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F. 영 저/이길상 역
전문번역가 이종인 선생이 옮긴,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렌의 유명한 고전입니다. 경제학 분야에서의 고전이, 유머러스한 필치와 날카로운 풍자, 백여년 후에도 여전히 유효한 현실 진단 등의 덕분에 여전히 대중에게 널리 읽히며 사랑받는 예도 참 드물 것 같습니다.
p42에도 나오지만 베블렌은 정작 유한계급에 대한 반감을 고취하거나 대대적인 사회 변혁을 시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역자 이종인 선생은 주석을 통해 "그런 언명이, 저자 자신의 비판적 태도를 모두 감추어 주는 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도 동의하지만, 사실 베블렌은 그 자신이 당대의 유한계급에 대해 딱히 적대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물론 상당수의 이름난 혁명가들이, 그 출신 성분상 혁명가가 될 이유가 없긴 했습니다만)이었고 실제 드러낸 행적도 그러했습니다. 언제나 시니컬하고 루크웜한 기질이었다고 하죠. 이 책도 마치 동물학자가 동물의 행태를 관철하듯, 냉정하고 중립적이며 메타적인 문체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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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invidious라는 단어에는 이 책에서처럼 "차별적인"이란 뜻도 있지만, 그 안에는 뭔가 "질투심에서 비롯한"의 뉘앙스가 깃들었습니다. 유한계급이 노동계급(혹은 그 외 취약 계층)을 차별적으로 볼 수는 있어도, 유한계급이 외부의 다른 누군가에 의해 차별적으로 파악된다는 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p59에서 보듯 베블렌은 "노동 계급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유한계급 취미를 가진 (기만적 성향)자를 snob라 규정"하는 쪽에 속합니다. 막연한 선입견으로는 베블렌이 "충분한 교양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이를 가장하고 과시하는 졸부 출신 유한계급"을 비판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런 점만 봐도 베블렌은 확고한, 또 독립된 개인 스탠스에서 기이한 사회 현상을 분석했을 뿐 어떤 이념적 지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며칠 전 박범신 산문집을 리뷰했는데 그 책에서 작가는 과거 자신이 창작한 <소금>의 주인공을 예로 들며 개인에게 정신없이 지나친 소비 드라이브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탐욕적 자본주의를 비판한 적 있습니다. 황새의 소비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아파지는 뱁새의 처량한 처지는 이 책 p95에서도 지적됩니다. 사실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는 흔히 착각하듯 유한계급만의 행태가 아니며 중산층, 서민들 역시 복장이나 스타일, 차량 등으로 어느 정도 과시를 해 줘야 자신이 무시당할 만한 위치가 아님을 사회에 알릴 수 있습니다. 이걸 못 해 주면 자신의 카스트(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은 계급)에서 바로 축출된다고 베블렌은 서술합니다.
미감(p134)이란 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어떤 바보는 예쁘지 않은 얼굴도 성형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신이 나서 떠들었으나 한국에서 이만큼이나 기술이 발전하자 이미 빤히 패턴이 잡힌 성형은 대번에 성괴, 강남미인도라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했으며 심지어 술집에서조차 인기가 없습니다. 반려동물의 양육에도 이 기준이 큰 영향을 끼치는데 어떤 동물의 경우 "쓸모없음"조차 하나의 큰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과시적 소비의 핵심은 "나는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을 이처럼이나 소비한다"는 메시지의 전달에 있습니다.
유한계급의 병적인 과시적 소비는 특히 19세기 미국에서 횡행했는데 JP 모건 주니어의 "요트 가격을 물어보는 자는 이미 그것을 살 자격이 없는 자"라는 말이라든지, 철도왕 코널리어스 밴더빌트가 "Public be damned.(와전이라는 설도 유력합니다)"라고 했다든지 하는 사례가 있죠. p194에 보면 특히 베블렌은 미국 주류 백인들의 야만적 사냥성향을 지적하며 북미 원주민들의 비참한 운명을 거론하는데 역자 이종인 선생은 여기서도 베블렌 특유의 비판정신이 드러난다고 분석합니다. p231에는 약탈적 야만인과 (이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평화로운 야만인의 구분도 있는데 이 역시 모두까기식 냉소입니다.
유한계급을 무작정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유한취미를 이어가기 위해 기업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위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산업 발달에 이바지한다는 말도 p206에 나옵니다. 역자 이종인 선생은 이 역시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했다고 정리하는데 사실 이 문장은 다른 관점에서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으므로 이른바 대리인의 딜레마가 생기는데 이 문제는 아직 이론상으로나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베블렌은 심지어 책 후반부에서 종교 담론까지 논의를 이어가는데 신인동형론적 종교가 약탈적 행태를 정당화하고 계급 서열의 항구화를 조장하며 적자 생존의 양상을 자연의 섭리로까지 끌어올리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 결론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의 인식과 문명의 발전은 자신과 동류집단의 행태를 그저 당연시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 객관화하는 노력 중에 이뤄진다는 점을 다시 새길 필요는 있습니다. 베블렌의 다분히 현학적이고 유머러스한 이 책에서 그 정도 교훈만 얻어도 충분히 문명인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책을 모셔둔 지는 좀 되었다. 물론... 한 두 권이 아니다. 눈길이 자주가면서 조바심이 드는 책들도 읽고, 시도만 하고 시작을 못하는 책들도 있다. 혼자 읽기보다 함께 읽고 토론을 해야 좋은 책들도 적지 않지만, 다들 번다하게 사는 걸 아는지라 모임을 제안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나는 마치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식재료를 보고 자책만 하는 기분으로 <유한계급론>을 읽게 되는 날을 고대했다. 반갑게도(?) 이런 고민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현대지성에서 모셔만 둔 책 읽기 챌린지 이벤트를 마련해 주었다.
