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예수복음』을 신약성서에 더하고
『눈먼 자들의 도시』로 묵시록을 재해석한 주제 사라마구, 『카인』으로 구약성서를 가로지르다! 독특한 내레이션 방식, 우화적 수법, 환상적 요소의 도입으로 구약성서를 재해석한 주제 사라마구 불후의 작품 하나님이 자신보다 동생 아벨을 더 사랑한다고 믿은 나머지,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카인은 놋 땅으로 간 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정말 하나님은 카인은 저버리고 아벨만 좋아하신 걸까? 주제 사라마구의 최신간 장편소설 『카인』은 구약성경 창세기 4장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죄로 하나님에 의해 이마에 낙인찍힌 이후 성경에는 더 이상 비중 있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21세기를 사는 지금까지 인간의 죄와 회개를 촉구하는 데 거론되는 ‘죄 지은 자’ 카인의 눈을 통해 신의 존재와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 세상을 되돌아본 작품으로, 2009년 작가가 포르투갈어로 처음 발표한 이후 27개국에 소개되며 전 세계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의식을 환기해 왔다. 사라마구는 카인이 10여 년 동안 떠돌면서 창세기 속 사건을 곁에서 보고 느끼며 직접 경험하는 이야기 형식을 빌려 소설을 전개한다. 카인에게 비춰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결코 너그럽지도 자애롭지도 않다. 아들을 희생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아브라함이 받는 모습, 하늘에 닿고자 거대한 탑을 짓는 사람들을 향해 여호와가 허리케인으로 한 일, 여호와가 미래에 무엇을 바라게 될지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들 위에 벌로 불과 유황을 내리는 광경, 시나이라고 불리는 산의 기슭에 모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다가 그 죄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 이스라엘이라고 알려진 군대에 속한 병사 서른여섯 명을 감히 죽인 도시와 마지막 어린 아이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 주민, 또 여리고라고 부르는 다른 도시와 그 성벽이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몇 개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로 무너지고 안에 있던 모든 것-남녀, 노소, 심지어 소, 양, 나귀까지 다 죽은 사건 등을 직접 경험하는 카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되묻기에 이른다. |
2019년 11월 26일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읽으며 생각해본다.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표현된 현실과 과거 혹은 미래의 모습은 인류가 그럼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작가의 그 글을 통해서 이어지게 된 이번 작품과의 만남은 나에게 카인, 그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주었다.
이 소설은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가인’이라고 번역된 이름을 ‘카인’이라고 표기했다. 영어의 발음대로라면 카인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 소설이라는 특성으로 어느 한 종교에 대한 폄훼가 아님을 표현해야 하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다른 작품인 『예수복음』은 신약에 대한 저자만의 독특한 재해석을 담고 있다면 (아쉽게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번에 읽었던 작품은 구약에서도 특별히, 창세기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혹시 나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지를 묻는 것처럼.
과연 인류의 시작은 어떠했으며, 사피엔스가 주류가 되기 위해서 이루어졌던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모조리 살육해야 했던 것들이 숨겨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신화로 포장되어서 당대의 피비린내를 정당화시키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 죄 의식을 없애려고 많은 일들을 감내해왔는지 모르겠다.
소설로 촉발된 삶에 대한 과거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하지 않고, 회개 했다고 넘어가지 않기를.
소설 속에서 종종 '카인'을 만났다.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게 된 건 존 스타인벡의<에덴의 동쪽>을 읽으면서다.이후 카인을 제대로 마주할 날이 오길 바랐다.교회와 거리를 둔 지 너무 오래된 터라,성서 속 카인은 동생을 죽인 살인자 정도로 남은 기억이 전부다.당연히 왜 죽였으며,이후 카인의 삶은 어떻게 흘러 갔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아니면 궁금했던 생각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사실 존 스타인벡의 소설도 기억은 가뭇해서 다시 읽어봐야 하겠다.어렴풋 나는 기억은,카인이 저지른 살인 보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 신은 과연 잘못이 없었을까..에 대한 질문 정도인데 분명하지는 않다.주제 사라마구의<카인>을 만났을 때 반가웠던 건 그래서일게다.그러나 소설은 생각처럼 잘 읽히질 않았다.그렇게 한참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카인>,읽고 싶어진 건 표지를 장식한 그림 때문이였다.
