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거스 저/지여울 역
샌드라 거스 저/지여울 역
이다혜 저
조경국 저
김남영 저
리 마이클스 저/김보은 역
정희진처럼 읽기에 이어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를 읽는 중인데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중 가장 유익한 것 같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내 존재와 위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고, 나를 둘러싼 맥락이 정치적임을 늘 염두에 두기. 두고두고 필사하면서 곱씹어 볼 어구들이 많아서 좋았다.
ㅡ
INSTAGRAM @hppvlt
https://www.instagram.com/hppvlt
마지막 4장은 좋은 문장들을 옮기면서 필요한 경우 < >로 강조하고 사견을 살짝 곁들여 보겠다. 밑줄긋기 많으면 싫어하는 작가도 있고 실례일 것 같은데 도무지 줄일 수가 없다 요. (^-^)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기에 모든 앎은 인간-자연-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상호 작용이 학문의 발전사이다... 지식은 지역, 문화, 사람 사이의 번역이며, 혼종, 혼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견이나 ‘틀린 말’도 언제나 의미가 있다. <재해석하기 나름>. (189-190)
==> 어느 부분에서 오해가 생기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지는 발언을 듣는 게 아무래도 유리할 듯.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은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필요한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언어다.’ (190)
==> 강산이 변할 시간동안 싸이월드에서 실컷 놀았다. 그때 방 이름이 The Enormous Room이었다. 가상공간에서만큼은 거대한 방을 갖고 싶어 e.e. 커밍스의 시 제목을 땄었다. 팬데믹 시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읽기 바람이 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큰조카가 독립서점에서 기념엽서를 사와 주기도 했었다. 글쓰기(프리랜서 작업) 공간과 일정 수입이 지금 주목을 끄는 이유는 독립된 분리 공간과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함의하는 바가 클 거다. 여담] 결혼할 당시 한 약속 두 가지를 남편이 지켰는데도.. 우울병을 이기지 못했다.
<당파성과 가치관>이 필수적인 이유는, 모든 앎은 현실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단을 위한 융합인지가 핵심이다... 융합은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가치관의 문제다. 융합의 전제는 <지식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이다. 융합은 그 과정도 결과도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191)
==> 정치적 언어 전성시대 함 가즈아 ~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고 인지, 지식, 돌봄, 감정 노동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invisible heart’이라고 주장해 왔다. (193)
==> 아담 스미스를 시작으로 한 자본주의를 재해석하는 움직임으로, 얀 물리에 부탕 같은 여성주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대안적인 글로벌 경제를 귀띔한다.
모든 지식은 다른 지식과의 <비교나 대비>(반대말, 동의어)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절대로 홀로 성립하는 개념은 없다. 모든 개념은 연결의 법칙이 다를 뿐 연결된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려면 <새로 공부>해야 한다. (198-199; 202)
어떤 언어도 한 가지 요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얘기다. 말은 <계속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 중 ‘오염’은 필연적이고, ‘외래어’ 비난 자체가 외설적(벗어난 개념^^)이다. (207)
==> 저자는 ‘한글 전용론’의 한계를 말하며 한국어는 한문과 영어 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한글도 우리말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언어와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겪었던 사정상 여러 언어 흔적이 있는 중역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대학생의 한문과 상식 용어에 대한 이해력이 교육개편과 인터넷 문화의 영향인지 점점 떨어진다.
이것(언어)은 <권력의 임의적 결정>, 즉 사회적 산물이지 하늘의 이치가 아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는 것이다. 조물주 콤플렉스가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사고라면, 메시아 콤플렉스는 그것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피해의식은 새로움에 대한 수용성, 호기심,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라는 융합적 사고방식을 방해한다. (208)
==> 콤플렉스 부분에서 ㅋㅋㅋ 비약과 프로파간다는 내 전문인데. 저자는 “정체불명은 모든 언어(문화)의 속성”이라고 파격적으로 언명한다.
<관점>에 따라 데이터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관점은 당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기>다. (211)
이제까지 공간 개념은 시간적 진보를 증명하는 도구--‘그 시대 위대한 건축물’--였다. 오랜 세월 동안 공간은 시간 개념에 비해 인식론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문학사에서 거의 모든 비유는 젠더, 몸, 자연, 공간과 관련되는데, 이는 남성의 사유가 투사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공간적 주체>다. 어느 공간에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코로나 시대 최대 아이러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지만 ‘사회’의 대안으로서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다... 코로나 스트레스는 곧 공간 스트레스다. (212-214; 215)
==> 내 경우 학업 과정에서 시간 개념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지만, 특히 공간에 대한 사고 전환이 신선했었다. 데카르트의 몸/정신 이분구도 뒤집기에 버금가게 공간적spatial 접근이 고정 관념을 흔들었다. 이동이 자유롭고 워라밸을 장착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말이다. 코로나19 초기만 해도 건축학자 유현준의 책들을 탐독했었는데 지금은 멀어졌으..
