게 되는 이이, 정철, 성혼 그리고 정사에서는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이름 송익필에 주목한다. ‘조선의 8문장’ 중 한 명이자 450여 수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 정치적 존재감이 전무한 그에게 저자가 몰두한 것은 아버지의 과오로 신분이 양반에서 천민으로 하루아침에 뒤바뀌어버렸다는 드라마틱한 인생뿐 아니라 ‘조광조의 현신’으로 불리던 이이와의 학식 대결, 이이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막고자 성혼과 함께 쓴 상소문 등 곳곳에서 드러나는 그의 행적을 퍼즐식으로 맞추게 되면서이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정치현장과 이이의 활약을 중심으로 한 1부, 이이와 성혼, 정철과 송익필이라는 인물을 조명한 2부, 그리고 조선시대 대표적 반란사건인 ‘정여립의 난’을 중심으로 동서인의 대립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개인 문집, 서찰 등을 근거로 준(準) 픽션의 형식을 취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1부 「300년 당쟁의 문이 열리다」에서는 선조 즉위 과정과 영의정 이준경의 상소로 인해 조정이 일대 혼란에 휩싸이고, 선비들이 이조정랑직 인사와 민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처리를 두고 당파성을 드러내면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본격적인 정국주도권 장악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포착했다. 2부 「관직 없는 천재, 송익필」에서는 역모를 고발해 출세한 아버지의 덫에 걸려 정계진출이 좌절된 송익필의 삶을 구체화한다. 문장가로서의 면모, 이이와의 학문논쟁, 정철과의 의기투합 등의 활약상뿐 아니라 정치적인 계략에 의해 환천(還賤)되어 몰락하는 과정이 적서의 문제, 군신공치와 주기론과의 관계, 격군(格君) 문제 등의 논의와 맞물려 전개된다. 3부 「흔들리는 조선, 고뇌하는 선비들」에서는 위기에 몰린 송익필과 서인이 ‘정여립의 난’을 뒤에서 유도해 기축옥사를 유발하고, 세자추대 문제를 내세워 동인에게 치명타를 안기려다 동인의 반격에 직면하는 두 진영 간의 지략대결이 숨 가쁘게 전개된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24년 후, 드디어 그의 세상이 열리다」에서는 송익필이 세상을 떠나고 24년이 지난 후 광해군 축출을 통해 마침내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을 분석하며, 이들이 송익필과 직간접적 사제관계로 엮여 있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며, 김장생의 예학, 송시열의 직(直) 사상의 원류가 바로 송익필의 직(直) 사상이었으며 서인 세력이 끊임없이 그의 신원을 요청해 150년이 지난 영조시대에 양반으로 신분이 복귀되고 다시 150년 후 규장각제학에 추증된 사실은 그가 바로 서인의 사상을 확립한 재야의 고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 최고 지성들이 정쟁 속에서 이상 실현을 도모한 사건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이 책은 정치란 온 백성의 삶을 위해 대의를 현실화시키는 것이며 대립의 뿌리에는 정치적 이상이 존재했기에 결코 사리사욕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준다. 국론분열을 고심하는 정치가, 학자뿐 아니라 현실정치의 폐해에 시달려 정치를 등한시하고 싶은 일반 독자들도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