"노아는 불굴의 낙관주의와 여호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를 잃지 않고 생각했다.그러나 자기 아내의 설명할 수 없는 실종에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어 카인에게 말했다,아내는 자네 소관이었잖나,어떻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그 질문에 카인은 질문으로 대답했다.내가 어르신의 부인을 지키는 자입니까,내가 그 분의 발목을 줄로 묶어 나와 이어 놓았습니까,마치 어린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요(...)"/204쪽 표지의 그림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의 '신의 어린양' 이다.화가는 성서에 기초에 그림을 그렸을 터..그러나 나는 소설을 읽어가다,노아와 카인의 대화에서 어린양이 카인이란 생각을 했다.보여지는 그대로 어린양이였을 지도 모르지만.(기꺼이 오독의 마음이 발동했다.) 단순히 발목이 묶여 있다는 표현 때문만은 아니다.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며,오독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소설은 처음부터 기꺼이 오독이 허락(?)된 소설이란 생각을 했다.이럴때는 비종교인란 점이 고맙게 느껴질정도다.카인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아담과 하와에 관한 저 유명한 일화가 소개된다.그런데 기분좋은 당혹감을 경험했다.
소극적인 듯한 아담과 적극적인 하와의 모습이라니..이런 모습때문에 신은 저들을 쫒아낸 것으로 부족해서 형제간의 살인까지 일어나게 한 걸까..그럼에도 신을 섬기는 이들은 응당 받아야 할 벌이라 생각했을 게다.그런데 카인은 반기를 든다.동생을 살인에게 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신의 뜻이였으니 가혹하고..이기적이라고 직설적으로 공격한다.그것도 소설이 끝날때까지 사실,카인의 직설적인 화법은 비종교인입장에서도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다.신을 향해 이렇게 직설적으로 공격할 줄이야.'공격'이란 표현을 쓰긴 했지만 내심 사람들의 속마음도 카인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시시때때로 신이 정말 있는 걸까?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것들에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라는 말이 어떨때는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질 때도 있지만 쉬이 받아 들여지게 되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이런 괴리의 틈에서 카인이란 존재가 있었던 걸까..작가는 카인과 같은 인물이 더 많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걸까...나는 아벨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나 신이 죽일 운명에 나를 놓았으니,내 잘못이 아닌 신의 잘못이라 항변하는 카인을 이해하기는 참 벅차다.게다가 소설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소설적인 상상으로 마무리가 되고 보니 당혹감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인데,성서적인 부분을 거둬내고 질투와 믿음이란 감정으로 소설을 따라가게 되면 카인의 살인은 질투에서 시작된 것이니 그 역시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졌는지에 대해 돌아봐야 하지 않았을까..신을 향한 카인의 돌직구가 때론 시원했지만,모든 것을 신의 탓으로.그래서 복수아닌 복수의 칼을 들려한 모습은 여전히 물음표가 따라온다.(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 종교인 입장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비종교인 입장에서 느껴지는 불편함 역시 다를지 모르겠다.그러나 아벨을 죽인 이후 카인의 삶을 어땠을지 생각해 보길 바란 작가의 상상력은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성서를 어떻게 해석했는가에 대한 질문보다, 인간의 욕망에 자리한 질투와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비종교인이라 더 가능했을게다..) 말랑말랑한 소설은 아니였다.그러나 살인자로 기억된 카인을 또 다른 카인의 모습도 있을지 모른다는 소설적 상상 덕분에 신과 운명,질투와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소설을 읽기 전까지 카인은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을 죽인 인물이였는데..소설은 정말 그를 살인자로 단정 지어도 되는 걸까..를 묻고 있었다.적어도, 카인의 목소리 만큼은 그랬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106
요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분야를 알고나서 관련 책을 읽어보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떤 책을 읽어볼까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마르케스나 보르헤스, 사라마구 이렇게 세 명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셋 다 노벨문학상의 경력이 있고, 이 분야의 대가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고르고 골랐던 책이 <카인>이다. 딱히 큰 특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주제 사라마구가 숨을 거두기 직전 해에 87살이라는 적지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계속했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고, 문체가 워낙 독특하다고 해서 구경이나 해볼라꼬.
