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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에 대한 여러 해석을 보면서 그들이 말하는 이론의 출처는 무엇일까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매체에서 소개되기도 한 책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책들을 읽기에는 시간적 여유는 물론이고 사전 지식도 부족해서 쉽게 접근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도전적인 마음으로 읽어보려 했고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책이 바로 유한계급론이었습니다.
이 책은 소스타인 베블런 (Thorstein Bunde Veblen)이 누구인가부터 알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세기 미국 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정도의 소개 문구로는 그가 왜 이런 책을 써야 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점에서 당시의 사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비판함으로써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만큼 보수적 사고를 버리고 진보적 사고를 함으로써 시대의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세기가 지난 지금에까지 유한계급론이 읽히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 책은 표면적인 문제점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사호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근간이 되는 기초적인 부분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읽을 때 지금과 당시 상황을 비교하며 이 책을 검증하며 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독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책인 유한계급론이지만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관되고 뚜렷하기 때문에 핵심적인 요소를 파악한다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하고 지금 사회를 바라는 시선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이론에 의하면 가격이 높으면 그 제품의 수요는 감소한다. 일반 상품은 그렇다. 그런데, 일부계층에서는 가격이 높을수록 오히려 수요가 올라가고, 반대로 가격이 떨어져 누구나 살 수 있으면 그 제품의 인기는 시들해진다. 이를 흔히 베블런제라고 한다는데, 수억이 넘는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최고의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것은 상품 자체가 주는 효용 외에 소수의 특권층이 가지고 있는 과시적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유한계급론>에서 유한계급이란 원어로 레져클레스, 즉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급을 의미한다. 언젠가 신문기사에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건물 임대료만 월 수억을 벌어들이는 어느 30대의 일상을 본 기억이 난다. 골프, 백화점 쇼핑, 파티, 해외여행이 그의 일정의 전부였다. 건물 관리인에게 월수입을 보고 받는 잠깐의 업무가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이런 사람을 유한계급이라 볼 수 있겠다.
저자 베블런은 이 책에서 유한계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뭘까? 거칠게 말해보자면, 유한계급이 벌이는 쓸데없는 행동들이 사회 전체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공정하고 좀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부모 잘 만났다는 이유로 재능과 노력을 넘어서는 부귀영화를 얻는다는 것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베블런은 좀더 근본적인 이유에서 유한계급을 비판한다.
부자들이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을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제가 잘 돌아가려면 가진 자들이 돈을 좀 써줘야 한다. 문제는 유한계급이 만들어내는 소비, 문화, 습관, 예절이 그 시대의 행동양식이 된다는 데 있다.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는 부자가 있는 반면에 몇 달 월급을 꼬박 모아 가방을 사는 중간계층도 있고, 어떻게든 그 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어서 가짜라도 사서 다니는 가난한 사람도 있다.
돈이 많은 특권 계급은 충분히 그럴만한 여력이 있기 때문에 형성된 관습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해서든 쫓아가고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행동양식이 됨으로써 더 필요한 것에 쏟아야 하는 최소한의 여유조차도 앗아가버린다는 게 문제다. 결혼이나 장례의 허식들를 들여다 보면 굳이 더 많은 예를 찾을 필요도 없겠다. 스포츠나 종교의식을 비롯해 교양 있다고 생각되는 행동양식, 예절들이 그렇게 해서 형성됐는지도 모른다.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인정받고, 실패에 대한 재도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가치라고 여긴다면, 생물학적 우연의 결과에 불과한 유한계급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일 수 있겠다. 노동자 계층은 지배계급이 만들어 놓은 행동양식을 따라가느라 오히려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기가 더 힘들어진다. 변화의 어려움을 베블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데, 매우 공감가는 부분이다.
일체의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존투쟁에 쏟아 부어야 하는 절대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동일한 맥락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명제로부터, ‘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논리가 도출될 수 있다. 이 논리는 ‘금력이 강한 상류계급이 부를 축적할수록 금력이 약한 하류계급은 더욱 심한 궁핍과 박탈감에 시달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민중의 궁핍과 박탈감이 모든 개혁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이미 상식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가 계급배반투표다. 중산층으로 대표되는 화이트칼라들은 보다 진보적인 정당이나 인물을 지지하는데 반해, 하루하루의 노동으로도 생계유지가 어려운 블루칼라 노동자나 무직자 층은 언제나 보수, 기득권 층을 지지한다. 결국은 최소한의 생존을 넘어서는 생활수준이 되어야 정치와 사회제도에 관심을 기울일 테고, 자신에게 무엇이 이로운지를 스스로 찾고 선택하게 될 거다. 현재 승자독식의 경쟁체제를 완화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개인을 길러내는데 필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한계급에 대한 비평론이라고 해야할까? 논문과 같은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충 상식선상에서 동의할 수 있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어서 크게 과장하고 있는 표현들은 많지 않다. 단,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서 개인적인 성향을 깊고 넓게 반영하고 있다. 베블런의 범상치 않은 인생을 살다보면, 당연히 자신이 속하지 못했던 계급에 대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유한계급을 마르크스가 말한 브루주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일단 오독의 확률이 높다. 브루주아는 그 혁명을 통해 구성된 계급이라고 할 때 유한 계급은 브루주아와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들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정치인의 자격에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 되어야 함을 긍정적으로 본 그리스 철학과 달리 베블런은 이러한 유한계급을 일종의 과시계급으로 취급한다.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것인데, 그렇다고 베블런이 사회주의자는 아니니 그 위치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베블런의 일생과 연계해서 본서를 읽는다면 분명 개인적인 성향이 유한계급을 비판함에 있어서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객관적이지 못하다. 물론, 모든 책이 작가의 사상과 그 인생을 반영한다고 하겠지만, 정도가 있을 것인데, 베블런은 적어도 평균치를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