1일 1쪽이란 독서의 부담을 100% 덜어주는 마법 같은 표현이었다. 근래에 이렇게 즐겁고 기쁘게 뭘 덥석 시작한 일이 있나 싶게 밴드에 가입했다. 1일 1쪽의 마법이 내게 미친 영향은 대단해서 1일 1쪽 이상 매일 술술 읽었다. 그동안 눈을 가린 건 부담감이었나 싶게.
너무 느긋하게 즐기느라 마지막 며칠은 분량을 늘렸지만, 이미 익숙해진 문장과 내용 파악이 상당히 된 책이라 그 또한 무리가 없었다. 읽었고 기록이 남았다. 만족스럽다. 지난 달 일주일 독파 모임은 다들 울면서 진행했는데... 즐거운 독서의 비결은 ‘한 달’ 이구나.
무섬증이 가시니 다음 책은 뭘로 할까 싶은 생각이 분주하다. 11월 중에 2차 챌린지가 오픈될 예정이다. 처음처럼 설레고 기쁘다.
! 같은 고민이 있으신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 그것도 다 다른 책 - 것만으로도 무척 다정한 댓글 소통이 가능한 다정한 공간이 생깁니다.
<유한계급론>
명징한 사유와 분석을 쓰인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 한편에는 사는 일이 더 불편해질 것이란 두려움도 공존한다. 고찰과 실천을 요구하는 공부는 대개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의 목록을 늘린다.
120년 전 - 읽고 나니 유사성이 많아서 그리 오래 전이란 생각이 안 든다 - 도금(gilded) 시대 미국 사회를 관찰한 책이 현대 사회를 분석한 사회학 보고서 같으니, 미국식 삶의 양식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패권이었단 자각이 절로 든다.
물론 빈부격차와 계급문화는 전 세계에 온존하는 질서이며, 이는 국경에 무관한 빈곤층의 보수화, 유한계급에의 동경, 흉내 내고 싶은 욕구로 인한 과시적 여가와 소비현상 - 유한계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의 가치는 ‘주장’을 실증하는 필요한 데이터들이다. 베블런은 이런 자료를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사례들에서 찾았다. 학술적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가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엄밀히 따져보면 워크푸어와 가장 비슷한 삶을 사는지라, 불쑥거리는 감정의 기저에 온갖 복잡한 배경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분노, 경멸, 우월감, 만성피로, 좌절, 절망, 망상 등등. 다행스럽게도 좋은 이들을 만나 늘 배우고 살지 않았다면 더 이상한 인간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자연스럽게 지혜가 비례증가하진 않지만, 너무 늦지 않게 물건과 소유에 대한 욕구를 절제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이다. 그중에는 포기도 있겠지만, 할 수 있는 소비 중에서도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것들의 구매는 거의 하지 않는 것만은 만족한다.
반백년을 살아보니, 기성세대의 변화와 실천으로 세상을 개선시키는 일은 어렵다고 본다. 살던 대로 살 가능성이 훨씬 높다.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젊은이들이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빈부격차의 위계를 인지하고, 부를 부러워하고 추구하기보다, 구조 자체를 뒤집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마 여전히 주식 이야기를 하고, 돈에 상당히 휘둘리며 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깃발을 들면 지지하고 응원하고 함께 걸을 기성세대들이 많을 것이란 희망은 낙관하고 싶은 나의 의지이다. 소유와 소비가 명예와 존경의 바탕이 아니란 통찰이 사회의 상식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1866년에 공개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저 "죄와 벌"을 1984년에 읽으면서 난 전율을 느꼈다. 당시 120년전에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갈등 속에 분노하는 사회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인간이 느끼는 갈등을 동시대처럼 느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고전에 대한 엄청난 대우를 했다. 현대인이 쓰는 책은 그 아류작들일 뿐이라고 대학 첫 미팅 때 서점주인을 아빠로 둔 독서광 여대생에게 퍼부었었다. 고전예찬론자로서^^
1899년에 발간되었는데 120여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필독서적으로 추천되는 이 책을 이제야 읽었다.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추천하고 해설하지 않았으면 절대 구매하지 않았을 건데....
그러나 위에 극찬한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120여년전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정도로서의 가치는 있지만 도무지 제대로 읽히지 않는다. "죄와 벌"은 소설이어서 잘 읽혀졌던 것과의 차이가 있지만 책을 번역한 이의 '해제'가 없었다면 이런 정도의 감상평도 쓰기 힘들었을 것 같다. 고전예찬론자로서의 이력은 먼 대학시절의 멋부림이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최근에도 얼마나 좋은 책들이 많은데...
번역자는 그래도 대학초년생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며...
난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고전을 원문대로 읽어서 얻을 가치보다는 그 추종자들이 해설을 곁드린 경제학 서적을 읽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