사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집에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펼치지 못한 기구한 나의 사정은 중고서점에서 같이 구매한 책 중 한 개를 펼쳐보는데 헐 값에 구매했던지라 책이 너무 삭았는지 피부가 간지럽고 목이 그슬그슬해서 그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던 모든 책들을 책장에 꽃아두기만 책등만 읽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때가 되어 이 책을 읽고 다음 타켓으로 <눈먼 자들의 도시>를 정했고, 오늘 오전에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주문했다. 어떤 이들은 사라마구의 글을 읽기가 어려웠다고 하는데 내 경우에는 쉼표와 온점만으로 글을 이렇게 재밌게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독특한 매력과 감히 성서에 도전하는 작가의 배짱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글쎄요, 내가 선택받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가지는 배웠어요. 그게 뭔데. 우리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는 완전히 미쳤다는 것. (…) 여호와는 정의 관념이 아주 이상한 모양이군. 네, 인간의 정의가 어때야 하는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의 관념입니다. p.154
아, 나도 여호와의 방식이 불가사의하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들을 만큼 들었습니다, 카인이 대꾸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리창처럼 맑고 투명해야지요, 항상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p.163
나는 종교가 없는터라,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성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명화나 다른 책의 인용 등으로 어렴풋이 들어 본 이름들이었다.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아무도 여호와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의문을 품은 카인의 말과 행동, 생각을 그려낸 작가의 독특한 문체와 아라비안 나이트의 피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이색적인 요소가 책 속에서 어울어져 너무나도 기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은 어째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시험에 빠뜨리게 하며, 소돔의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진작에 막았더라면 벌하지 않아도 되는 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종교와 인연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종교가 갖는 역기능 보다는 순기능을 존중하는 편이다. 아마 신앙심에 따라서 이 책에 호불호가 따를 것 같으나 허구와 픽션을 가미한 소설에 굳이 예민하게 굴지 않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한 편의 성서 번외편을 보는 듯한 작가의 독특한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가미되어 있다. 그래서 다음에 읽을 책을 <눈먼 자들의 도시>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영화는 비록 평이 안좋았다고 하지만, 작품성에 있어서는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는 책이라 실망시키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게다가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리듬과도 같은 문체를 보는 것 만으로 책에 재미를 보장되지 않는가.
카인 / 주제 사라마구
소재가 마음에 들어 구매했습니다.
평소 기독교는 아니지만 성경에 관심이 있어 신나게 구매했는데
생각보다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대화부분에 따움표 처리가 안되고 서술하듯 술술 풀어져 있어
눈이 쉴 틈을 안줘 읽기가 매우 힘들더라구요.
그리고 기본적인 구약내용을 알고 있으면 더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았습니다.
구약내용은 이렇게지만 사라마구의 해석은 이랬구나 싶어져서
다 읽을 때 쯤에는 성경보다는 사라마구의 해석이 더 맞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기독교분은 읽어보시고 질색을 하시더라구요.
여튼 새로운 해석의 성경같은 느낌이라 신선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카인' - 혹은 카인과 아벨의 비극- 에 대해서는 한번 쯤 들어봤을 터이기에,
카인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소재임에 분명하다.
그 관심이 기독교적이든 반기독교적이든 말이다.
더군다나 작가가 문제적 노벨상 작가면 그 관심은 배가될 것이다.
나도 그런 관심과 기대로 이 책을 선택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 그것도 형제 간의 비극적인 -,
그러면서도 그 살인 동기나 전후 상황이 성경의 몇 줄 안되는 기술만으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류 최초 시대를 그리고 최초의 인류와 문화를 묘사할 것이고,
카인 사건에 대해서 독자가 이해할 만한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독특한 해석, 궁극적으로 그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선사해 주리라 하는 믿음으로 책을 구매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실망이다.
1. 실망인 부분 - 문제 제기와 그 해결
소설은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의 문제적 사건 - 아브라함의 이삭 시험 사건,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 시나이산의 모세, 욥의 시련, 여리고성 함락,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노아의 방주 사건 등에서
발생하는 성서적 문제 사항을 우선 제기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새롭지 않다. 성서가 있어온 후 - 혹은 신학이 있어 온 후 - 단골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들이다. 성서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원초적 문제라고 할까?