한마디로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객관적은 없다. 어떤 객관도 결국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산다. 그때마다 생각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객관성은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오염된 개념이다. 객관성은 사회와 맺는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문제다...
‘객관성은 없다’의 의미는 진짜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객관이 특정 맥락에서만 작동하는 <유동적 특성>을 지닌다는 의미다... 강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처럼 여겨져서 투쟁해서 쟁취할 필요가 없는 반면 약자의 삶은 그렇지 않아 고달프다. 약자에게 객관성은 쟁취해서 확보해야만 가능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 운동이다. (217; 219; 221)
==> 국가권력에 의한 언어의 오염을 가장 현장감 있고 무게 있게 포착한 르포 작가가 조지 오웰일 것이다. 이런 객관성의 철옹성을 깨려면 읽고 역사의 반복과 흐름을 공부해야한다. 마지막 인용에서처럼,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운동에 몸담고 목소리 내는 민주시민들의 실천, 멋지다!
시대와 장소, 말하는 사람의 위치, 정치적 상황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객관성의 내용은 다르게 구성된다. 그래서 융합적 사고에서는 객관성보다 ‘상황적 지식’을 주장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있다. (222-223)
대개 언어는 <위계의 만남>이다. 이분법은 A와 B가 아니라 기준으로 삼은 A와 그 외 것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비교>하려면 연구 주제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특정해야 한다. 앎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정하는 것이 비교의 기본이다... 기존의 앎을 의심하지 않는 비교는 무의미를 넘어 유해하다... 오히려 인문사회과학 연구는 변수, 즉 새로운 배경, 상황, 맥락을 드러내기 위한 공부다. (225; 230; 227-228)
==> 정희진 작가가 말하는 ‘생각의 지도’와 자기 이해, 그리고 사회 기여의 연동성이 역동적이라 좋다. 대학원 시절, 동기와 나는 비교의 평가에 시달렸다. 둘이 반반 섞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훈수를 들어야 했다. 융합이나 협업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이니까 그러려니. 나만 하는 투덜거림인 줄 알았는데 정 작가도 한다. ‘당신이 뭔데!’ 오래 전 지도교수님과 합의를 봤다. 복잡할 거 없이 70% 내키는 사람은 좋은 사람 하자고.
안목은 그 사회의 수준과 개인적 노력, 환경의 총체다... <자기 프레임>을 모르는 사람이 오피니언 리더, 고위 관료, 통치자가 되면 역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민생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233-234)
==> 뼈 때리는 문장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우중의 덫에 걸려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사회의 안목’을 겸비해야 한다. ★ 현실 정치와 선거는 ‘프레임 전쟁’이다 ★. 내년 총선에서 의제를 잘 선점해서 화끈하게 이기자.
각종 자원 배분과 해결책 결정자를 비롯해 인력풀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 한국은 진통을 앓고 있다. 저자는 2021년 ‘스폰서 검사와 비리’와 70년 해묵은/해먹은 검찰의 일제 잔재를 끊어낼 수 있었는데, 김건희 씨의 논문이 불거져 검찰개혁이 산으로 갔다고 비판한다. 아래 인용처럼 윤 씨 문제는 삭제되고 여론전 속에 문제의 본질이 엉뚱하게 물타기 당하고 말았다. 지난 리뷰와 마찬가지로 에바의 거리에서의 삶과 거니의 삶은 비교가 안되자나 요.
판결이 법대로 내려지는 게 아니라 어떤 판검사를 만나느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직 있어요, 쩝/ 내가 궁금한 점은 윤 씨 부부의 탄생이 <검찰제도의 산물>인가 여부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 우중 농단. 에휴/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해 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현재진행형 휴우/ (235-237)
내 안에 가진 이야기 주머니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내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던 내가 지각변동을 겪은 듯 나불나불. 몸 고생은 했다 할 수 없지만 마음고생이 마디마다 썼는데도 꿀꺽 잘 삼키며 살아온 것 같다...(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같다며 자뻑 하려니 현실적인 엄마와 여동생이 스쳐 수정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향이 그나마 지켜준 인생이다. 묵묵히 고요히.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5(현재 기준으로 최종) ‘새로운 언어를 위해 쓴다’가 어떤 이에게는 별 울림 없고, 더욱이 3장 ‘다른 것을 다르게 보기’도 탁상공론으로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관통penetration을 당한 나머지 나를 모아 보는 값진 시간이었다.
