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진실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또 다른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어졌다는 것. 처음에는 30분으로 충분했는데, 나중에는 다섯 시간을 넘게 머물러야 통증이 사라졌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날, 사실 노인은 폐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노인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며 드문드문 생각했다. 굳이 살아가야 할까. 그럴 필요 있을까.
--- 강화길 「폐가」 중에서
그런데 저기요, 막무가내로 저희더러만 계속 물러나라고, 떨어지라고 윽박지르시면… 알았어요, 간다고요. 갑니다. 여러분, 제가 이 현장을 더는 가까이서 담아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악! 밟지 마세요 좀! 여러분, […] 부디 폭탄이 터지지 않기를, 그것이 허풍이고 가짜였기를 기도해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한때의 해프닝에 불과하고 폭탄남 포함 전원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안전지대에 머물기를, 몸과 마음이 비록 그 어떤 만성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할지라도, 연고만 슥 발라도 치유되는 상처만 입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구병모 「상점을 폭파하라」 중에서
빛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죽지.// 우리는 빛으로 산화하는/ 마리의 신하들.// 라듐 치약, 라듐 파우더, 라듐 성냥, 라듐 탈모 치료제, 염화라듐.// 저 빛을 끄러 갈 수는 없지./ 저 빛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다 돌아오지 않았어.// 우리는 검은색 인화지에 흰 그림자를 남기고 멀어져갈 뿐.// 우리는 서로를 향해 이름을 부르다/
우리 속의 귀신마저 뱉어버리지.//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도 누구나 끝끝내 품은/ 한 여자를 만질 수는 없어./ 나는 나에게 숨은 여자를 오우무아무아라 부르지.
--- 김혜순 「하늘사막 바다사막: 오우무아무아」 중에서
하우스보트에서 묵는 동안/ 식민 지배 시절부터 일했다는 곰보 자국 가득한 노인은/ 그 시절 방식대로 조용히 설거지를 하고/ 식기를 흰색 냅킨으로 닦는다// 식사를 할 때마다 컵 속의 물에는/ 냅킨 자국이 남긴 먼지처럼 하얀 실이 떠다닌다/ 그 모습에 잠시 식사를 멈추고 있으면/ 그의 눈에는 곰보 자국만큼이나 은밀한 빛이 비친다// 달 호수의 새벽 수상시장에는/ 곰보 자국 가득한 노인의 미소와/ 그 속에 간직된 비밀의 속삭임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수많은 소리로 떠들썩하다
--- 박형준 「인도 카슈미르 달 호수의 새벽 수산시장」 중에서
아끼는 찻잔은 왜 깊은 곳에 있을까요./ 손을 뻗을수록 뒤로 더 뒤로 밀려나 버려서/ 결국 의자를 가져와야 했지.// 이것 좀 받아줄래요?/ 의자에서 내려오려는데 중심을 잃고 휘청했어./ 나의 무엇이 꺼내진 걸까. 물을 데우며 만델린,/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끼의 촉감을 닮아 있었지.//찻잔이 바닥을 드러낸 후에도 한참을.// 아까 당신의 찬장이 열렸을 때 말이에요…/ 내 이름을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만델린. 알칼로이드 발색 시약을 뜻해요./ 그래서인지 나는 늘 한 방울로 존재하는 기분이 들어요.
--- 안희연 「찬장의 시」 중에서
그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같이 느꼈다. 다스려지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을 때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역한 담배 냄새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머리가 뜨거운 불길로 휩싸이는 걸 느꼈다. 그렇게 부탁했는데, 그렇게 호소했는데, 그는 중얼거렸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돌아버리겠네, 돌아버리겠네,라고 침울하게 내뱉었고, 그러자 가속 페달을 밟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마침내 아악, 아악,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그의 몸을 열고 터져 나왔다. 그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짐승이 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 이승우 「평범한 일」 중에서
은주는 상택에게 상엿소리를 해달라고 했다. 조아에게 상엿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상택은 지금 이 자리에 상엿소리는 맞지 않는다면서, 대신 회닫이소리를 하겠다고 했다. 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산 저 산 찾아봐도 이 자리가 내 자리라.” 상택은 노래를 멈추고 은주를 쳐다보았다. ‘에헤리 달궁’이라고 후렴을 넣으라고 했다. “달궁이 뭐야.” “달궁 달궁 땅을 다지는 소리야. 튼튼하게.” 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택이 노래를 멈추면 후렴을 넣었다. 노래는 길고 길었다.
--- 임솔아 「폐기물이 아닌 것」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히피들처럼 잔디밭에 둥그렇게 앉아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합창하는 무리도 있었고, 작은 공연장에서 잼 세션을 여는 무리도 있었다. 이름을 잃은 남자는 숲속 산책로를 걷다가 작은 공터에 놓인 피아노를 발견했고 거기서 간단한 독주곡을 연주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피아노 근처에 와서 남자의 연주를 감상하기도 했다. 남자는 연주에 몰입하다 갑자기 내장이 꼬이는 듯한 복통에 손을 멈추고 몸을 비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척했다.
--- 장강명 「복통」 중에서
푸른 신호등이 켜져도 결코 건너갈 수 없었던/ 횡단보도를 바삐 건너간다// 혼자서는 떠날 수 없었던 길을 떠나/ 혼자서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기 위하여// 고비사막을 횡단하듯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도 오지 않는 버스정류장을 지나// 은행나무 밑에 홀로 서서/ 낙타처럼 가을비를 맞는다
--- 정호승 「횡단보도」 중에서
우리는 TV 허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우주 끝에서 어떤 외계의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눈을 가리지 않고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서// 가까운 곳에서 죽어가는 것도/ 얼마든 바라볼 수 있다/ 아주 멀리 있다고상상하면 되니까//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몇 세기 전의 맑은 가을날 사과가 떨어지듯/ 머리 위의 사과를 심장이 관통했군요/ 잘생긴 젊은 사수의 은빛 화살처럼 백린탄이 날아왔군요
--- 진은영 「후이늠에서」 중에서
식당을 나와 계획한 대로 디저트를 먹고 아쿠아리움에 들렀다 나오자,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그래야 했다. 노곤하다 할 정도가 되어야 뭔가 잘 다녀왔다고 느껴지는 법. 그 노곤한 만족감으로 깜빡깜빡 조는 가족들을 태우고 안전하게 귀가시키는 것이 가장의 임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 교통 상황도 생각보다 괜찮아서 운전하기에 힘이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무언가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 지지가 않았다.
--- 천운영 「공정한 마음」 중에서
황인수가 임대한 땅을 두고 흙살이 좋은 곳이라고 말해준 사람도 이장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삽으로 흙을 한번 떠보자 바로 알게 되었다. 경찰의 방문을 받고 처음 든 생각도 바로 그것이었다. 흙살이 좋은 땅이라는 것 말이다. 용의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굳어 있지 않아 쉽게 떠지고 속흙이 붉고 물이 잘 빠지는 땅이니 다급한 상황에서 뭐든 파묻기 수월했을 것이다.
--- 편혜영 「비닐하우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