물론 이런 문제 제기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원초적 문제는 그만큼 관심이 많은 문제라고 해석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좀 더 한발 나간, 작가 독자적인 해석과 해결 방법이 없다.
내가 소설로부터 기대했던 핵심이 없는 것이다.
"여호와가 앞날을 보는데 개탄할 만큼 둔했다는 것인데, 만일 정말로 그들이 그 열매를 먹는 것을 그가 바라지 않았다면 그냥 그 나무를 심지 않거나 다른 곳에 두거나 철조망으로 둘러싸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 사건에 대해서, 1장)
"여호와의 큰 결함은 질투예요, 자기 자식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질투에 굴복하죠, 누가 행복해지는 걸 못 보는 게 분명해요." (바벨탑 건설인들이 카인에게, 6장에서)"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왜 그녀가 그런 벌을 받아야 했는지 그 이후로 아무도 설명하지 못 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호기심을 치명적인 죄로서 벌하고 싶어 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지능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 중에서, 7장)"
"단지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에, 그런 경쟁자로 여겨지는 존재를 만든 것에 여호와가 분노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삼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사내산의 모세 중에서, 8장)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욥 사건에서 카인과 천사들의 대화, 11장)
2. 흥미로운 부분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재미없지는 않다.
총 13장으로 구성된 짧은 소설이지만,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을 집고 넘어가자.
- 하와의 유혹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고,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지 몰라 괴로워한다.
이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은 여자 이브이다. 하와는 에덴동산을 지키고 있는 천사(아자엘)을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하와가 천사를 유혹하고 그의 여성성을 이용해 - 어떻게 보면 최초의 창녀로 생각될 만큼 - 먹을 것을 구하는 것으로 작가는 묘사한다.
어쨌거나 최초의 여성인데, 꼭 이런 식으로 묘사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작가의 생각은 발칙하다.
"하와는 허리부터 위로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있었다. - 중략 – 하와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손을 천사의 손 위에 올린 다음 젖가슴 쪽으로 살며시 눌렀다. - 중략 – 천사는 동산 안으로 들어가 가장 영양이 풍부하고 감미로운 열매들을 느릿느릿 따서 묵직해 보이는 짐을 지고 돌아왔다." (2장에서)
- 릴리스 : 하와 이전의 여인?
카인이 집을 떠나 처음으로 방문한 놋의 땅에서 만나는 릴리스라는 여인이 있다.
릴리스는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담이 하와를 만나기 전 부인으로 배신하여 악마들의 아내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여인이다.
이런 릴리스를 여기에 배치하고 카인의 정부 역할을 맡긴다.
또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릴리스의 남편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노아를 등장시키는데, 이건 좀 생뚱맞다. 물론 성서의 역사로 보아도 말이 안 되고, 노아의 방주 편에서 실제 노아가 나오는데 왜 이런 설정을 했는지 설명도 없다.
- 노아의 파국 : 카인의 복수
여기저기 시간 여행을 하는 카인은 종국에 노아의 방주에 노아 가족과 같이 탑승한다.
그의 역할은 생식이 불가한 노아의 아들들을 대신해 노아의 며느리들을 임신시키는 것.
이 정도 되면 소설은 막장 드라마가 된다.
소설의 결말은 방주의 카인이 노아를 비롯한 최후의 인류를 모두 죽이고,
여호와를 향한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은 어디 있느냐, 여호와가 물었다. 모두 죽었습니다, 카인이 대답했다. 이 살인자, 네가 감히 내 계획을 망치다니
- 중략 -
이윽고 카인이 말했다, 이제 나를 죽여도 좋습니다. 아니, 나는 죽이지 못해, 하나님의 말은 물릴 수 없다."
(하나님은 카인이 죽임을 면케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13장 중에서)
써놓고 보니 상기의 흥미로운 점 외에는 성서의 기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느다.
대가의 마지막 작품이라 기대를 했지만,
기대한 만큼 아쉬움이 큰 소설이다.