살면서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황급히 돌아서고 보낸 사람들이. 유물론적 으로는 함께 하지 못해도 그들의 말과 글이 내게 남아있다. 3장을 읽다가 90년대 목소리내기라고 했던 다른 말, ‘자기 언어’가 중요하게 싹튼 시기를 재확인하며 뭉클해졌다. 스무살, 방황하다가 나는 크리에이티브 라이터(뭔지도 몰랐으..)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슴에 품었고 지금도 간직(만)하고 있다. 능동태 아니고 그냥 정해진 흐름을 따라.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데, 자기 언어는 현실 인식을 통해 변화를 추구하게 이끈다. 이 세 가지가 무한 반복 루프 같다고 할까. 자기 언어를 갈구하는 나이지만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는 아예 시도조차 안 했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그곳에 없을 거고 나를 봐달라고 애/떼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말하지 못한 고통을 꺼내 자기/사회적 검열과 침묵을 깨고, 정제된 언어로 형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인생의 큰 축이었다.
이 책의 키워드는 융합融合이다. 융합을 유심히 살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 “독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아포리즘을 투척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저자가 미국은 “다양한 사회가 아니다. <백인 문화>가 용광로를 운영한다. 백인들은 용광로melting pot에 들어가지 않는다(145)”고 말할 때 표현이 진심 부러웠다. ‘그렇지, 운영진이 기계의 일부가 될 일은 없지.’ 자기 언어는 봤다고 해서, 깨우쳤다고 해서 따라오는 부속품이 아니다. 언어는 가진 것 없고 특권층에 속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연마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한다.
글이 될 때, 아니 구체적으로 책의 형태일 때 그것은 아는 것을 전 꼬치처럼(冊 내가 미는 표현^^) 시각적으로 명료화한다. 그리고 글이 되었을 때 그것은 제약을 빗겨 뻗어나가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체 맥락이라는 보호막을 갖추어 설을 더하거나 반박하려면 세심히 살펴야 한다. 상호 이해의 노력이 추가되는 매개라 말보다 관계가 두텁고 기대게 된다. 건축물이기에 나중에 수리나 개조나 리모델링이 구체적이고 큰 망에서 조화로울 수 있다.
어쩌다보니 3장 리뷰가 글 예찬으로 넘어가고 있다. 두더지 게임 속 두더지처럼 빼꼼 얼굴을 내밀 때마다 맞는데도 기꺼이 머리를 내주게 된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위한 융합인가>이다... 안보 신화를 종식할 수 있는 논리, 무의미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논리, 한국 현대사에서 ‘검사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 이런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융합이다(146).” 융합은 뜬구름잡기나 말풍선 생각에 머무는 작업이 아니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146).”
인문학 공부를 하며 늘 달고 산 게 ‘왜? 도대체 왜?’ 라는 물음들이었다. 와이? 가 우중 우산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게다. 좋은 질문이 좋은 대답을 부른다(賢問賢答^^). 반복해온 정답지의 답안이 아니라 이전에 미처 감안하지 못했던 기류를 품는 출발점이 아마 질문하기 일 거다. 카프카가 말한 정신의 얼음을 깨는 도끼까지는 아니어도 균열이 가해지는 외부 충격의 순간이고, 만남이 얕지 않고 흔한 사이를 넘어선다.
나는 정 작가가 융합은 학문 간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한다기보다는 ‘정치적 요구’라고 할 때 불끈 힘이 났다. 학문 간 소통도 정치(여러 이해관계를 조정)다. “횡단의 정치는 사고를 교차하거나 기존 의미의 문지방을 넘어 사회 변화trans/formation를 추구한다(147).” 적어도 나는 ‘아버지의 연장’이자 지배 언어의 식민성을 띠어 폭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기존의 언어 틀에서, “하나의 마디”article에 대해 “또렷이 생각을 밝힘”articulate an idea으로써 절합한다고 할 때 하트 뿅뿅 반해버렸다.
인문학 종사자라면 한번쯤 해봤을 “왜 우리는 ‘인문학 강국’이 아닐까?(왜 노벨 문학상을 못 탈까)”라는 회의감에 젖은 질문에 “융합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언어가 부재한 사회(149)”라고 직언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역학관계)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151).” 이 부분에서 나는 지식의 위계질서에 금이 가게하고 싶어 크리에이티브 라이팅에 줄곧 관심을 가져왔음을 깨닫는다. 차이는 필요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개념인 것이다.
융합은 ‘완전 정복’형이 아니고 “생각하는 힘이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는 태도(152)”이다. 저자는 79억 개의 개별적 몸이 손쉽게 소통하고 대화하고 공감할 거라고 절~대 보지 않는다. 상호 이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내다보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이다. 연장선에서 ‘협력’도 원래의 지식의 상하구조를 견고히 하여 ‘약자 착취’에 허울 좋게 쓰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바람직한desirable 융합은 기득권이 고수해온 (집단)인식을 포기하게 하는 “가로지르기이며 앎의 변화다.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155)”이다.
융합은 손이 많이 가는 피곤한 작업이다. 정상적이고 노멀하다고 간주되는 언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갱신되게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 일례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가족에는 수식어가 없으나, 베트남 신부는 ‘다문화’, 미국 신랑은 ‘글로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런 차이는 “인종주의, 남성 중심주의, 국가 간 위계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157-158).” 소통전문가 김창옥 강사는 가족끼리 다른 나라 사람으로, 다른 언어를 쓴다고 생각하면 너그러울 수 있다고 설파한다. 마찬가지로, 정 작가도 ‘가족 내부’에도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충돌이 존재하며 “모든 가족은 다문화 가족”이라고 정의한다.
다음은 가족주의의 위험성을 자녀로까지 적용해 눈길을 끈다. “가족 구성원의 분업과 위계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고 한의 문화를 낳는다. ‘한’과 울화는 예전 어머니들이 가진 사연이 아니다. 가족, 사회, 학교 제도의 <구조적 억압> 속에서 ‘한 맺힌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158).” (미안합니다ㅜㅜ) 다시 말해 범주 설정이 무엇을 중심적으로 인식하는지를 드러낸다. 다양성 혹은 보편성이라 하고선 ‘하나’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배제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한국 사회는 ‘수저’ 논란 속에 부모의 재력이 자신의 능력으로 혼동되고, 기회와 조건의 불평등이 팽배하다. 정 작가는 다양성을 말할 때 그 여러 개끼리 평등하지 않음을 고려하고, 어설픈 관용이나 배려도 우월함의 표식일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권한다.
모든 지식이 저절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노력이 없으면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의 반대말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진보’도 공부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자기 분야>는 특정 학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이 필요로 하는 정치적 입장, 새로운 가치관이다. (162-163)
위의 인용은 자기 분야가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만들어진 것인지를 밝히는 ‘실천’이, 융합적 공부라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조국-박원순-윤미향을 하나의 진보 사태로 일반화하거나 패키지 처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 사건을 바라보는 저자의 모든 발언에 동의하진 않는다. 허나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170).”
(긍정적인 파괴인 데리다 식의?) 해체destruction는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을 낳는다. “건설적 사고는 파괴를 기반으로 하는 창의적 사유under construction”이고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해석은 기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생산, 확대, 다양화하는 과정이다(171-172).” 그 결과 진짜 문제를 은폐하거나 차별을 대충 봉합하고 하나로 무리해 통합함을 피하고, 인식자의 개별 위치(성)를 살려 닫힌 의미를 교란할 수 있다.
이리 쓰다보면 말로는 뭔들 불가능할까 싶지만 현실은 ‘자기 나이’를 수용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다. 노화가 이십대부터 시작되는 인간의 조건이자 생로병사가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도 건망증도 여기저기 탈나는 신체도 싫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진보 기득권 세력인 386이 세대 갈등의 원흉인 것처럼 몰이하는 것도 앞으로 자제해야겠다.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답정너는 폭력이니까.. 교육, 부동산. 건강, 노화를 구분해 말하지만 이들은 구조적으로 지배받는 ‘계급’의 문제임이 드러난다. 세대 갈등을 노년과 청년의 대립으로 떠들지만 기실 ‘계급’을 둘러싼 갈등 첨예로 읽는다.
나이 듦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들기 쉬울 뿐 아니라, 도리어 노욕이 생기고 성숙하지 못할 수 있으니 늘 깨어있으라 한다. 사담이지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속 늙고 지친 가축들과 같은 에코 챔버 충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청년층의 ‘취업’을 ‘시간대 최저 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177)”을 적대시하라고 말한다. ~는 ~때문이야, ~가 제일 문제야 라는 식의 깔때기 언설(‘환원주의’)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기존 개념에 의문을 품고, 차이와 경계의 기준을 재설정해 ‘지금, 여기’의 사안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은 언제나 움직이니까!
저자는 합하는 과정에서 분分별別이 필수적이고 구분區分이 ‘융합의 핵심’이라고 피력한다. 대표적인 예로 대선 때 김건희에 대한 벽화를 과도하게 비호하며 ‘검찰 문제’를 은폐한 정황을 언급한다. 김경진 전 의원은 윤 씨 부부의 “검찰의 부끄러운 역사”를, 엉뚱하게 마크롱과 존슨 내외와 나란히 두어 덮어버렸고, 현재는 조정훈이라는 시대전환 역적이 요상한 비호를 해댄다(거니 대변인인가!). “지식이 생산되지 않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이들은 기득권층이고, 고통받는 이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처할 수 없는 약자들(180)”임을 기억하고 힘내자 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